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0 novembre 2008

‘정권 입맛대로’ 근·현대사 친일·독재미화 - 한겨레 / 2008-10-5

“반미·반시장적 성향” 수정 발벗고 나서
오랜 논의 끝 마련 검정시스템 부정 우려
학계 “이념논쟁 되면 분열 갈등만 증폭”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또 다시 이념논쟁이 시작됐다. 2004년과 2005년에도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포럼이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반미·좌편향’이라고 공세를 퍼부었다.

이번엔 정부가 앞장서고 있다.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전 장관은 “역사 교과서가 좌향좌돼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국방부와 통일부도 교과서 수정 의견을 냈다. 결국 교과부는 “오는 10일까지 국사편찬위원회 보고서를 넘겨받아 이달 말까지 교과서 수정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 교과서 수정 압력을 둘러싼 문제점을 살펴봤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정치권에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방침을 밝힌 것은 우리 사회가 오랜 논의 끝에 마련한 교과서 검정 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역사학계 등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검정 단계, 역사 관련 학회,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증에서 두루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난 만큼, 이념논쟁은 소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 교과서포럼 수정 요구


■ 검정 시스템 부정? 역사학계는 이런 교과서 수정 움직임에 대해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정부가 직접 교과서 수정에 발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김도연 전 교과부 장관은 지난 5월과 7월 “편향된 역사교육으로 청소년들이 반미·반시장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발언했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부처별로 살펴보면 고쳐야 할 부분이 꽤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통일부까지 교과서 수정 요구에 나섰다. 결국 교과부는 “교과서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정부가 만든 7차 교육과정과 교과서 서술 지침, 검정위원들의 검정 등 정부 스스로 검정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며 “정권이 달라질 때마다 자신의 입맛에 따라 교과서가 바뀌는 등 다시 국정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국근·현대사 검정 교과서는 2003년부터 학교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다. 민간 출판사가 만들긴 하지만 검정교과서로 교과부 검정을 받으려면 국정 교과서만큼이나 ‘검열’이 심하다고 출판사와 집필자들은 말한다. 교과서 집필자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는 “검정 시스템을 보면 친북·반미·좌편향 교과서는 발행될 수 없는 게 상식”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등 6종의 교과서는 1997년 김영삼 정권(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집권) 시절의 7차 교육과정을 근거로 한 서술 지침에 따라 만들어졌다. 서술 지침을 보면 ‘1 대한민국의 수립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 등 교과부가 짜 놓은 목차·용어까지 그대로 써야 한다. 서술 방향도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6·25 전쟁 후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 과정과 정권 말기의 반독재운동 3·15 부정선거 등에 대해 설명한다’라고 준거안에 밝히고 있다. ‘교과서포럼’이 주장하듯 특정 사관을 중심으로 집필하기 어려운 구조다. 교과부의 교과서 담당 공무원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을 정도다.

집필 뒤엔 검정위원들이 △대한민국 국가체제 부정 및 비방 여부 △특정 국가·단체·계층에 대한 왜곡·비방 여부 △내용 오류나 편향적 이론 및 시각 포함 여부 등 25개 항목을 점검한다.

■ 4년 전 검증 끝나 교과서 수정을 검토 중인 국사편찬위원회는 2004년 12월 <한국근·현대사> 6종 교과서를 검증해 “저자들의 관점에 따라 서술 내용이나 편제에 차이는 있지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고시한) ‘국사교육 내용 전개의 준거안’과 ‘교육과정’에 제시된 지침을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교과서 검토에는 대학 교수 3명, 현직 역사교사 3명, 국사편찬위 관계자 2명 등 8명이 참여했다. 연구 책임을 맡았던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논란이 된 출판사나 특정 부분만 검토했던 것이 아니라 6개 교과서 전반에 대해 살펴봤고, 교과서들은 집필 원칙에 맞췄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교과서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만 뜯어서 이념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소모적 논쟁만 가중된다”고 덧붙였다.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등 역사학회도 2004년 10월 금성출판서 교과서에 대한 편향성 여부를 공개 검증한 뒤 “7차 교육과정에 충실했다”는 공동 의견서까지 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역사)는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근·현대사 해석을 놓고 갈등이 클 수밖에 없다”며 “역사 검증이란 게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학계에서 끊임없는 논증을 통해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만큼, 역사 교과서 문제는 학계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정치공세와 이념논쟁이 되는 순간 아무런 해결점 없이 분열과 갈등만 증폭된다”고 강조했다.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