lundi 10 novembre 2008

60년대 공포정치 커지면서 ‘강남 부자’ 탄생 - 한겨레 / 2008-10-31

60년대 공포정치 커지면서 ‘강남 부자’ 탄생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③ 토목국가와 경제성장
‘김신조 사건’이 개발 명분 줘…‘부동산 투기’ 신화 계속될 듯
한겨레 박수진 피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또 다시 이념논쟁이 불붙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과학부, 국방부, 통일부 등이 “역사 교과서가 좌향좌돼 있다”며 잇따라 교과서 수정 의견을 냈고,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관련 학회와 일선 교사들은 “역사는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 독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사 특강’을 시작합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가 전공인 한 교수는 지난 10월13일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매주 월요일 특강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출판>에서 강의록과 녹취록을 정리해 영상과 함께 매주 금요일 오후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특강을 1회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을 시작으로 모두 8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순서

1.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2. 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3. 대한민국은 공사 중: 토목 국가와 ‘경제성장’
4. 헌법정신과 민영화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5. 괴담의 사회사 -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 독도괴담까지
6. 경찰폭력의 역사 -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7. 경쟁 만능의 비극 - 잃어버린 교육을 찾아서
8. 촛불과 민주주의

지난 시간 조작 간첩 사건 등을 비롯한 지난 시절의 ‘공포의 정치’에 대해 살펴봤다면, 오늘 세 번째 강의 주제는 도시 개발, 부동산 문제 등 ‘욕망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둘은 짝패이다. 어린 아이를 다룰 때 혼내기도 하고, 사탕을 사주지도 하지 않는가? 지난 시절 군사정권은 한편으로는 ‘공포’로 억업하면서 다른 한편 ‘욕망’을 부추기고 채우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공포의 정치’와 ‘욕망의 정치’는 짝패이다.

정통성이 없었던 박정희 군사 정권은 ‘힘’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18년 통치 기간 중 절반 이상이 계엄령, 위수령, 긴급 조치 기간이었다. 하지만 힘만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박 정권이 내세운 유일한 구호가 “잘 살아보세”였다. 자기 정권하에서 잘 살게 된 사람을 만들어야 했다. 중앙집권식 개발독재를 통해 뽕나무밭, 배밭이 금싸라기 땅(잠실과 압구정동, 양재)으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상당히 많은 수의 부동산 졸부들을 양산했고, 그들은 군사 정권의 절대적 지지자가 되었다. 군사 정권의 ‘욕망의 정치’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거대도시 서울의 탄생
조선 도읍 직후 한양 인구는 10만 명, 일제 병합 직전이 25만 명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해 2.5배 증가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해방 당시 서울 인구는 100만 명으로 일제 기간 동안 4배가 증가했고, 천만 명 가까이 늘어나는 80년대까지 불과 4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국 전쟁이 이후 서울 인구의 팽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남쪽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때 지방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을 겪어보고, 서울과 서울 사람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사람도 별 거 없다. 나도 서울에 가면 서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60~70년대 급격한 서울 팽창의 심리적 원동력이 되었다.

급속히 팽창하는 인구와 더불어 서울 곳곳에서 군사작전식 건설 사업이 진행된다. 공병대 장교 출신 서울 시장들의 주도로 청계고가도로, 세운상가, 한강 여의도 개발, 아파트 건설 등의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단적인 예로 1969년 5월 15일 하루에만 16곳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특별구역, 강남의 탄생
왜 강남이었을까? 서울 강남 개발사의 연원을 살피다보면 한국의 베트남 파병과 닿는 맥락이 있다. 당시 김일성 역시 베트남에 군사 지원을 고려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호치민이 거절했고, 그 대신 남한 내의 침투 작전이 감행된다. 65년의 대대적인 베트남 파병 직후인 67년, 68년 한반도 내에서 군사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된다. 김신조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오”라고 했던 것이 바로 68년이다. 김신조 사건은 한국 사회의 공포 정치가 확산된 주요 계기가 되었고, 서울에 대한 재구획의 필요성도 이때 제기되면서 한강 이남 강남 개발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된다.

경부고속도로와 강남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정부는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었다. 정부는 땅 주인으로부터 일부 토지를 떼어내 제공받고, 그 토지의 일부에 공공시설을 지어 전체 땅값을 올렸다. 천정부지로 오른 땅값은 땅 주인에게 무상 제공한 토지 가격 이상의 엄청난 이익을 안겨 주었고, 정부나 시 당국 입장에서도 공공시설 부지 이외의 짜투리 공짜 땅(이를 체비지라고 함)을 팔아 공사비용을 충당하고, 덤으로 정치자금까지 챙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강남 부동산 졸부들이 탄생한다. 그들과 함께 강남 개발 정보를 공유했던 일부 공무원과 건설사 관계자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상류계층을 형성하고 군사독재정권의 강력한 지지층이 된다.

토건 국가의 성립
건설업은 대규모 나눠먹기가 가능한 대표적인 산업이다. 담합을 통해 건설사들끼리 돌아가며 공사를 수주하고, 공사비를 부풀려 상납금을 충당하고, 이익을 증대한다. 또한 건설 회사들은 건설 퇴직관료들에게 일자리까지 제공한다. 이렇듯 토건업자들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를 일컬어 토건 국가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토건 국가의 성립에 전위대 구실을 했던 것이 한국전력공사, 농업기반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대한주택공사, 한국토지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6개 개발 공사이다. 이들 개발 공사는 급속한 공업화와 고도성장의 디딤돌 역할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대규모 자연파괴와 부실한 경제구조의 기형적 성립이라는 부작용이 있었다. 결국 군사 정권, 토건업체, 개발공사의 삼자 동맹이 토건 국가의 기본 구조를 이루었다.

전 국민이 모두 부동산 부자를 꿈꾸는 사회
개발의 가치를 미리 알고, 땅을 선점한 사람들이 거대한 부를 획득하면서 새로운 계층을 형성한 것이 한국 사회의 한 모습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 게임에 처음부터 참여할 수 없었다. 지금의 뉴타운 사업에서 대부분의 ‘원주민’이 그들이 살던 자리에 세워질 아파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개발 사업의 떡고물은 원래 구조상 일부 사람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재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도 “땅이나 아파트를 사면 손해보지 않는다”라는 신화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 ‘부동산 공화국 강남편’을 제작한 PD가 나중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한 것은 물론 나쁘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왜 그때 우리 아버지가 강남에 땅을 사 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닐까?”

지금 한국은 절차상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화되었는데도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공포의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지만 ‘욕망의 정치’ 논리가 더 강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애초에 이기기 힘든 게임인데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쫓아가고 있는 그 욕망의 논리 때문에 우리가 더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 …

정리 <한겨레출판> 편집부 박상준 laughter@hanib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