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30 mars 2009

Deux journalistes américaines arrêtées en Corée du Nord, selon Pyongyang / La Presse Canadienne / 2009-03-21

Deux journalistes américaines arrêtées en Corée du Nord, selon Pyongyang

21 mars 2009

SEOUL — Deux journalistes américaines ont été placées en détention pour avoir franchi clandestinement la frontière nord-coréenne, annonce samedi l'agence de presse officielle nord-coréenne, en ajoutant qu'elles faisaient l'objet d'une enquête.

Les Américaines ont été arrêtées le 17 mars après avoir franchi "illégalement" la frontière entre la Chine et la Corée du Nord, précise l'agence KCNA.

Ces interpellations interviennent à un moment très sensible, alors que Pyongyang se prépare à mettre en orbite un satellite, début avril, un lancement que la communauté internationale soupçonne de dissimuler en fait un test de missile.

Le programme nucléaire de la Corée du Nord est actuellement sur la sellette, et la tension monte avant ce lancement. Pyongyang a fermé à plusieurs reprises sa frontière sud ces derniers jours et suspendu le "téléphone rouge" qui est la seule ligne téléphonique avec la Corée du Sud, pour protester contre des manoeuvres militaires conjointes des forces du Sud avec les Américains. Le régime communiste a également chassé du pays cinq organisations humanitaires américaines.

Washington a indiqué être en contact avec Pyongyang au sujet de deux journalistes américains en détention. La secrétaire d'Etat Hillary Rodham Clinton "se consacre actuellement à cette affaire", a déclaré vendredi Robert A. Wood, porte-parole du département d'Etat.

Selon les médias sud-coréens et des missionnaires s'occupant des réfugiés nord-coréens, les deux Américaines enquêtaient sur les réfugiés en Chine, avec un cameraman et un guide. Elles travaillent pour Current TV, chaîne de l'ex-vice-président américain Al Gore, basée à San Francisco. Le groupe aurait été interpellé par les soldats nord-coréens alors qu'ils franchissaient le fleuve qui tient lieu de frontière, et les deux hommes auraient réussi à leur échapper et à regagner la Chine. Ils auraient été interpellés par des garde-frontières chinoise, et on n'avait pas plus de précisions sur où il se trouveraient actuellement, selon les médias sud-coré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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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redi 25 mars 2009

끝나지 않는 ‘선화공주 실체’ 논란 / 세계일보 / 2009-03-16

한국사상사학회 발표회 다양한 주장 제기

연초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백제 사리장엄구를 둘러싼 학계의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삼국유사’에 전하는 선화공주의 실체 논란이다. 사리봉안기에서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상사학회가 14일 연 월례발표회에서도 선화공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의 기록을 실제와 설화를 구분해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선화공주는 미륵사를 창건했을까=한 국학중앙연구원의 조경철 박사와 국가기록원 길기태 박사는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선화공주와 미륵사의 관련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들은 3탑 3금당으로 이뤄진 국내 유일의 3원(院) 병립 가람인 미륵사가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창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조 박사는 미륵사가 불교의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번에 서탑에서 발견된 봉안기에는 미륵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639년 창건된 서원과 629∼639년에 세워진 동원은 석가신앙(법화신앙)을 숭상한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반면 목탑이 있었던 중원은 ‘삼국유사’ 의 기록처럼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사리봉안기를 제일 먼저 해석했던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미륵사를 무리하게 선화공주와 연결 짓지 말라”고 반박했다. 그는 “미륵사의 가람 배치는 처음부터 마련된 기본설계에 따라 건립됐다”며 “이 점에서 3원 가람 각각의 창건 시기가 달랐다거나 혹은 창건 발원자가 달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미륵사는 사택왕후가 세운 것이며, 사리봉안기에서 말하고 있는 가람은 3원으로 된 미륵사 전체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미륵사 창건에 선화공주가 관련됐다고 주장한다. 미륵사는 단기간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에 걸쳐 조성됐으며, 또 무왕은 재위기간이 40년이나 되므로 무왕의 왕비가 두 명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는=‘ 삼국유사’는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밝히는 동시에 미륵사가 무왕대에 창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했으며, 이는 미륵사가 무왕대에 창건됐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밖에 ‘삼국유사’ 속 왕과 왕비가 사자사로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를 지나갔다는 기록, 또 미륵사 터가 못을 메워 만든 것이라는 기록도 과거 발굴을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이에 따라 선화공주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선화공주를 기록한 ‘삼국유사’ 내용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상현 교수는 “사리봉안기와 ‘삼국유사’ 무왕조 기록의 사료적 가치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며 “사리봉안기는 미륵사를 창건하던 당시에 작성된 기록인 데 반해 ‘삼국유사’는 13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후대적 인식과 설화적 윤색이 가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많은 자료를 인용했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경우가 전체 항목의 반 정도인 70여 항목이나 된다. 김 교수는 “특히 무왕조의 경우 뚜렷하게 전거를 밝히지 않은 채 서술하고 있으며, 일연이 참고한 고기(古記)는 사료적 가치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어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설화로서 의미는 있지만 이를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며 “‘삼국유사’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설화만으로 된 서술 또한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조승희는 그날 '왜' 총을 쏘았나 / 연합뉴스 / 2009-03-11

2007년 4월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은 한국계가 범인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충격을 받은 많은 한국인은 미국인들에게 조승희 대신 용서를 빌었고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 혹시나 이 일로 피해를 보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기자 후안 고메스 후라도는 “이 일은 그(조승희)가 한국인이란 사실과 무관한 것이며 따라서 한국사회가 보여준 지나친 피해의식과 ’집단 참회’와 같은 반응은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매드무비’(꾸리에 펴냄)를 통해 ’그 날’의 사건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책은 우선 마치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것처럼 생생히 그날을 묘사한다. 저자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과 수천 쪽에 달하는 경찰 조서를 바탕으로 그날 새벽 조승희의 뒷모습을 본 기숙사 룸메이트의 이야기부터 조승희의 자살까지 4월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참극의 씨줄과 날줄을 촘촘히 꿰어가며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그날 벌어졌던 일들을 재현하는 것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저자는 ’어떻게’에 그치지 않고 그날과 조승희의 과거를 토대로 ’왜’ 조승희가 총을 난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한 편의 매드 무비(Mad Movie: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다른 작품들의 내용 일부를 끼워 맞춰 만든 동영상)를 완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날을 이야기하려면 조승희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시절로 시계를 돌려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잘 뒤섞여 놀지 않았고 말이 없었던 조승희는 미국에 이민 온 뒤에도 외톨이 그 자체로 생활해야 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던 큰 교회 대신 조그만 교회를 다녔고 여전히 사교성이 부족했으며 하루 내내 돈을 벌어야 했던 부모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그에게는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에게 매우 힘들고 슬픈 시기였다. 학생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승희의 침묵과 무표정한 얼굴, 낮고 굵은 목소리를 비웃었다. 물건을 던지고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1달러 지폐를 흔들며 뭐든지 말을 하면 돈을 주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또 주로 부잣집 아이들이었던 고등학교 운동선수들과 인기 많은 학생은 만만한 상대였던 조승희에게 욕을 퍼붓고 때리기도 했다.

학교에서 받은 이러한 학대는 조승희의 의사소통 부족과 결합해 유년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특징을 강화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됐고, 그는 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타는 증오심과 분노감을 갖게 됐다.

저자는 FBI 전직 심리분석관과 심리학자들의 분석을 통해 결국 자신이 학대받았고 학대받는다고 느낀 삶을 경험한 조승희가 타인들의 삶과 죽음을 지배할 힘을 찾기 시작했고, 그가 그 힘을 사용하기로 한 순간 이후 그가 뒤로 돌아올 방법은 없었다고 분석한다. 왜냐하면, 피해 망상적 환각 증세가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멈춤은 자기 머릿속의 어두운 심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의심의 여지 없이 조승희가 지닌 정신적인 문제가 야기한 폭력의 싹은 피할 수도 있었으나 어떤 시기에 한국인들이 미국 내에서 경험했던 부당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간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공존과 조화는 동화와 정체성 상실의 동의어가 아니며 아마도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한 고민의 계기를 찾는 것이 이 책에서 추출할 수 있는 교훈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lundi 16 mars 2009

남북역사도 괴리 - 한국일보 / 2009-03-11



남북한의 역사 이질화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0일 "최근 입수한 북한의 '조선력사지도첩'을 분석한 결과 특히 고대사 부분에서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접점을 이루기 힘들 만큼 큰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선력사지도첩'은 북한 사회과학원과 국가측지국이 10여년의 작업을 거쳐 2007년 11월 30일 발행한 역사지도다. 송 교수 등 국내 역사학자 20여명은 지난달 23~28일 개성 만월대(고려왕궁) 발굴 자문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다가 북한 중앙역사박물관에서 이 지도를 구입했다.

'조선력사지도첩'은 A4 용지 크기로 김일성ㆍ김정일의 교시, 목차 외에 본문 109쪽으로 구성돼 있다. 이 지도첩은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출발점을 30~50만년 전으로 보고 있는 남한측 역사학계와 달리 그 출발점을 100만년 전으로 설정해 시대구분표를 작성했다. 전체적으로 고대국가의 건국 연대를 끌어올리고 영토를 광대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지도첩에 따르면 고조선(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원전 30세기 초에 시작한다. 이후 중국 북부와 한반도 남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뒤 기원전 15세기에 '후조선'으로 교체되며, 같은 시기에 고대국가인 부여와 구려가 성립한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의 부여는 우리가 아는 부여와는 다른 것이며, 우리가 아는 부여는 '후부여'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2세기 말 지도에 등장한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도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까지 앞당겼다. 또 6세기 말의 고구려는 한반도 대부분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ㆍ내몽골자치구, 허베이(河北)성 일대뿐만 아니라 러시아 아무르주와 연해주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나와 있다.

송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남북한의 고대사 체계가 완전히 이질화되기 시작한 것을 이 책자는 보여준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북한의 이 같은 고대사 기술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으로 보인다"며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교류가 시급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산신에 빠진 미국인 메이슨 - 조선일보 / 2009-03-10

한 국의 산신(山神)에 빠져 20여 년 동안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혼자 연구한 학자가 있다. 이름은 데이비드 메이슨(David Mason). 20여 년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결혼도 하고 한국의 산신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 졌지만 미국인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한국의 산신연구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지금까지 눌러앉게 됐다.

대 학에서도 동양철학을 전공한 철학도였다. 미시간 대학을 입학해서 81년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했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 졸업 후 한중일, 태국, 대만 등지를 배낭여행했다. 그의 역마살의 시작이었다. 불교에 흠뻑 빠져들어 귀국을 늦췄다. 영어강사 생활하면서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의 불교를 비교 조사했다. 주업은 영어강사였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동양철학이었다.

84 년 잠시 미국으로 돌아가 동양철학과 문화에 대한 강사생활을 했지만, 동양의 산신에 대한 매력과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이듬해 다시 돌아왔다. 영어강사 생활하면서 산신에 대한 연구는 계속 됐다. 86년과 87년엔 경주시와 포스코에서 영어강사와 외국인에 대한 한국 문화 가이드를 맡으면서도 산신 찾아 다녔다.

88년엔 안정적으로 산신연구를 할 기회를 잡았다. 강원대에 영어회화 교수로 채용된 것이다. 여름과 겨울 방학엔 영어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까지 했다. 영어회화 관련 책까지 냈다.

생 활은 안정됐다. 하지만 시간만 나면 산을 찾았다. 90년엔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왕립 아세아학회 한국지부(Royal Asiatic Society-Korea Branch, RASKB)를 미국, 영국, 독일 3개국이 합작 설립했다. 왕립 아세아학회 한국지부는 영리 목적 없이 한국의 예술, 관습, 역사,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메이슨은 여기서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RASKB에서 2005년까지 일했다. 방문한 곳만 해도 수백여 곳에 달했다. 한국문화에 대한 깊이를 더해 갔다. 산신에 대한 연구도 막연한 조사와 탐방이 아닌 유래와 역사와 한민족과의 관련성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강 원대 교수 생활은 88~97년까지 만 10년간으로 끝났다. 외국인에겐 10년 이상 교수 자격이 주어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영어회화 교수로 2년을 더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의 문화, 종교, 철학의 역사성에 대해서’란 주제로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산신연구에 깊이를 더한 것이다.

강 원도에서 10여 년간의 생활은 그에게 ‘산신연구’에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산신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전국을 누비며 조사 탐방하고, 연구한 결과물을 영문판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99년 한국 산신에 대한 저서인 ‘산신(SPIRIT OF THE MOUNTAINS:Korea's san-shin and Traditions of Mountain-worship)을 발간했다. 한국 산신의 유래, 의미, 한민족과의 관련성, 역사성 등에 관해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2002년에 한국 문화에 대한 최우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3년에 한글 번역판으로 나왔다.

그는 책이 나오기까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내 스승은 조자룡 박사다. 조자룡 박사는 한국의 무속 연구에 몇 안 되는 권위자로 꼽힌다. 80년대 산신에 대해서 연구하다 조 박사를 만났는데, 그가 ‘데이비드, 너는 꼭 산신에 대한 책을 써야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쳐 들었으나 워낙 자주 말해서 집필하게 됐다. 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의 스승 조자룡 박사는 지난 2000년 무속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운명을 달리 했다. 데이비드가 추모사로 스승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았다.

2001~2005 년까지는 문화관광부에서 한국 문화 안내 가이드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강의까지 맡아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렸다. 특히 2002년 한국 방문의 해엔 유일한 외국인으로 팀원으로 참가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 활약했다.

2003~2005 년엔 한양대학교 국제관광 대학원에서 한국관광 겸임교수로 강의를 맡기도 했으며, 2005년엔 도영심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UN산하 세계관광기구 STEP재단 홍보 디렉트를 맡아 역할을 했다. 문광부에서 활동하던 2005년 봄 경희대에서 연락이 와, 6개월간의 강사생활로 테스트 받은 후 그 해 가을부터 경희대 호텔관광학과 교수로서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호텔관광학에 대한 연구와 병행해서 한국의 문화, 특히 산신에 대해 외국에 더욱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왜 산신에 대해서 그렇게 매달리며, 한국인에게 산신은 무엇일까?

“ 어렸을 때부터 동양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 때 전공도 그 분야로 택했다. 중국 도교, 한국의 도교, 선불교 등에 대해서도 연구를 많이 했다. 연구할수록 빠져들었다. 산신은 인간과 산이 의사소통하는 관계로서 존재하고, 인간과 산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존재한다. 한국에선 불교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전부 순수한 불교가 아니다. 도교와 유교와 샤머니즘과 혼합된 불교도 많다. 산신은 샤머니즘, 도교, 불교 모두와 관련되어 있고, 서로 의존적이다. 이런 산신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굉장히 밀접하고,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는 또 한국의 산마다 산신의 영령들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계룡산, 지리산, 설악산 등 각각의 산마다 특징이 다른 산 영령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한국의 수백개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절과 암자에 있는 불교 벽화(일종의 탱화)를 촬영해 보관했다. 한번은 그가 촬영한 절이 불타는 바람에 탱화조차 없어져 버렸다. 그 절에서 연락이 와 보관하고 있는 탱화사진을 빌려달라고 했다. 사진을 보고 탱화를 다시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를 통해서 한국의 산신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박정원

[19C 제주인 중국에 '위장표류'한 까닭] - 매일경제 / 2009-03-10

류쉬펑 연구원 "보상금 노려 표류 감행"

해양사라는 측면에서 18-19세기는 '표류'(漂流)의 시대였다. 중국인이 한반도에 표류하는가 하면, 조선인이 중국으로 표류하기도 하고, 류큐인(지금의 오키나와), 일본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인으로 중국으로 표류한 사건을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문헌에서 뽑아보면, 1710년 이후 1884년까지 175년간 도합 172건으로 1년 평균 1건씩 발생한 것으로 나온다. 비공식 기록까지 합친다면 이보다 숫자는 더 많아진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대만 중앙연구원 인문사회과학연구센터 류쉬펑(劉序楓) 연구원은 실제 표류가 아닌 데도 표류한 것처럼 가장하는 가짜 표류인 위장표류가 많았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동아시아문화네트워크 사업단(단장 정민)이 오는 13일 이 대학 대학원 7층 화상회의실에서 개최하는 '표류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초청된 류 연구원은 이 '위장표류'의 실태를 점검한다.

주최 측이 미리 배포한 그의 논문은 19세기에 빈발한 위장표류 사건 중에서도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1821-1850)에 무려 네 차례에 걸쳐 중국으로 위장표류한 제주도 사람 고한록(高閑祿)의 행적을 집중 조사했다.

그의 표류 행적은 중국 기록에 풍부하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일성록(日省錄)과 같은 조선시대 문헌에도 더러 남아있다.

이에 의하면 고한록은 도광 7년(1827년) 4월 초이튿날 강소성(江蘇省) 동대현(東臺縣)에 표착한 것을 필두로 6년 뒤인 도광 13년(1833) 6월26일에도 같은 강소성 해주(海州) 경내의 해산항(海山港)으로 표착했다.

이어 3년 뒤인 도광 16년(1836) 8월 초삼일에는 강소성 남회현(南匯縣)에 표착했다가 조선에 돌아간 뒤에는 이듬해(1837) 9월에는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으로 표착한다.

하지만 고한록의 이런 잇따른 행적은 결국 그가 "일부러 중국으로 표류했다"는 소문이 제주지역 사회에 돌기 시작하고, 이를 고리로 제주도 목사가 고한록을 직접 심문한 결과 위장표류였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그에 대한 심문 기록은 일성록 헌종 44년(1838) 7월16일자에 보인다.

조사결과 고행록은 중국기록에 나타난 네 번 외에도 1829년 3월에도 동료와 함께 중국을 향해 위장 표류를 감행했다가 풍랑에 밀려 실패하고 전라도 우수영으로 되돌아온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고한록은 왜 이 같은 중국으로의 위장표류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을까?

제주목사의 심문에서 고한록은 "중국에서 표류민을 후하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구호금을 노리고 범행을 저지른 셈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표류민에게 각종 의식을 제공한 것은 물론, 난파한 배는 값을 지불했다. 1833년 제2차 위장 표류 때는 "이전보다 3배나 (구호 원조금이) 더 많았다"고 고한록을 진술했다.

중국은 중국대로 위장표류인 줄 알면서도 대국(大國) 행세를 하는 차원에서 그다지 엄격하게 이 문제를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위장표류 사건이 빈발하자 조선정부에서는 "잡힌 자에게는 엄한 형벌을 내리고 일정한 장소로 귀양보낸다"는 규정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이를 비롯해 표류를 근세 동아시아 문화 접촉의 통로로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자 하는 참신한 발표들을 마련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세계 최대 한자어휘 한국식 용례 풀이… 지적 문화유산 일궈 - 대전일보 / 2009-03-10

‘한한대사전’ 편찬 장충식 단국대 명예총장 인터뷰

편찬에 들어간 지 30년 만인 2008년 말에 출간돼 세상을 놀라게 했던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16권 전질을 펴내는데 들어간 사업비만도 310억 원에 연인원 20여만 명이 투입된 세계 최대 규모의 한자사전인데다, 인문학 투자가 빈약한 현실에서 정부기관이 아닌 사립대가 혼자 힘으로 일궈낸 대역사여서 국내외 학계의 놀라움이 크다.

학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인내, 열정이 일궈낸 이 학술적 대역사를 이끈 장충식 단국대 명예총장(77)은 30대 중반의 나이인 1967년 단국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사전편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0년 편찬을 맡을 동양학연구소를 설립한 뒤 초대 연구소장으로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1896-1989)선생을 영입했다. 공식 편찬 사업에 들어간 건 1978년 6월.

1950년대 말 고려대 대학원에서 동양사를 공부하던 시절, 일본의 모로하시 사전(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말고는 참조할 사전이 없다는 것을 보고 결심한 대사전편찬이라는 필생의 과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국의 전문가나 연구자들도 이 사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장 명예총장은 “대한화사전은 일본식 뜻풀이여서 일본어를 중역해야 했고, 한자 어휘의 한국식 용례나 풀이가 없거나 중국 원전과 다른 해석을 내놓아 한국 연구자들이 사용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 한자를 전한 우리가 일본 한자사전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수치심마저 느껴 사전편찬을 결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말했다. 사전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대중화를 꾀하기 위해선 하루빨리 전문사전 후속편찬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장 명예총장은 “한한대사전이 한국의 지적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살아있으려면 국가와 사회가 함께 가꾸고 보듬어야 한다”며 지적소유권을 공유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사전 대중화가 매우 중요한데, 한한대사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후속작업이 요구되나.

▲16권 전질을 다 구입해서 보기엔 힘이 들것이다. 한한대사전의 방대한 콘텐츠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온라인 검색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5년에서 7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또 이 사전을 기초로 해서 쓰임새를 분야별, 성질별로 나눠 정리한 전문사전도 편찬돼야 한다.

사전이 살아 있으려면 끊임없는 업데이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다.

-후속사업으로 전문사전을 편찬하겠다고 하셨다. 막대한 예산과 시간, 노력이 들어가는 방대한 작업이지 않는가.

▲한한대사전은 원전에서 드러난 모든 어휘를 각 쓰임새별로 샅샅이 찾아 풀이하는 백과사전식 편집을 표준으로 삼았다. 인명, 지명, 제도 명, 관직 및 의학,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자 어휘를 수록하고 있어 원전해석에 매우 유용하게 편찬됐다. 사전이라기보다는 백과사전에 가깝다.

기존 사전은 부수별 한자 어휘의 뜻을 풀이하는 자전(字典)이나 옥편으로서의 기능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 경제, 종교, 천문, 풍속, 의학, 동식물 등 분야별 전문사전을 새로 편찬할 것이다. 한한대사전이 튼튼하게 살아있으려면 수많은 가지를 쳐야한다.

분야별 전문기관 등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물론 판권을 공유할 수도 있다.

빠르면 내년쯤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올해는 어느 분야부터 시작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편찬을 위한 여건조성에 힘을 쏟겠다. 분야별 전문 사전이 편찬되면 연구자와 학생들, 국민들이 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립대학이 편찬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대역사였다. 30년 동안 20만 명이 투입됐고, 사업비만도 수백억 원이 들어갔다. 지적소유권을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중국 한어대사전은 상해시와 중국 5개 성(省)정부가 힘을 합쳐 15년 만에 완간됐고, 대만의 중문대사전도 정부기관인 국방위원회가 주축이 돼 착수 1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한한대사전은 수록된 한자와 어휘수가 절대적으로 앞선다. 1996년에 완간된 ‘한국한자어사전’에도 한국에서만 쓰는 고유한자와 어휘 8만4000단어가 수록돼 있다. 이를 합치면 앞으로도 중국이나 일본이 감히 따라오기 힘든 방대한 규모의 한자 전문사전을 갖게 된다. 한국이 한자문화 콘텐츠의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재탄생돼야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240년 동안 쉼 없이 개정, 증보되지 않았나. 이는 사회적 관심과 지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지적소유권은 분야별 전문사전에 한해서 공유할 수 있다.

신용과 보급능력, 재정적 뒷받침이 가능한 기관이나 기업, 국가라면 지적소유권을 공유할 수 있다. 물론 감수 권한은 대학이 가져야 한다.

-한한대사전을 탄생시킨 동양학연구소의 활동영역을 일본으로까지 넓힌다고 들었다.

▲동양학 연구소는 그동안 한한대사전 편찬에 온 힘을 쏟아왔다. 후속편찬 사업의 중심에도 설 것이다.

동양학연구소는 한국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학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서양에 널리 알리는 중심핵이 돼야한다.

최근에 일본에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동경분소를 뒀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일교류사를 비롯해 일본과 한국사를 함께 연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다.

민족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문헌적 고증을 바탕으로 사실에 근거한 연구를 펼칠 것이며 이런 연구 성과들을 적극 알려낼 것이다. 중국학자들도 참여하길 바라고 있다.

또 동양학연구소를 통해 일본사를 연구하는 한국연구자들을 길러낼 것이다.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형성하는 길이다.

올해부터 일본에서 본격적인 연구활동이 펼쳐질 텐데, 한일 양국의 관심이 필요하다. 뜻있는 후원자들도 함께하길 바란다.

-한한대사전과 같은 사업은 국가적 사업이다. 바람이 있다면

▲사전은 한 나라 문화유산의 바로미터다. 처음엔 일부 재단이사들과 교수들이 사전 편찬 예산이 있으면 실험기자재라도 한 대 더 들여놓자며 반대가 심했다. 오랜 세월동안 참고 믿으면서 기다려준 재단과 교수진, 교직원 등 대학 구성원들께 감사드린다.

아시다시피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대사전편찬은 이웃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대학이나 민간기관이 맡아할 사업이 아니었다. 시작할 때 만해도 15년 일정에 30억 예산을 예상했는데, 그 두 배의 세월에 열배 이상의 예산이 들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30년 세월은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시작이다. 선조가 남긴 한문문헌에서 쓰인 한자 용례들을 지속적으로 보충해야 되고 사전활용의 대중화도 서둘러야 한다. 이제부터야말로 국민과 정부, 기업 등 범사회적 지원과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다. 우리나라의 소중한 지적자산인데, 다함께 소중히 가꾸지 않으면 살아있는 유산이 되지 못한다. 국가적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힘을 모아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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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1932년 중국 톈진 출생 ▲1955년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 수료 ▲1957년 단국대 정치과 졸업 ▲1960년 고려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 ▲1964년 미국 브릭함영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1967-1993년 단국대 총장 ▲1984-1989년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스포츠과학학술대회 조직위원장 ▲1986년, 1989년 남북체육회담 한국대표 ▲1990 북경아시안게임 한국 단장 ▲ 1996-2004 학교법인 단국대학 이사장 ▲1996년 올림픽 훈장 ▲200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2003-2004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2003-2004년 국제로타리 3650지구 총재 ▲2004-현재 범은장학재단 이사장 ▲2008년-현재 단국대 명예총장

◇저서

‘십팔사략’(1969), ‘세계문화사’(1975), ‘위대한 유산을 위하여’(1974),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2003) 등

고경호기자

[미륵사 사리장엄구 어떻게 봐야 하나] - 매일경제 / 2009-03-11

불교신앙.유적.유물 각종 논쟁 양산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초석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지난 1월14일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639년) 사리장엄구는 각종 논란을 양산했다. 현장과 유물이 공개된 직후 언론의 관심은 단연 선화공주에 맞춰졌으나 학계가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관심 사항에 따라 실로 다양하다. 두 달가량이 흐른 지금 학계는 발견이라는 흥분을 접고, 이를 차분히 검토하는 자리를 연이어 마련한다.
한국사상사학계가 14일 오후 1시 서강대 다산관에서 이를 주제로 월례발표회를 하며, 신라사학회는 국민대 한국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일주일 뒤인 21일 오전 11시 국민대 경상관에서 미륵사 출토 성과에 초점에 맞춘 정기발표회를 개최한다.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또한 다음 달 24-25일 백제학회와 함께 전북도청에서 발표자만 9명을 내세우는 대규모 미륵사 학술대회를 연다.

이 학술대회들을 통해 미륵사지 창건 주체와 정치ㆍ종교(특히 불교사상)적 배경, 심초석 출토 불교공양품의 성격 등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다만, 이 학술대회들의 발표자 대부분이 미륵사와 관련한 논문을 적어도 1편 이상 발표한 적이 있는 까닭에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학설에 유리하게 이번 발굴성과를 해석하려 하거나, '지역정서'를 배려하는 듯한 경향도 감지된다.

◇미륵사 창건주체

이른바 선화공주 논란과 맞물려 학계가 가장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대목이다. 이번 사리봉안기 발견 이전에는 백제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합작설'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근본이 흔들렸다.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적어도 서탑) 창건 주체를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王后)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는 흔적도 없다.

이런 곤혹스러움에 철석같이 무왕-선화공주 합작설을 주장하던 학계는 여전히 선화공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학계는 '분리설'을 내세운다. 미륵사 창건시기는 물론이고, 창건주체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륵사는 단기간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에 걸쳐 조성됐으며, 서탑이 축조된 639년 시점에는 창건주체가 사택씨인 백제왕후라 해도,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학계는 왕후 또한 분리한다. 즉, 무왕은 재위기간이 40년이나 되므로, 이 기간 내내 사택적덕의 딸이 계속 왕후였다는 보장은 없으며, 초반기 언젠가는 선화공주가 왕후로 활동했으리라 추측한다.

한국사상사학회에서 발표할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 박사는 미륵사가 중원(中院)ㆍ동원(東院)ㆍ서원(西院)의 이른바 3원(三院)을 갖춘 구조임을 들어 "선화공주에 의해 중원이 만들어지고, 사택왕후에 의해 동ㆍ서원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문헌 중심 백제사 연구를 주도하는 노중국 계명대 교수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사리봉안기 발굴이 선화공주를 완전히 내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담긴 발표를 예정하고 있다.

◇미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

이 또한 선화공주 문제만큼이나 충격을 주는 대목이다. 미륵사 창건 내력을 전하는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삼척동자가 봐도 그 사상적 배경은 미륵사상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하고 난 뒤에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나 세상을 교화하게 될 것이라는 미륵사상이 창건 배경이라고 누구나 주장했다. 사찰 이름 자체가 미륵사이니 이를 의심하는 연구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상은 흔적조차 없다. 백제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현세불인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돈독한 신앙심이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불교학계는 '법화경'과 미륵사상의 접목을 내세워 타개하려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번 사리봉안기가 말하는 불교사상은 근본이 법화경에 닿아 있으며, 그런 법화경에 미륵신앙이 나오므로 미륵사를 창건한 불교사상은 여전히 미륵사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경철 박사가 이런 주장을 하며, 같은 불교사상사 전공인 길기태 박사는 이와 상통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식의 해석, 즉 "무왕 시대 초반기에 (백제에서는) 미륵사상이 유행하다가 의자왕이 즉위하던 시점에서는 법화경으로 변모해 간다"는 요지의 발표를 한다.

◇사리공양품의 성격

신라사학회 발표에서 이에 대한 집중 검토가 있을 예정이다. 고대 장신구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은제관식(銀製冠飾)을 특히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이전까지 발견된 백제 은제관식은 모두 12점이며 세부적인 차이가 적지 않다. 또 그 중 어떤 것도 제작시기를 알 수 없었다.

이번 미륵사 서탑 출토 은제관식 2점은 제작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그것이 탑 안에 매납된 시기는 639년임을 확인했다.

종래 은제관식은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 차이를 반영한다는 것이 주류적인 학설이었다.

이에 이 교수는 이번 발표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확실한 은제관식 실물자료를 확보하게 됐으며, 이를 고리로 기존에 알려진 은제관식의 선후 관계를 알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간 세부적인 양식 차이는 신분에 따른 구별이 아니라 "제작 시기가 다른데 따른 현상"임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을 발표한다.

서체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사리봉안기에 적힌 서체가 중국 북조(北朝)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밝히는 한편, 역시 글자가 적힌 공양품인 '금제 소형 금판'이라는 유물은 화폐 기능을 한 '금덩어리'라는 주장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 외에도 사비시대 백제 지배층에서 막강한 위광을 누린 가문인 사택씨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학계가 비중 있게 다룰 것으로 전망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mercredi 11 mars 2009

98%가 주 40시간 이상 근무… 업무 과다 시달려 - 세계일보 / 2009-03-03

정부, 예산·인력 지원도 없이 "복지 강화"… 사회복지사들 허리 펼 날 없다
중산층 붕괴·저소득층 증가로 복지수요 증가
98%가 주 40시간 이상 근무… 업무 과다 시달려
후원금 의존하는 기초단체 서비스질 저하 우려

서울 양천구 한 복지관에서 재가복지를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A씨는 최근 야근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구청 지원금 외에 복지관 운영비까지 사용할 만큼 지원이 필요한 이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 달 평균 3∼4가구가 추가로 늘어나고 있어 일주일에 3∼4번 야근을 한다. A씨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다행일 정도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적재적소에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사회복지사로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지원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B씨는 최근 몰려드는 활동보조인·요양보호사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2명이 지원 사업은 물론 보조인·보호사 관리까지 담당하다 보니 이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B씨는 “자격 있는 바우처를 선별해 교육하고, 모니터하는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며 “당국에서는 담당 인력·예산 등 어떠한 지원도 없이 ‘모니터를 잘하라’는 식의 원칙론만 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침체로 인한 중산층 붕괴, 저소득층 증가로 이들을 파악하고 도와줄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급증하는 복지수요에 사회복지전달체계의 최일선에 있는 사회복지사들이 허덕이고 있다. 정부는 복지를 강화하겠다고만 할 뿐 이를 뒷받침할 지원은 부족해 복지사들의 부담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3일 한국사회복지사협회가 지난해 진행한 ‘사회복지 시설종사자 보수체계 개선 연구’에 따르면 전체 조사 대상자의 98.6%가 주 4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4.8%는 근무시간이 60시간 이상이다. 전체 응답자의 23%는 주6일 근무한다고 답했고, 1.2%는 ‘연중무휴’였다.

사회복지사의 업무부담은 최근 더 늘어났다. 강북 지역의 한 사회복지사는 지난해 말부터 한 달에 20일 이상 야근, 3∼4번은 토·일요일에도 근무를 한다. 일상적인 업무 외에 개인적으로 복지관에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 상담시간이 늘어나면서 업무시간을 연장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힘들기는 구청 등도 마찬가지다. 중랑구청 사회복지과 관계자는 “지난해에 비해 기초생활 수급 신청자가 2배 정도 증가해 모자란 인력을 행정인턴으로 충원했다”며 “개인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정규 공무원이 아닌 행정인턴이 업무를 처리할 수 없어 한계가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 정이 이러하지만 민간 복지관 등에서는 열악한 재정 때문에 인력 충원 등을 생각할 수 없다. 사업비 대부분을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20∼30%씩 줄어들고 있다. 관악구 봉천동의 한 사회복지사는 “수요가 많아 대상자 발굴을 확대하려고 하는데도 어려운 분들은 많고, 자원은 정해져 있다”며 “후원금이 많아지면 좋겠지만 올해 경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가지원의 경우 복지예산이 지자체별로 집행되다 보니 사정에 따라 올해 사업비 지원이 갑자기 중단되기도 해 복지시설의 고민이 깊다.

한 국사회복지사협회 정책교육부 김현진 팀장은 “사회복지 예산으로 쓰이던 분권교부세가 보통교부세로 흡수해 그나마 안정적이던 복지예산이 축소될 우려가 있는 등 당국은 늘어나는 복지수요와는 반대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사회복지사들의 업무 과중과 예산 부족은 복지서비스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진경 기자 ljin@segye.com, 김효진 인턴기자(한림대 언론정보학부)

[美교과서 한국사 전면 개편 운동 불붙다] - 매일경제 / 2009-03-08

최미영 다솜학교장.던컨 교수 등 청원서 제출

"미국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게 사실상 `6.25전쟁' 밖에 없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입니다. 미국 교과서 개편 운동은 한국을 제대로 가르치도록 하는 우리의 정당한 노력이자 의무로 생각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국학교와 한인 사회가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미국 일반 사회 교과서 내용에 한국 역사를 적극 반영해줄 것을 요구하며 교과서 개정 청원 운동에 본격 착수했다.

미국 내 `한국학의 대부'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 LA캠퍼스(UCLA) 한국학 연구소 존 던컨 교수 등 뜻있는 미국인들도 이 운동에 가담했다.

캘리포니아주 다솜 한글학교 최미영 교장 등 미국 교과서 개정 운동 모임 대표들은 지난 5일 새크라멘토 주정부 청사에 있는 교육부를 방문, 미국의 사회 교과서 중 한국사 부분을 전면 개편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왜 한국인가(WHY KOREA)' 제하의 청원서를 직접 제출했다.

최 교장은 지난해 11월 역사 왜곡 논란을 빚었던 일본계 미국인의 자전적 소설 `요코 이야기'(SO FAR FROM THE BAMBOO GROVE)를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어학 추천 교재에서 스스로 퇴출시키는 결정을 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최 교장은 7일 오전(현지 시간)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지역 밀피타스에 위치한 다솜 한글학교 사무실에서 진행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학생들이 한국을 일본의 과거 식민지이자 6.26 전쟁의 참상지로만 배운다는 건 말이 안된다. 한.미 관계의 발전 속도에 걸맞게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한국의 교과 과정 개편과 마찬가지로 주요 교과목(K-12) 별로 6-8년마다 개정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2010년부터 적용될 교과 과정에 대한 심의 및 평가 작업에 최근 착수했다.

주정부는 최근 주요 교과 내용을 심의, 개편하고 교과서의 기본 골격과 방향을 제시하는 `프레임워크(FRAMEWORK)' 일정에 들어갔으며 2010년 시행을 목표로 오는 6월께 교과목 개편 방향과 내용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한국학교가 입수한 캘리포니아주 기존 교과 내용 자료에 따르면 유치원 과정부터 6학년까지는 한국 역사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우리의 중학교 과정인 7학년의 경우 불교의 전래 과정을 설명하면서 중국과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이 간단히 소개된다.

미국 10학년 사회 교과서에는 한국 역사와 관련, 냉전 시대와 6.25 전쟁(KOREAN WAR)을 언급하면서 한국에 대한 상황 설명이 한 차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 학년에 걸쳐 한국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최 교장은 전했다.

최 교장은 캘리포니아주 주정부에 제출한 청원서에서 한국 역사와 관련한 7개항의 주요 내용을 담을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미국 교과서 개편 청원서에 담긴 한국사 관련 주요 항목은 ▲지정학적 중요도 ▲한국의 지리 ▲한국의 혁신적 문화 ▲한국 경제와 IT 강국의 면모 ▲한국과 캘리포니아 관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모델로서의 한국 ▲경제 리더로서의 한국의 중요성 등이다.

최 교장은 "한국은 국민 90% 이상이 무선통신 기기를 사용하는 IT 강국이자 무역 대국이라는 사실을 지금의 미국 학생들이 배울 수 없다면 한.미 관계의 미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한국의 이미지를 일신하고 역사.문화적 유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ksy@yna.co.kr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김성용 특파원

'한국의 옛 지도' 발간 - 매일경제 / 2009-03-09

▲문화재청은 9일 2007-2008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새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옛 지도 35건을 수록한 지정조사보고서 '한국의 옛 지도'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물 제850-3호), '대동여지도 목판'(보물 제1581호) 등 널리 알려진 옛 지도뿐만 아니라 비변사에서 행정.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지도인 '영남지도'(보물 제1585호), 19세기에 김광훈(金光薰) 등이 연해주 일대를 16년간 정탐해 제작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보물 제1597호) 등 35건의 옛 지도가 수록돼 있다.

'한국의 옛 지도'는 문화재청이 '일괄 공모를 통한 조사.지정' 사업을 통해 출판한 두 번째 보고서다.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 2006년 이 사업을 통해 '한국의 초상화'를 발간한 바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교류센터는 13일 오후 3시 연구원내 운중관 1층 회의실에서 제17회 한국이미지 콜로키움을 개최한다.

재미 저널리스트인 김명옥 기자가 '미국언론에 비친 한국 이미지와 그 개선방안'을 주제로 강연한다. 김 기자는 유에스에이 투데이, 필라델피아 데일리 뉴스를 거쳐 현재 콜로라도주 록키 마운틴 뉴스에 근무하고 있다.

buff27@yna.co.kr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조선시대 '청주古지도' 자료집 만든다 - 매일경제 / 2009-03-09

청주시는 조선시대의 청주와 관련된 고(古)지도 자료를 모은 '청주의 고지도'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청주시 관계자는 "조선시대 고지도는 제작 당시 지명, 인구, 면적, 특산품 등이 수록돼 있어 역사, 문화를 아우르는 종합 정보지역할을 했다"며 "지도를 통해 청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고지도 자료집 제작에 나서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시는 지난해 초부터 전국의 박물관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규장각 등에 있는 100여점의 조선시대 고지도에 대한 기초조사를 벌였다.

또 이달부터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청주가 수록된 고지도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는 작업을 벌인 뒤 고지도에 실려 있는 지명에 대한 해석, 주석 원문 분석 등을 실시해 오는 7월께 자료집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이 자료집은 50여점의 고지도와 함께 제작 당시의 역사적 환경 등에 대한 설명을 담아 300여페이지 분량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bwy@yna.co.kr

(청주=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lundi 9 mars 2009

美인권보고서 "한국은 여성이 살 수 없는 곳(?)" - 한국일보 / 2009-02-26

성범죄, 가정폭력, 인신매매, 고용차별 만연… 여성-아동-장애인에 대한 차별 여전

"한국민들의 인권은 전반적으로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과 아동, 장애인등 소수 약자들은 여전히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으며,성범죄, 인신매매, 가정폭력, 아동학대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25일(현지시간) 발표한 연례 인권보고서 내용 가운데 한국의 인권실상을 기술한 대목의 일부다.

미 국무부는 이날 홈페이지(http://www.state.gov)에 게재한 인권보고서를 통해 특히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범죄와 가정폭력, 인신매매등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까지 자세하게 기술했다.

미 국무부는 지난해에도 인권보고서와 인신매매 실태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여성차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날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강간범죄'를 꼽았다.

보고서는 2008년 한국 법무부 통계를 인용해 지난 한해동안 7천532건의 강간범죄가 발생해 이 가운데 3,581명이 기소됐으며, 2007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한 해동안 강간과 성추행등 성범죄가 1만5천325건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소개했다.

보고서는 이같은 통계대로라면 한국에서는 한 해 평균 여성 1천명당 17.9명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가정폭력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지난 한해동안 1만1천48건의 가정폭력 피해사례가 접수돼 이 가운데 1천747명이 기소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또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결혼한 여성의 30%가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이어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면서 지난해 7월 서울의 한 매춘지역을 경찰이 일제단속해 350명을 입건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일부 한국 남성들은 중국이나 동남아지역으로 '섹스 관광'을 나서고 있으며, 일부 한국 여성들은 캐나다와 멕시코를 경유해 미국으로 불법 입국해 성매매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 중국. 몽골. 필리핀의 외구 여성들은 자발적이거나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뒤 가정부나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일부 외국 여성들은 빚을 갚지 못해 한국인 남성과 계약결혼을 하기도 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는 이어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직장내 성추행은 물론 고용과 임금, 승진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미국 국무부는 지난해 6월에 발표한 인신매매 실태보고서를 통해서도 한국의 일부 여성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홍콩, 심지어 서유럽 국가까지 성매매 대상으로 팔려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성매매 특별법을 통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면서 해외로 나가는 성매매 한국 여성들이 많아진 것도 원인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가하면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태국, 중국, 몽골출신 여성들이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한국으로 유입되고 있다면서 '한국은 인신매매의 주 근거지'라고 보고서는 꼬집었다.

한편 보고서는 보건복지부 통계를 인용해 지난 해 6개월동안 발생한 아동학대 건수가 2천733건으로 집계됐으며, 장애인에 대한 의무고용률도 2.46%로 미미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노컷뉴스 워싱턴=박종률 특파원]

한국 ‘가족 통합지수’ OECD 꼴찌 - 동아일보 / 2009-03-02

■ 보건사회硏 ‘사회통합 추진전략’ 보고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을 위한 과제 및 추진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1998년 이후 10년간 갈등상태였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사회통합지수가 플러스로 통합 상태를 유지해 왔으나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 마이너스로 떨어진 뒤 2007년까지 갈등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갈등상태가 지속되면서 한국의 사회통합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국 가운데 19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이 보고서는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한국의 사회통합성은 매우 낮다”고 경고했다. 》

‘갈등 유발원인’ 가족 건강 고용 소득順 외환위기 직후 실업문제가 최대 걸림돌 2003년 이후엔 가계대출-소득격차 부각

○ “가족 가정 문제가 사회통합 저해”

OECD 회원국 가운데 19위에 그친 것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호주 등 OECD 24개국의 각종 사회지표 데이터(2005년 기준)를 이용해 사회통합지수를 계산한 뒤 한국의 사회통합지수와 비교한 결과다.

특히 자살률, 이혼율, 출산율 등 가족영역 지수에서 24위로 최하위에 머물러 가족 또는 가정 문제가 한국사회의 통합성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으로 확인됐다. 이 밖에 소득영역은 18위, 고용영역은 19위, 건강영역은 22위를 기록했다.

사회통합성이 가장 좋은 나라는 스웨덴이었으며 이어 스위스 프랑스 뉴질랜드 핀란드 순이었다. 한국보다 사회통합 정도가 낮은 국가는 그리스 아일랜드 미국 멕시코 터키였다.

연구팀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주요 요인으로 △일자리 부족, 실업과 저임금, 고용불안 △소득불평등으로 인한 계층 간 갈등 △식품 안전 문제, 의료 보장 문제 △높은 사교육비와 교육기회 불평등 △부동산 등 자산의 불평등 심화 등을 지적했다.

또한 연구팀은 “10년간 지속된 ‘좌우갈등’, ‘이념갈등’까지 사회통합지수에 포함할 경우 한국 사회 통합성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 “가계대출 소득격차가 통합의 걸림돌”

연구팀이 한국 사회의 통합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을 시대별로 분석한 결과도 눈길을 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빈곤 문제와 의료비지출 부담이, 외환위기 직후에는 실업 문제가 심각했다. 2003년 이후엔 사교육비 급증, 가계 대출 부담, 소득격차 문제가 사회통합에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보고서는 2003년 이후 상황에 대해 “실업률이나 비정규직 비율은 증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근로빈곤화’ 현상이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근로빈곤화 현상이란 비정규직 등 임금이 낮아지는 집단이 많아지면서 소득격차가 심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 격차 확대→상대적 박탈감 증가→사회갈등 심화로 이어졌다는 것.

1998년 이후 갈등상태가 지속되자 최근 들어 사회통합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라디오연설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사회를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도 1월 열린 한국금융연구원 강의에서 “과거의 어떤 위기보다도 사회통합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동안 사회다양성을 강조했지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제는 사회통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연구책임자인 노대명 박사는 “사회통합지수가 낮으면 일자리 나누기, 임금 조정 등 모든 것이 쉽지 않다”며 “사회통합위원회 등 별도의 조직을 통해 각 부처로 나눠진 각종 대안, 정책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경기 불황의 늪… 병드는 한국사회 - 경향신문 / 2009-03-03

지속되는 경제불황이 사회를 조금씩 병들게 하고 있다. 불안심리가 각종 사회문제와 범죄를 불러일으키고 가족 내 갈등은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다. 일터에 있어야 할 시민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장으로 몰려가고 있다. 경기침체로 인한 양극화·가정붕괴·범죄 등 사회·경제적 충격을 일컫는 이른바 ‘D-트라우마’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D-트라우마’는 불황을 뜻하는 ‘디프레션(Depression)’과 정신적 외상을 의미하는 ‘트라우마(Trauma)’를 합친 말이다.

(1)경마·카지노 매출 급증 ‘씁쓸한 호황’

일 용직 노동자 김모씨(61)는 동료들을 따라 경마장에 갔다가 생업을 포기하게 됐다. 9000만원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됐지만 지금도 1주일에 4~5번은 경마를 하러 간다. 김씨는 “아내와 크게 싸우고 자식의 눈치보기도 미안하지만 일거리가 끊기니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경기불황으로 산업 전반이 침체의 늪에 빠진 가운데 사행산업은 성장일로다. 카지노·경마·복권 등 사행산업의 매출은 크게 늘었다. 한국마사회의 총 매출액은 2007년 6조5401억원에서 지난해 7조4219억원으로 13.5% 증가했다. 2007년까지 주춤했던 복권 판매액도 지난해 즉석식 복권 매출이 53%나 급증한 데 힘입어 총 매출액 규모가 늘었다. 지난해 강원랜드 카지노를 방문한 입장객은 291만명으로 2007년에 비해 19% 증가했다. 하루평균 입장객 수도 7900명으로 전년보다 1200명이나 늘었다.

중앙대 심리학과 현명호 교수는 “사람들이 경제적인 위기로 불안감을 느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박에 매달리게 된다”며 “이런 심리적 요인 때문에 불경기 때는 사행산업이 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2)불황이혼·가출 등 가정파탄 증가세

결 혼 8년차인 김모씨(37·여)는 지난 1월부터 이혼상담을 받고 있다. 남편이 회사 대출금 7000만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몽땅 날렸다. 김씨는 “손실금을 메우기 위해 또 주식투자를 하자는데 너무 힘들고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아 결국 이혼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경기불황 속에 이혼과 가출이 늘면서 가정해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경제문제로 이혼상담을 받은 여성은 328명이다. 2006년 266명, 2007년 267명보다 크게 늘었다. 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최근 10건 가운데 4~5건이 주식투자 실패나 실직 등 경제적 위기로 인한 이혼상담”이라면서 “올해부터는 실제 이혼건수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청소년 가출도 증가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가출 청소년 발생 건수는 1만5337건으로 2007년 1만2240명보다 3097건 증가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경제위기로 인한 무력감과 불안심리가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경제난이 가족해체를 부르고 이것이 다시 사회문제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3) 강·절도 늘고 ‘충동적 폭력’도 빈발

부 산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강모씨(43·여)는 3일 절도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강씨는 무료로 간병 자원봉사를 하던 부산 남구 김모 할머니(72)의 집에서 70만원을 훔쳐 나왔다. 강씨는 이중 20만원을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50만원은 훔친 사실을 털어놓고 돌려줬다.

일용직 노동자 김모씨(61)는 지난해 12월 서울 수색역 인근 재개발 공사 중인 주택에 들어가 구리전선과 새시 1만6800원어치를 훔쳐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겨울에 일거리가 떨어져 남의 집 담을 넘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3년간 절도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06년 19만2808건에서 지난해 22만3349건으로 15% 이상 많아졌다. 절도뿐만 아니라 폭력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2006년 28만2012건이던 폭력은 지난해 30만건을 넘어섰다. 현실 비관이나 불만이 누적된 상태에서 웬만한 일에도 참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만큼 삶이 팍팍해졌다는 의미다.

경찰은 올 들어 지난 두 달 동안 강·절도범 1만2787명을 검거했다. 경찰 관계자는 “생계형 절도가 특히 두드러진다”며 “외환위기 시절에도 나타났듯이 범죄 발생은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홍진수·유정인·오동근기자 soo43@kyunghyang.com>

‘첫 근대적 항쟁’ 민족 넘어 민중을 발견하다 - 한겨레 / 2009-02-26

3·1운동이 올해로 90돌을 맞았다. 3·1운동에 대해서는 사회·경제적 배경부터 발발 원인, 주도 계층의 성격과 진행과정 등에 대해 풍부한 실증 연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3·1운동을 바라보는 주류적 해석은 그것이 계급과 지역을 초월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와 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가 26일 함께 마련한 3·1운동 9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3·1운동 참여 주체의 경험과 사후적 기억·기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의 지배권력과 민중이 3·1운동을 각각 어떻게 평가하고 상징화했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3·1운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심포지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도심거리서 공권력 맞선 ‘근대적 시위’ 지방으로 확산
“독립으로 계급고통 해결”…노동자·농민 점차 ‘주력화’
이승만·박정희 정권 ‘민족단결’ 초점…기반강화에 이용

“한국의 근대적 시위는 3·1 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그것은 대규모 군중과 무장군경이 도심의 대로에서 대치하는, 한국인들로선 처음 경험한 긴장과 흥분의 스펙터클이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삼일운동에서 드러난 ‘시위 문화’의 새로움에 주목했다. 전통적인 농민봉기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근대적 저항운동의 새 양상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삼일운동이 갖는 ‘거리의 모더니즘’으로서의 면모를 재발견하려는 시도다.

■ 거리서 꽃핀 모더니즘

삼일운동은 서울·평양·의주 등 7개 도시에서 시작돼 인근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됐다는 점에서 “도시민이 시작하고 농민이 적극 호응하면서 전개된 최초의 근대적 전국 항쟁”이라고 김 교수는 규정한다. 특히 서울의 시위는 학생·시민 등 시위대가 도심의 대로에서 군경과 대치하는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저항 방식도 다양했는데 학생은 동맹휴학,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동맹파업으로 식민지 권력에 항거했다. 반면 농촌 시위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주로 벌어졌고, 진압방식의 과격함에 비례해 점차 폭력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항쟁의 지도부가 부재했음에도 시위가 전국·일상화할 수 있었던 동력을 김 교수는 ‘대중의 자발성’에서 찾는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이 투항한 뒤 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과 학생이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만세꾼’이라 불린 전문 시위세력이 등장하는가 하면, 과거 민군을 조직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양반계급이 농민과 함께 항쟁에 동참하는 새로운 모습도 나타난다.

유인물과 격문·신문 등 근대적 인쇄매체도 중요한 몫을 했다. 김 교수는 “인쇄매체를 통해 전국 각지의 시위와 일제의 탄압 소식을 접하는 것은 반일의 기치 아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삼일운동의 새로움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보다 ‘민중의 부상’이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시위 주력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서울에서는 3월 말 전차 종업원과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직공이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절정을 이뤘다. 김 교수는 “노동자와 농민은 계급적 고통에 대한 처방으로 민족독립을 갈구했다”며 “이런 점에서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을 발견하는 과정은 민중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 민족주의, 민중을 발견하다

류시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식민지 시기 민족주의 진영이 삼일운동을 통해 민중을 발견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민중을 우매한 존재이자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지식인들이 삼일운동으로 민중 역량을 ‘발견’하면서 민중을 교화의 대상이 아닌 ‘민족 해방운동을 위한 협력·동반자’로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동아일보> 등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공동전선 구축을 요구하며 계급 차이를 넘어서는 집단 범주로서 민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류 교수는 “계급적 자기의식을 형성하면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민중 세력을 억누르고, 부르주아 세력의 주도성을 이어가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병택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이승만 정권부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3차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삼일운동에 대한 서술의 변화과정을 추적했다. 최 위원은 “3·1 운동을 반제국주의 거사로 기억하던 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이승만·박정희 정권기를 거치며 3·1 운동을 통해 전민족이 단결할 수 있었다는 단결론적 평가만 제시됐다”며 “이런 기억방식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정권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이용됐다”고 분석했다.

■ 좌와 우, ‘경험의 분단’을 넘어라

모든 발표·토론자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종합토론은 첨예한 ‘역사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삼일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지가 주로 논의됐다. 허수 동덕여대 교수는 “진보학계가 3·1 운동 이후 1920년대 사상사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란 틀에서만 보는 것은 1980년대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며 “(근대성이나 문명사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선웅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좌·우 모두의 명절이었던 3·1절이 어떻게 우파에 의해 독점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역사적 경험의 분단’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최병태 위원은 “조선인들은 왜 1919년 3월1일 그토록 격렬하게 일제에 저항했는지에 대해 한층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단순히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였다는 차원을 넘어 ‘근대화·문명화’라는 일제의 통치담론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나 이것이 조선인들에 의해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됐는지 등이 치밀하게 논구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북한 면적 35%가 홍수재해 취약지" - 매일경제 / 2009-03-03

"북한 면적 35%가 홍수재해 취약지"

KEI 명수정 박사 `북한 자연재해 취약지도' 논문서

북한 전체 면적의 3분의 1 이상이 홍수에 취약해 재난이 우려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 명수정 박사는 3일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연구원의 정기발표회에서 `북한의 자연재해 취약지도'라는 논문을 통해 이같이 추정했다.
명 박사는 논문에서 토지이용, 강우, 지형, 토양, 과거 재해 이력, 사회상황 등 7개 범주에서 습득한 자료를 토대로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원격탐사기법을 활용해 북한 지역의 재해 취약도를 안정ㆍ다소 안정ㆍ보통ㆍ다소 취약ㆍ취약 등 5개 등급으로 나눴다.

논문에 따르면 다소 취약하거나 취약한 지역은 각각 22.76%(2만7천654㎢)와 12.33%(1만4천978㎢)로 전체 지역의 35.09%(4만2천632㎢)에 달했다.

재해대책이 시급한 취약지역은 남포직할시, 황해북도, 황해남도, 평안남도, 평양특별시, 강원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개성직할시, 자강도 등에 몰려있다.

양강도와 함경북도는 취약등급으로 분류된 지역이 전혀 없었던 반면 강원도, 남포, 개성, 평양, 황해북도, 황해남도는 안정등급이 전혀 없어 대조를 이뤘다.

명 박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강원도, 황해남북, 평양, 남포 등 남쪽 저지대 지역이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며 "전반적으로 산림훼손이 일어난 곳이 재해에도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선 복원해야 할 지역은 황북, 황남, 평양, 남포 등의 순서였고 경제특구로 따지면 해주, 함흥, 개성 등이었다"며 "남북경협 사업 대상 가운데는 평양, 남포, 개성 등지에서도 재해발생 때 대규모 피해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유엔은 2007년 기후변화협약 총회에서 `국제기후 위험지수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2006년 자연재해 위험이 세계 2위이며 자연재해에 대비한 사회적 역량을 확충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식량과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 북한은 다락밭을 만들고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림생태계를 훼손함으로써 재해 완충능력을 약화시켜 해마다 홍수재해를 입고 다음해에 더 큰 경제난을 겪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명 박사는 "남북이 기상정보와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경보체제를 공유하는 등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며 "단기적으로는 식량을 원조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농업협력과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공조체제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jangje@yna.co.kr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일제가 궁궐 이렇게 훼손” 설계도면 첫 공개 - 서울신문 / 2009-02-27

174종 실린 근대건축도면집 발간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신축·개조 사업을 통해 창덕궁, 덕수궁, 경복궁 등 우리 전통 양식의 궁궐이 어떻게 훼손되고 변형됐는지를 보여주는 설계도면이 무더기로 공개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1906년부터 1936년까지 작성된 궁궐 관련 도면 122종과 고종 황제 홍릉 조성 등 의례 관련 19종, 가옥 33종 등 총 174종의 원본 도면을 실은 ‘근대건축도면집’을 26일 펴냈다. 이 도면들은 일제 통감부와 총독부의 지휘 아래 있던 궁내부와 이왕직에서 작성한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다.

도면에는 창덕궁 인정전 주변의 행각(行閣)을 복랑(複廊)에서 전각 형태로 고치고, 주위에 복도를 신설해 알현소로 조성하는 계획이 담겨 있다. 또 순종황 제의 침전이었던 대조전 일원이 1917년 화재로 소실되자 그 자리에 서양식 침전인 내전양관을 지으려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창경궁 전체 평면도에는 창경궁을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 등 세 영역으로 개조하는 안이 포함됐다. 한중연 윤진영 연구원은 “일제가 궁궐 신축·개조사업을 실시하면서 궁궐의 기능을 완전히 무시한 채 편의에 따라 다른 용도로 변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고종 황제의 홍릉 조성과정을 그린 도면과 순종 황제의 국장 자료 등이 포함된 의례 관련 도면은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황제릉 조성사업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또 가옥 관련 도면은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말까지 한성부의 주거모습을 명확히 파악할 수있는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황제릉 조성사업에 관한 사료인 순종 유릉의 정면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사진] 창경궁 평면도 - 중앙일보 / 2009-02-26


한국학중앙연구원 장경각이 26일 '근대건축도면집'을 통해 공개한 창경궁 평면도. 장경각은 이날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궁궐과 가옥들의 설계도 원본 174종을 무더기로 공개됐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서울=연합뉴스)

고려대장경을 통해 돈황문서를 보다 - 매일경제 / 2009-3-2

대장경연구소.규장각 국제학술대회

20세기 벽두에 돈황 막고굴에서 쏟아져 나온 이른바 `돈황문서`가 고려대장경과 만난다.
고려대장경연구소(소장 오윤희)는 규장각과 함께 20-21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대강당에서 `고려대장경을 통한 돈황사본(敦煌寫本)의 재인식`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아래 지난해부터 추진해 온 `고려대장경과 돈황사본의 텍스트 대조 연구` 프로젝트 일환으로 마련됐다.

연구소는 4-10세기 무렵에 필사(筆寫) 형태로 생산된 돈황문서 약 6만권 중 대략 4만권 정도가 불경(佛經)이며, 그 대부분이 인쇄체 텍스트인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그것과 1대 1 대응을 이룬다는 데 착안해 두 텍스트간 이동(異同) 관계를 비교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에 이번 학술대회는 돈황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낸 해외 연구자들을 초청해 불경이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고려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어떠한 교정 작업이 있었는지를 체계적으로 구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중국의 팡구앙창(方廣창<金+昌>) 상하이사범대 교수와 후앙정(黃征) 난징사범대학 교수, 일본의 다카다 도키오(高田時雄) 교토대 교수와 오치아이 도시노리(落合俊典) 불교대학 교수, 미국의 웬디 아다멕 컬럼비아대학 교수 등이 발표를 한다.

국내에서는 이규갑(연세대)ㆍ남권희(경북대)ㆍ김애영(안양대)ㆍ조은수(서울대)ㆍ최종남(중앙승가대) 교수 등이 연구성과를 내놓는다.

대장경연구소에서는 그간 개발한 `고려대장경과 돈황문헌 비교연구시스템`을 시연할 예정이다.

발표자들 중 팡구앙창 교수는 중국 돈황학을 대표하는 연구자로 현재 `돈황유서 총목록` 편집 작업을 이끌고 있으며 다카다ㆍ오치아이 두 일본인 교수는 일본 사경(寫經) 연구의 대가로 꼽힌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mardi 3 mars 2009

임나(任那) - 문화일보 / 2009-02-24

“일본인들이 한국 역사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그래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예순이 넘은 일본인 만학도가 25일 고려대에서 한국사 졸업장을 받아 주목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이와타 스스무(岩田進·65). 그는 일본의 한 제조 회사에서 정년퇴임 한 뒤 2005년 홀로 한국으로 건너와 고려대에 입학했다. 그는 한국 유학과 관련, “30년 전 박물관을 들렀다가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미술품들을 본 순간부터 품어왔던 꿈”이라고 말했다. 양국의 고미술품을 나란히 두고 비교해보니 일본의 고대문화가 한국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 후 그는 무려 30년 동안 2박3일, 3박4일 등 짧은 체류 일정으로 무려 77번이나 한국을 오고갈 정도로 열성파였다.

그러나 공부하면 할수록 가까운 줄로만 알았던 양국의 거리도 새삼 멀게 느껴졌다고 한다. 일본에는 한국의 고대사는 물론 근대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제대로 소개된 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있어도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기술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 지배의 명분으로 이용한 ‘임나(任那)일본부설’만 해도 그렇다. 한·일 역사의 첫 실타래부터 꼬이게 하고, 한일 병합의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한 이 주장은 웃음밖에 안나온다. 4세기경 신공왕후가 이끄는 왜군이 신라와 백제를 복속시킨 다음 가야 지역에 일본 속국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 魏志東夷傳) 왜(倭) 편에는 당시 왜인이 기승(騎乘)을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馬)도 없는 국가라는 뜻이다. 일본은 당시 통일정권조차 들어서지 못한 부족국가 시절이었다. 반면 왕권국가인 가야는 차원이 달랐다. 가야 유적에서는 기병의 갑옷과 무기, 그리고 말에 씌운 마갑(馬甲)까지 발견될 정도다. 무기는 창처럼 긴 무기와 활·화살 같은 원거리 무기가 많았다. 반면 일본은 단검이 주류였다. 일본의 화살은 동으로 돼 있어 철갑옷을 뚫을 수조차 없었다. 일본에 말과 철기를 전수시킨 국가 역시 가야다. 누가 누구를 지배했다는 것인지 납득이 안간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일본에 “독도는 한국 땅이다”고 당당히 외치는 기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64) 서울대 교수와 이와타와 같은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기 때문이다.

[[오창규 / 논설위원]]

中-佛 이번주 문화재 전쟁 치른다 / 아시아투데이 / 2009-02-22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면담한 사실이 알려진 후 냉랭해진 중국과 프랑스 관계가 이번 주에는 ‘약탈 문화재’ 공방으로 얼룩질 것으로 보인다.

패 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1936~2008)의 소장품 경매가 오는 23~25일(이하 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당초 예정대로 진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장품에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인 위안밍위안(圓明園)에서 지난 1860년 약탈됐던 쥐머리, 토끼머리형상 동상 등 12지상이 포함돼 있다는 게 도화선이 됐다.

이 동상에 대한 중국측 반환 요구가 거센 가운데 미술품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경매 일정에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밝혔으며 이브 생 로랑의 연인 겸 동업자인 피에르 베르주 역시 “중국정부에 (문제의 청동상을) 돌려줄 의향이 없다”고 쐐기를 박아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 런 가운데 파리지방법원 재판부는 23일 경매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쥐머리, 토끼머리 동상의 경매 중단을 요구하며 81명으로 구성된 중국민간변호인단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판결을 내릴 예정이어서 사법적 판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변호인단은 지난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중 프랑스와 영국 군에 약탈된 수많은 문화재 중 이브 생 로랑의 집안에 소장돼 온 두개의 동상 경매를 중단시켜 달라고 지난 19일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수석변호사인 류양(劉洋)은 21일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21일 파리로 떠났다.

앞서 장위(姜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2일 정례 브리핑에서 위안밍위안에서 약탈된 문화재의 소유권은 명백히 중국에 있다고 밝히고 이 문물들은 마땅히 중국에 반환돼야 한다고 말해 중국 정부의 개입 여부와 관련해 주목을 받았다. 쥐와 토끼머리상의 낙찰가는 각각 1000만유로(1300만달러, 약190억원)를 웃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경매에서는 이브 생 로랑과 베르주가 수십년 동안 수집한 700점 이상의 개인 소장품이 선보일 예정이며 2억∼3억유로(2억5300만달러∼3억8000만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중국은 해외로 약탈된 문화재는 절대 경매를 통해 회수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프랑스측은 원명원의 쥐와 토끼 청동 두상의 무상 반환은 어렵다고 맞서고 있어 경매 실시 여부와 결과가 주목된다.

<유주영 기자 boa@asiatoday.co.kr>

결혼 이주여성 22.2%, 가정폭력 경험 있어 - Internet Broadcast for Mgrants in Korea / 2009-02-24

‘결혼 이주여성의 인권실태조사’ 통해 밝혀

결혼이민자가 급증하면서 여성결혼 이민자들의 인권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대표:한국염)가 전국 4개 지부에서 받은 월 100건 이상의 상담 내용과 2008년 9월 전국 7개 지역에 거주하는 결혼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이주여성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같이 밝혀졌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 터 강성의 사무국장 (사진)은 “국제결혼으로 유입된 여성들이 겪는 인권문제 중 언어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등 폭력과 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한국가족의 인격모독과 인종차별, 그리고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차별로 인한 무시와 타문화에 대한 편견 등으로 인한 갈등이 주된 것”이라고 말했다.

◆ 남편을 만나게 된 경로는 ‘결혼중개업소를 통해서’가 37%

이번 실태조사 결과 국제결혼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남편이 좋은 사람같아서(28.9%)’, ‘남편을 사랑해서(16%)’,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 것 같아서(19.1%), ’친정을 돕기 위해서(14.9%)‘ 순으로 나타났다.

남편을 만나게 된 경로는 ‘결혼중개업소를 통해서’가 37%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다음으로는 ‘부모·형제 또는 아는 사람의 소개’가 34.3%, ‘타인의 소개없이 직접’ 10%, ‘종교단체를 통해 7% 순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결혼소개 비용을 묻는 질문에는 결혼하기 위해 ‘남편만 돈을 낸 경우’가 40.2%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이주여성과 남편이 동시에 돈을 낸 경우는 13%,둘 모두 돈을 내지 않았다는 비율도 24.6%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편이 돈을 낸 경우는 출신국가별로 러시아 출신(87.5%), 태국(53.%), 베트남(50.6%), 캄보디아(50%), 필리핀(43.6%)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남편이 돈을 지불한 비율은 연령별로 보면, 여성연령이 24세 미만인 경우가 가장 높은 비율인 50.3%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령이 낮은 여성일수록 남편이 돈을 지불하고 소개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결혼 전 남편에 대한 정보가 사실과 다른 경우도 많아 남편의 직업에 대한 정보가 다른 경우는 19.6%, 남편의 소득이 다른 경우는 11.5%, 남편의 재산이 다른 경우는 9.4%로 나타났다. 따라서 남편의 경제력에 해당하는 직업, 소득, 재산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비율이 44.1%로 높게 나타났다.

강 사무국장은 “동남아 지역의 여성들은 한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웬만한 한국의 배우들의 이름은 다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드라마를 통해 한국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남편을 한 두 번 만나 본 다음 바로 국제결혼을 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기대하는 생활과 전혀 다른 남편의 직업이나 외국과 다른 생활문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20대의 어린 나이에 하게 되는 일반적인 감성을 40대의 남편이나 시댁식구가 이해하고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남편의 경제력 취약으로 시댁의 결정권 높아

한편 이번 조사결과 남편의 직업이 농·임·어업인 경우(15.2%)와 소득이 80만원 이하인 경우 시댁의 결정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남편의 결정력 여하에 따라 시부모의 결정권이 높다는 것이다.

강 사무국장은 “결혼비용의 대부분을 시댁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부부의 결정권을 시댁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모시게 되는 대가족 구조가 많은데 요즘 시대에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국제결혼을 하게 되는 농촌이나 사회적 취약 계층 외에 많지 않은 부분이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주여성들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분도 많다는 것이다.

또한 부부간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이주여성의 결정권은 전반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캄보디아(50%)와 몽골 출신(42%)의 경우 남편 결정권이 높고(50%), 부부 공동결정은 러시아(58%) 출신인 경우 높게 나타났다.

◆ 생활습관 차이, 성격차이, 시댁문제, 경제문제로 부부갈등 경험

결혼이주 여성이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는 남편과 생활방식의 차이(18.5%), 성격차이(17.2%), 시댁문제(8.9%), 경제문제(8.3%), 음주(6.4%) 순으로 나타났고, 전혀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도 20.2%였다.

생활습관 차이로 인한 부부싸움은 필리핀(32.1%), 몽골(28.6%), 캄보디아(25%)인 반면 성격차이는 한국계 중국인 출신이 40.9%로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어려움을 겪을 때 주로 모국 친구(34.9%)나 친정 친척이나 가족(18.2%), 남편의 가족이나 친척(10%), 한국어학교 선생님(7,7%), 이웃(6.6%), 상담소(5,7%)에서 상담을 받거나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경우도 7.9%이다.

남편이 보이는 행동유형 중 생활비를 주지 않는 경우(8.9%), 외출을 못하게 하는 경우(7.4%), 의처증 증세(3.6%), 본국에 송금 못하게 함(4.7%), 신분증 빼앗음(4%), 방임과 내쫓음(3.6%), 모욕하거나 비하하는 말(8.3%), 신체폭력(6.6%), 기타(19.8%), 그런 경험이 없다(26.2%)로 나타났다.

◆ 22.2%는 어떤 형태로든 가정폭력 당한 경험 있어

결혼이주여성의 가정폭력 경험을 묻는 질문에 53.6%는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자 중 가정폭력 경험이 없다고 명확하게 답한 경우는 24.2%에 불과해 22.2%는 어떤 형태로든 가정폭력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정폭력의 경험으로는 ‘물건을 던지거나 부쉈다’가 가장 높은 비율인 10.1%를 차지하고, 다음으로는 ‘모욕적이거나 비하하는 말로 괴롭혔다’가 9.8%, ‘손으로 때리거나 발로 찼다’가 5.8%, ‘신원보증 해지하여 본국에 돌려보내겠다고 위협했다’가 5.8%, ‘때리겠다고 위협했다’가 5.2%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번 조사결과 연령이 45세 이상인 경우가 그 보다 낮은 연령대에 비해 폭력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폭력빈도는 거의 매일, 일주일에 한 두 차례, 한 달에 한 두 차례의 비율을 합하여 무려 24.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33.3%의 응답자 중 14%는 ‘그냥 참는 편’이라고 응답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가 11%, ‘남편에게 빈다’ 4.5%, ‘같이 싸운다’가 4.5%로 조사되었다.

특히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상담한 사례 등을 통해 보면 국적취득을 하지 않은 경우에 ‘그냥 참는다’(15.9%)거나 ‘남편에게 빈다(4.5%)’가 평균보다 높은 비율을 보인 반면 국적을 이미 취득한 경우는 이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가정폭력을 당했을 때 이주 여성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주로 친구(37.9%)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찰(27.6%), 상담소(13.6%), 주변 이웃(13.8%) 순이었다.

◆ 응답자의 16% 이혼 심각하게 고려

이혼을 고려해 본 일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60.4%가 이혼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16%에 해당하는 이주여성들은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거나 이혼소송 중이거나 이혼상태라고 응답했다.

특히 몽골과 태국, 한국계 중국인 여성들이 이혼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 중의 18.2%, 아이가 있는 사람의 15.4%, 남편 직업이 농업인 경우에 이혼을 생각해 본 일이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 중이거나 이혼을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댁식구의 지나친 간섭’이 18.4%, 다음으로는 ‘남편의 폭언, 무시’가 9.3%, 알코올 중독 6.7%,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 5.3%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이혼고려의 사유로서 ‘시댁의 지나친 영향력’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한국계 중국과 중국을 합쳐 47.5%, 베트남 19%, 몽골 20%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부부 중심 핵가족화로 인해 친족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한국 가정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대조적인 현상으로 시댁과의 관계가 이들 가족관계 및 부부관계에 주된 변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농어촌의 경우 시댁식구의 과도한 간섭이 원인으로 지적된 비율은 평균보다 매우 높아 31.3%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남편의 폭력과 방임을 원인으로 지적한 비율은 모두 25%에 달한다.

한국계 중국인의 경우 경제적 문제가 33.3%, 알코올 중독 16.7%, 도박 17.7%로 남편의 경제적 빈곤과 알코올 중독, 도박 등이 이혼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 터 관계자는 “2015년에서 2020년까지 농어촌의 경우 다문화 가족이 50%가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지만 아직 성 평등인식이나 다문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한국어 습득 등이 취약한 이주 여성들이 취업을 통해 경제권을 갖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La Corée du Nord déclare que son programme militaire ne représente aucun danger / La Presse Canadienne / 2009-02-18

SEOUL, Corée du Sud — La Corée du Nord a déclaré jeudi dans un communiqué que son programme militaire ne représentait aucun danger, alors que la secrétaire d'Etat américaine Hillary Rodham Clinton doit arriver jeudi soir à Séoul, après sa visite de deux jours à Djakarta, en Indonésie.

En Corée du Sud, la question nord-coréenne doit dominer les entretiens de Hillary Clinton, de même qu'en début de semaine, lorsqu'elle se trouvait au Japon.

Le commandement militaire nord-coréen a mis en garde contre la Corée du Sud, qui utiliserait des "menaces inexistantes de missile et de nucléaire" comme un prétexte pour l'envahir. Pyongyang prévient que les troupes nord-coréennes sont "parées à toute confrontation".

L'agence officielle nord-coréenne KCNA a accusé jeudi les Etats-Unis et la Corée du Sud de préparer une attaque contre la Corée du Nord, avertissant que de tels agissements seraient "chèrement payés" par les deux pays. Cette déclaration fait suite à l'annonce d'un exercice militaire annuel américano-sud-coréen purement défensif dans un mois.

Washington, Tokyo et Séoul soupçonnent Pyongyang de vouloir tester un missile capable d'atteindre l'Alaska. Lors de son premier essai d'un missile longue portée en 1998, la Corée du Nord avait affirmé avoir mis un satellite en orbite.

Après Séoul, la dernière étape de Hillary Clinton se fera en Chine.

´도자기 전쟁´ 임진왜란과 조선 도공 - 데일리안 / 2009-02-22

<칼럼>조선백자의 혼이 숨쉬는 아리타마을의 도조 이참평 기념비

1592년의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말한다. 선진문물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도공만이 아니었다. 금공(金工) 석공(石工) 목공(木工)은 물론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만 갖고 있었다.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휩싸여 일본의 영주들은 경쟁적으로 도공들을 잡아갔다.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에서 백자의 세계를 연 이참평이 그 중심에 서있다. 그는 유전(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하였다.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기에 그는 지금도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기술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에서 천민 대접을 받으며 자기가 만든 작품에 이름도 새기지 못하였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 명의로 된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을 시켰다. 조선 도공들은 큐슈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자신의 혼을 담은 백자, 청자를 만들면서 일본의 도자기 수준을 높였다.

지금도 아리타 마을에 가면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영광스럽게도 도예의 조상으로 추앙하는 도조(陶祖)라는 말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이참평기념비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다. 4백년 전의 조선인 이참평을 기리며 꽃마저 그의 조국의꽃 무궁화를 심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산 정상에 거대하게 ´도조 이참평 기념비´를 세우고 또한 신사(神社)까지 만들어 추앙하고 있다.

간이역 같은 작은 역에 하루 몇 번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그뿐, 적 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은 겹겹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폭설이라도 만나면 꼼짝없이 갇혀 버릴 형국이다.

검은 기와지붕마다 푸르스름한 이끼 덮인 도자기 가게 거리를 걸으면 시간의 숨결과 옛 조선 도공들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다. 그러면서 한편 쓸쓸하다. 왜 아리타 자기의 스승 나라인 한국에는 이런 ´시간의 앙금´, ´세월의 숨결´을 찾을 수 없는가. 왜 강진, 여주, 이천은 오랜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급조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가.

왜 우리에게는 아리타가 없고 경덕진(중국의 유명한 도요지)이 없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되 전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 대대로 천황의 어용식기와 다완을 공급해왔다는 유서 깊은 고란샤가 있는 아리다야키의 성지 아리타.

인구 일만 삼사천에 도자기 가마만 이백여개에 이르고, 삼백여곳이 넘는 도포(도자기 가게) 중에는 13,14대를 이어온 고포가 예사로이 있는 곳.

이참평은 이곳에서 사백여년을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도자기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정온 이곳 번주 니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하카다 앞바다로 끌려온 한 조선 도공은 이곳에서 아리타 자기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가 발견했다는 백자광´이즈미야마 자석장´과 가마터´텐구 다니´는 물론, 그가 눕고 앉은 곳마다 모두 사적이 되어 있었다.

한일 양국의 새로운 우호친선을 바라는 아리따조오의 주민의 모금기부에 의해서, 도조 이참평 기념비가 1990년 10월 한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 33-1번지에 새로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아리타따조 유지로 구성되는 도조 이참평 기념비 건설위원회가 한국의 사단법인 한국도자기 문화진흥협회에 건립장소 선정, 비문작성, 비의 제작 등을 위탁해서 건설한 것이며, 이후 매년 방한 연수하는 아리따조오 소학교 6학년 전원이 이곳을 방문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는 등, 후세를 위한 교육 자료로서 이용되어지고 있다.

공주는 또 하나의 아리타인 셈이다. 태생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이참평의 비석이 서게 된 것은 바로 그의 혼이 시켜서 된 일이 아닐까. 뼈는 이역에 묻혀 이미 그곳의 흙이 되었지만 혼 만은 이곳에 돌아와 깃들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글/이정복 동산도기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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