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6 juin 2008

'도시 개발'은 정치인들 도구인가 무기인가 / 인천일보 - 2008년 5월 21일

인천시의 밀어붙이기 식 개발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터져나왔다. 하지만 안상수 시장을 비롯한 시의 정책 입안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품도시'라는 해괴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인천이라는 도시 공간을 고층 아파트로 채워넣으려 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주민들의 비판과 저항이 무색해질 정도로 새로운 개발지를 찾아 혈안이 돼 있다. <황해문화> 여름호(59호)는 '글로벌 도시, 공간정치의 격전지'라는 주제로 특집을 마련해 인천과 여타 지자체들에서 추진하고 있는 개발과 글로벌 도시화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인천 '명품도시' 슬로건 내세우며 '과시적 개발'

초고층 아파트·투기 난무 … 고스란히 시민 피해

특집이라고 하지만 열한명의 필자가 참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황해문화> 편집진들이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이다. '공간정치의 격전지'라는 특집 제목은 다의성을 함축하고 있다. 민선 지자체장 선출 이후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라곤 오로지 개발뿐이다. 도시 및 지역 공간은 정치인들과 정치의 도구이자 무대로 변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격전지인 셈이다.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은 '투기하는 도시, 정주하는 도시'라는 글에서 인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발의 현장을 일일이 좇는다. 그는 개발주의에 대한 당위론적인 비판이 아닌 개발에 의해 땅의 화폐가치를 쫓아다니는 시민의식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비관적인 시선으로 일관하는 그의 진술은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계양산 골프장 유치를 반대했던 시민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양산 골프장 저지선이 무너진 지금의 사태를 통해서 침묵하는 시민들의 존재를 파악한다. 박 소장은 인천시 곳곳에서 도시개발 청사진을 비호하는 세력이 암투하고 있으며, 시민들의 의식도 날로 희미해지고 있다고 한다. 인천 도시발전의 중심도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철학도 이론도 인물도 부재하다. 암울한 인천에서 대안은 무엇일까?

"지역에 대한 관심이 낮은 인천은 내일을 위해 어떻게 개발해야 하나. 결국, 정주의식이다.…300만에 육박하는 시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돈 벌면 이사 가고 싶어한다. 그런 인천시민들을 인천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참여하려는 시민들과 논의해서 방향을 찾는다면 돈 벌어도 이사 가고 싶지 않은 마을 공동체로 인천을 가꿀 수 있지 않을까."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원장은 '내 마음의 지우개, 기억상실증, 그리고 서울'이란 글에서 서울의 과시적 이벤트성 개발 프로젝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명박 시장 재임 당시에 추진되었던 청계천 복원사업과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지척에 둔 세운상가 재개발 현장의 무모함을 지적한다. 대를 이어 개발만능주의의 닮은꼴로 도시개발을 추진하는 오세훈 시장의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 및 도시재생 프로젝트들의 계획 및 성사과정에서 빚어진 과오들을 ?낱이 들춰낸? 동대문운동장이 외국 유명건축가의 브랜드에 침몰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근대건축 유적 말살의 현장을 바라보며 서울시가 추구하는 역사도시로서의 도심재창조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심재현 세종대 건축학과 교수는 '글로벌 인천 도시 조감도 비판'이란 글에서 인천의 초고층 건물의 비효용성, 반환경적 특성을 밝혀낸다. 심 교수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상징적 표상인 송도 151층 인천타워와 65층 동북아트레이드센터, 청라지구의 77층 WTC 건립 계획은 국제 경쟁을 향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이 '미래도시의 랜드마크' 구현이라는 형상적인 접근에서 나온 결과라면 앞으로 수많은 난관과 그로 인한 기존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인 비용을 감수하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초고층 건축 계획은 형상이 우선이 아니라, 공간의 대량 공급에 대비한 실질적인 수요와 사용 목적에 맞는 공간의 효용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초고층 개발로 인한 정주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반건축물 수준에 머물러 있는 안전과 방재 대책을 초고층의 특성에 맞는 법과 제도로 개선하여야 하며 에너지 과소비를 줄일 수 있는 저비용 기술이 개발되어야 할뿐더러 고밀의 건축물을 유지할 수 있는 인프라 시설이 사전에 정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동훈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인천도시개발과 지역경제'라는 글에서 산업구조의 고도화로 인한 도시개발의 폐해 중 하나로 주민을 갈아 끼워야 하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을 경고한다. 정작 도시가 꾸는 꿈의 수혜자여야 할 애꿎은 시민들이 피해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산업구조 재편의 부정적인 단면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왕기 인천발전연구원 연구기획실장은 '도시의 새로운 화두, 친수공간'이란 글에서 인천의 친수공간 개발의 당위와 전개방향에 대해 일언을 한다. 이왕기 기획실장은 인천은 당초 내륙지역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도시적 용도의 토지가 매립을 통해서 공급되었고, 그 과정을 겪으며 리아스식 해안구조를 갖던 도시 형태는 점차 기하학적인 단순 구조의 해안선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이렇게 매립을 통해 공급된 토지의 대부분에 항만시설과 공업 및 농업용도 그리고 일부 혐오시설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 매립장과 발전소 등이 입지함으로써 사실상 사람이 바다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63km라는 엄청난 길이의 해안선을 보유한 인천이 제대로 된 친수공간을 하나 갖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인천의 내륙을 통과하는 하천은 규모가 작거나 건천이었던 관계로 시민들의 접근이 원활하지 못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지정이 인천의 오랜 숙원인 친수도시로의 접근을 가능케 했지만 그는 현재 경제자유구역개발계획이나 각종 단위사업계획에서 친수공간 조성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나 방향성 제시가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백승만 공간도시연구소 소장은 '서울과 파리의 문화적 도시재생'이란 글에서 문화도시 패러다임이라는 주제로 서울과 파리를 비교분석하고 있다. 그는 파리가 보행자중심의 도시체계를 갖추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며 파리의 가로 개념이 보행자편의 뿐 아니라 가로변의 자연환경, 건축유산 보호 등 보다 총체적인 도시환경으로서의 '시민화 거리' 만들기에 주력해왔다고 강조한다. 또한 신도시 라데팡스의 개발과정을 주시하며 국가주최로 실현된 대규모 건축계획들이 국제사회에 프랑스건축을 개방하는 계기가 되고 그로써 폭넓은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었으며 언론과 대중매체는 각 건축계획의 과정을 세세히 보도하고, 때때로 그 현장에서 야기되는 논쟁을 퍼뜨리는 역할을 통해서 건축의 대중화에 기여함은 물론, 자국의 신예 건축가가 세계적 건축가로 급부상하는 장치를 만든 사례를 주목한다. 그는 문화적 도시재생이 디자인 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단기성의 과시형 도시화보다 장기적 안목의 지속가능한 도시 만들기에 민관이 힘을 모아야한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소설가 이경자의 신작 <언니를 놓치다>,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작가 양진채의 <딸기 샐러드 이야기>를 비롯, 김해화, 공광규, 정끝별, 윤희상, 박관서, 이면우 시인의 신작시들이 창작란을 채우고 있다.

/조혁신기자 blog.itimes.co.kr/mrpen

일본 고대(奈良時代) 때, 독도를 신라 땅 안도(雁道)섬으로 불러 / 대구일보 - 2008년 5월 25일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옛날 7세기부터  독도는 ‘안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들이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에 건너올 때 쉬었다가 오는 곳이 독도였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독도를 ‘안도’라고 불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7세기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면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백제 도래인 행기(行基)라는 승려였다. 행기는 일본 고대사회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불교의 대승려로서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를 창립하였고, 토목공사 등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행기는 일본 열도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면서 발로 밟으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 최초로 ‘일본도(日本圖)’라는 지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지도에 ‘雁道, 雖有城非人, 新羅國, 五百六十六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고 독도는 신라 땅이며, 신라는 566군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도이고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도 없었던 시대의 최고 오래된 지도였다.
행기가 만든 ‘일본도’는 지금 동경(東京) 가네쟈와 문고(金澤文庫藏)에 소장되었고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교토 니와지(仁和寺) 사찰에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도를 보고 1662년 9월에 제작한 부상국지도(扶桑國之圖)도 있다.
이 지도에도 그동안 독도를 ‘안도’라고 했고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측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작자는 교토의 테라마치 니죠(寺町二条)에 사는 데라다 스게헤이헤(寺田重兵衛)이다. 제작자는 원래 서양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또는 지방사를 많이 연구한 자이다.
그러니 7세기부터 17세기 까지 신라 땅이었다는 것을 두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인들은 ‘안도’에서 기러기들이 먼 해상에서 날아 올 때 독도에서 쉬어서 왔고 독도를 거처 일본에 올 때 바다에서 쉬기 위해 나뭇잎을 물고 날아 왔다는 전설이 있다.
독도에서 날아온 기러기들은 한 철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병들어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고 돌아가지 못한 기러기도 꽤 많았다.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 오늘날 까지 위령제를 지내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독도를 마주보는 시마네현(島根縣) 사람들이 제를 올린다고 한다. 죽은 기러기들을 추모하는 풍속을 카모후로(雁風呂)라고 한다. 즉 사시 철(봄, 여름, 가을, 겨울) 목욕탕에 계절에 따라 나뭇가지 잎을 욕실에 넣어 목욕하는 풍속을 말한다.
필자는 왜 이 카모후로를 지내는 가를 물었다. 그들은 옛날 이 지방의 풍속으로서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서 고대로부터 축제로 지내고 우리나라 독도 (일본은 竹島) 를 향해 손을 모아 절을 한다고 한다. 독도를 두고 일본인들은 고대에서는 ‘안도’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을 이번 지도 조사에서 알게 되었고, 독도의 최초의 명칭은 ‘안도’ 즉 새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신라 지증왕 때부터 우산국(于山國)이라 했는데 일본은 고대로부터 17세기까지는 ‘기러기 섬’이라 했다는 것을 일본사람들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지금 사용하는 중학교 지리, 공민 교과서에 죽도(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술된 것이 몇 권 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앞으로 14권 모두가 일본영토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 일본 중학교 교과서 14권 중 4권은 ‘독도는 죽도이고 일본영토’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10권은 ‘일본 해안에 있는 죽도는 한국과 일본 간에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가끔 또 자기네 땅이라 하니 일본나라의 속내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김문길(부산외대 교수)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옛날 7세기부터  독도는 ‘안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들이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에 건너올 때 쉬었다가 오는 곳이 독도였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독도를 ‘안도’라고 불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7세기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면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백제 도래인 행기(行基)라는 승려였다. 행기는 일본 고대사회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불교의 대승려로서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를 창립하였고, 토목공사 등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행기는 일본 열도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면서 발로 밟으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 최초로 ‘일본도(日本圖)’라는 지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지도에 ‘雁道, 雖有城非人, 新羅國, 五百六十六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고 독도는 신라 땅이며, 신라는 566군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도이고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도 없었던 시대의 최고 오래된 지도였다.
행기가 만든 ‘일본도’는 지금 동경(東京) 가네쟈와 문고(金澤文庫藏)에 소장되었고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교토 니와지(仁和寺)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옛날 7세기부터  독도는 ‘안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들이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에 건너올 때 쉬었다가 오는 곳이 독도였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독도를 ‘안도’라고 불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7세기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면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백제 도래인 행기(行基)라는 승려였다. 행기는 일본 고대사회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불교의 대승려로서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를 창립하였고, 토목공사 등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행기는 일본 열도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면서 발로 밟으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 최초로 ‘일본도(日本圖)’라는 지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지도에 ‘雁道, 雖有城非人, 新羅國, 五百六十六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고 독도는 신라 땅이며, 신라는 566군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도이고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도 없었던 시대의 최고 오래된 지도였다.
행기가 만든 ‘일본도’는 지금 동경(東京) 가네쟈와 문고(金澤文庫藏)에 소장되었고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교토 니와지(仁和寺) 사찰에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도를 보고 1662년 9월에 제작한 부상국지도(扶桑國之圖)도 있다.
이 지도에도 그동안 독도를 ‘안도’라고 했고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측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작자는 교토의 테라마치 니죠(寺町二条)에 사는 데라다 스게헤이헤(寺田重兵衛)이다. 제작자는 원래 서양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또는 지방사를 많이 연구한 자이다.
그러니 7세기부터 17세기 까지 신라 땅이었다는 것을 두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인들은 ‘안도’에서 기러기들이 먼 해상에서 날아 올 때 독도에서 쉬어서 왔고 독도를 거처 일본에 올 때 바다에서 쉬기 위해 나뭇잎을 물고 날아 왔다는 전설이 있다.
독도에서 날아온 기러기들은 한 철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병들어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고 돌아가지 못한 기러기도 꽤 많았다.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 오늘날 까지 위령제를 지내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독도를 마주보는 시마네현(島根縣) 사람들이 제를 올린다고 한다. 죽은 기러기들을 추모하는 풍속을 카모후로(雁風呂)라고 한다. 즉 사시 철(봄, 여름, 가을, 겨울) 목욕탕에 계절에 따라 나뭇가지 잎을 욕실에 넣어 목욕하는 풍속을 말한다.
필자는 왜 이 카모후로를 지내는 가를 물었다. 그들은 옛날 이 지방의 풍속으로서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서 고대로부터 축제로 지내고 우리나라 독도 (일본은 竹島) 를 향해 손을 모아 절을 한다고 한다. 독도를 두고 일본인들은 고대에서는 ‘안도’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을 이번 지도 조사에서 알게 되었고, 독도의 최초의 명칭은 ‘안도’ 즉 새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신라 지증왕 때부터 우산국(于山國)이라 했는데 일본은 고대로부터 17세기까지는 ‘기러기 섬’이라 했다는 것을 일본사람들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지금 사용하는 중학교 지리, 공민 교과서에 죽도(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술된 것이 몇 권 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앞으로 14권 모두가 일본영토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 일본 중학교 교과서 14권 중 4권은 ‘독도는 죽도이고 일본영토’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10권은 ‘일본 해안에 있는 죽도는 한국과 일본 간에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가끔 또 자기네 땅이라 하니 일본나라의 속내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김문길(부산외대 교수)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옛날 7세기부터  독도는 ‘안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들이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에 건너올 때 쉬었다가 오는 곳이 독도였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독도를 ‘안도’라고 불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7세기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면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백제 도래인 행기(行基)라는 승려였다. 행기는 일본 고대사회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불교의 대승려로서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를 창립하였고, 토목공사 등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행기는 일본 열도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면서 발로 밟으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 최초로 ‘일본도(日本圖)’라는 지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지도에 ‘雁道, 雖有城非人, 新羅國, 五百六十六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고 독도는 신라 땅이며, 신라는 566군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도이고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도 없었던 시대의 최고 오래된 지도였다.
행기가 만든 ‘일본도’는 지금 동경(東京) 가네쟈와 문고(金澤文庫藏)에 소장되었고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교토 니와지(仁和寺) 사찰에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도를 보고 1662년 9월에 제작한 부상국지도(扶桑國之圖)도 있다.
이 지도에도 그동안 독도를 ‘안도’라고 했고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측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작자는 교토의 테라마치 니죠(寺町二条)에 사는 데라다 스게헤이헤(寺田重兵衛)이다. 제작자는 원래 서양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또는 지방사를 많이 연구한 자이다.
그러니 7세기부터 17세기 까지 신라 땅이었다는 것을 두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인들은 ‘안도’에서 기러기들이 먼 해상에서 날아 올 때 독도에서 쉬어서 왔고 독도를 거처 일본에 올 때 바다에서 쉬기 위해 나뭇잎을 물고 날아 왔다는 전설이 있다.
독도에서 날아온 기러기들은 한 철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병들어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고 돌아가지 못한 기러기도 꽤 많았다.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 오늘날 까지 위령제를 지내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독도를 마주보는 시마네현(島根縣) 사람들이 제를 올린다고 한다. 죽은 기러기들을 추모하는 풍속을 카모후로(雁風呂)라고 한다. 즉 사시 철(봄, 여름, 가을, 겨울) 목욕탕에 계절에 따라 나뭇가지 잎을 욕실에 넣어 목욕하는 풍속을 말한다.
필자는 왜 이 카모후로를 지내는 가를 물었다. 그들은 옛날 이 지방의 풍속으로서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서 고대로부터 축제로 지내고 우리나라 독도 (일본은 竹島) 를 향해 손을 모아 절을 한다고 한다. 독도를 두고 일본인들은 고대에서는 ‘안도’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을 이번 지도 조사에서 알게 되었고, 독도의 최초의 명칭은 ‘안도’ 즉 새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신라 지증왕 때부터 우산국(于山國)이라 했는데 일본은 고대로부터 17세기까지는 ‘기러기 섬’이라 했다는 것을 일본사람들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지금 사용하는 중학교 지리, 공민 교과서에 죽도(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술된 것이 몇 권 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앞으로 14권 모두가 일본영토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 일본 중학교 교과서 14권 중 4권은 ‘독도는 죽도이고 일본영토’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10권은 ‘일본 해안에 있는 죽도는 한국과 일본 간에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가끔 또 자기네 땅이라 하니 일본나라의 속내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김문길(부산외대 교수)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옛날 7세기부터  독도는 ‘안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들이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에 건너올 때 쉬었다가 오는 곳이 독도였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독도를 ‘안도’라고 불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7세기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면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백제 도래인 행기(行基)라는 승려였다. 행기는 일본 고대사회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불교의 대승려로서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를 창립하였고, 토목공사 등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행기는 일본 열도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면서 발로 밟으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 최초로 ‘일본도(日本圖)’라는 지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지도에 ‘雁道, 雖有城非人, 新羅國, 五百六十六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고 독도는 신라 땅이며, 신라는 566군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도이고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도 없었던 시대의 최고 오래된 지도였다.
행기가 만든 ‘일본도’는 지금 동경(東京) 가네쟈와 문고(金澤文庫藏)에 소장되었고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교토 니와지(仁和寺) 사찰에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도를 보고 1662년 9월에 제작한 부상국지도(扶桑國之圖)도 있다.
이 지도에도 그동안 독도를 ‘안도’라고 했고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측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작자는 교토의 테라마치 니죠(寺町二条)에 사는 데라다 스게헤이헤(寺田重兵衛)이다. 제작자는 원래 서양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또는 지방사를 많이 연구한 자이다.
그러니 7세기부터 17세기 까지 신라 땅이었다는 것을 두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인들은 ‘안도’에서 기러기들이 먼 해상에서 날아 올 때 독도에서 쉬어서 왔고 독도를 거처 일본에 올 때 바다에서 쉬기 위해 나뭇잎을 물고 날아 왔다는 전설이 있다.
독도에서 날아온 기러기들은 한 철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병들어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고 돌아가지 못한 기러기도 꽤 많았다.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 오늘날 까지 위령제를 지내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독도를 마주보는 시마네현(島根縣) 사람들이 제를 올린다고 한다. 죽은 기러기들을 추모하는 풍속을 카모후로(雁風呂)라고 한다. 즉 사시 철(봄, 여름, 가을, 겨울) 목욕탕에 계절에 따라 나뭇가지 잎을 욕실에 넣어 목욕하는 풍속을 말한다.
필자는 왜 이 카모후로를 지내는 가를 물었다. 그들은 옛날 이 지방의 풍속으로서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서 고대로부터 축제로 지내고 우리나라 독도 (일본은 竹島) 를 향해 손을 모아 절을 한다고 한다. 독도를 두고 일본인들은 고대에서는 ‘안도’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을 이번 지도 조사에서 알게 되었고, 독도의 최초의 명칭은 ‘안도’ 즉 새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신라 지증왕 때부터 우산국(于山國)이라 했는데 일본은 고대로부터 17세기까지는 ‘기러기 섬’이라 했다는 것을 일본사람들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지금 사용하는 중학교 지리, 공민 교과서에 죽도(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술된 것이 몇 권 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앞으로 14권 모두가 일본영토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 일본 중학교 교과서 14권 중 4권은 ‘독도는 죽도이고 일본영토’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10권은 ‘일본 해안에 있는 죽도는 한국과 일본 간에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가끔 또 자기네 땅이라 하니 일본나라의 속내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김문길(부산외대 교수)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옛날 7세기부터  독도는 ‘안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들이 시베리아로부터 일본에 건너올 때 쉬었다가 오는 곳이 독도였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독도를 ‘안도’라고 불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7세기였다. 독도를 ‘안도’라고 부르면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백제 도래인 행기(行基)라는 승려였다. 행기는 일본 고대사회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불교의 대승려로서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를 창립하였고, 토목공사 등 농사짓는 방법이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었다.
행기는 일본 열도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면서 발로 밟으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 최초로 ‘일본도(日本圖)’라는 지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지도에 ‘雁道, 雖有城非人, 新羅國, 五百六十六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고 독도는 신라 땅이며, 신라는 566군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도이고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도 없었던 시대의 최고 오래된 지도였다.
행기가 만든 ‘일본도’는 지금 동경(東京) 가네쟈와 문고(金澤文庫藏)에 소장되었고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교토 니와지(仁和寺) 사찰에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도를 보고 1662년 9월에 제작한 부상국지도(扶桑國之圖)도 있다.
이 지도에도 그동안 독도를 ‘안도’라고 했고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측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작자는 교토의 테라마치 니죠(寺町二条)에 사는 데라다 스게헤이헤(寺田重兵衛)이다. 제작자는 원래 서양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또는 지방사를 많이 연구한 자이다.
그러니 7세기부터 17세기 까지 신라 땅이었다는 것을 두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인들은 ‘안도’에서 기러기들이 먼 해상에서 날아 올 때 독도에서 쉬어서 왔고 독도를 거처 일본에 올 때 바다에서 쉬기 위해 나뭇잎을 물고 날아 왔다는 전설이 있다.
독도에서 날아온 기러기들은 한 철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병들어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고 돌아가지 못한 기러기도 꽤 많았다.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 오늘날 까지 위령제를 지내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일본 열도에서도 독도를 마주보는 시마네현(島根縣) 사람들이 제를 올린다고 한다. 죽은 기러기들을 추모하는 풍속을 카모후로(雁風呂)라고 한다. 즉 사시 철(봄, 여름, 가을, 겨울) 목욕탕에 계절에 따라 나뭇가지 잎을 욕실에 넣어 목욕하는 풍속을 말한다.
필자는 왜 이 카모후로를 지내는 가를 물었다. 그들은 옛날 이 지방의 풍속으로서 죽은 기러기들을 위해서 고대로부터 축제로 지내고 우리나라 독도 (일본은 竹島) 를 향해 손을 모아 절을 한다고 한다. 독도를 두고 일본인들은 고대에서는 ‘안도’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을 이번 지도 조사에서 알게 되었고, 독도의 최초의 명칭은 ‘안도’ 즉 새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신라 지증왕 때부터 우산국(于山國)이라 했는데 일본은 고대로부터 17세기까지는 ‘기러기 섬’이라 했다는 것을 일본사람들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지금 사용하는 중학교 지리, 공민 교과서에 죽도(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술된 것이 몇 권 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앞으로 14권 모두가 일본영토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 일본 중학교 교과서 14권 중 4권은 ‘독도는 죽도이고 일본영토’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10권은 ‘일본 해안에 있는 죽도는 한국과 일본 간에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가끔 또 자기네 땅이라 하니 일본나라의 속내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김문길(부산외대 교수)

日 공민ㆍ지리 교과서 "독도는 일본땅" / 매일경제 - 2008년 5월 22일

일본의 중ㆍ고등학교 검정 교과서에 이미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기술이 실려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2일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일본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중ㆍ고등학교 역사, 사회 분야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본문이나 각주 등에서 직접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가 총 7종에 달했다.
교과서 분석은 2007년에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역사, 사회 분야 교과서 37종과 2005년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교과서 3종 등 총 40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직접적인 기술은 역사 교과서가 아닌 지리 교과서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정치경제 교과서에서는 북방영토와 센카쿠제도 등과 함께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전후 미해결 문제로 남아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와함께 직접 서술이 없더라도 대부분의 교과서에 실린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시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직접적인 서술을 싣고 있는 교과서는 도쿄쇼셰키(東京書籍), 오사카쇼세키(大阪書籍), 후소샤(扶桑社)에서 발행한 중학교 공민(사회윤리) 교과서와 니혼쇼세키신샤(日本書籍新社)가 발행한 중학교 지리 교과서, 데이코쿠쇼인(帝國書院)의 고등학교 지리AㆍB, 도쿄쇼셰키(東京書籍)의 고등학교 지리B 등이다.

데이코쿠쇼인 지리 B 교과서의 경우 "일본 고유영토인 다케시마도 한국 사이에 영유권 문제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같은 출판사의 지리A 교과서에는 "독도가 시마네현에 귀속돼 있다"고 기술돼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남상구 박사는 "2001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2005년 이후 검정된 교과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역사 문제가 아닌 영유권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며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이긴 하지만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oyyi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구글어스·맵스 “독도는 없다” / 쿠키뉴스 - 2008년 5월 20일

[쿠키 사회]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교과의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명기할 방침을 정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세계 최대 지리 정보 서비스인 구글어스와 맵스에는 여전히 독도의 영문표기법인 ‘Dokdo’를 찾아볼 수 없어 국내 네티즌들의 분노와 아쉬움을 사고 있다.

◇ 어스는 중립표현, 맵스는 ‘다케시마’ = 2005년부터 서비스되기 시작해 지난해 기준으로 2억 명에 이르는 네티즌이 사용한 세계 최대 지도정보서비스 구글맵스에서 ‘Korea’라고 검색해 독도를 선택하면 사진과 함께 ‘takesima(japan), okinosima, oki, shimane, japan’이라고 나온다. 독도와 병기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외 네티즌들에게는 아예 다케시마라는 일본의 영토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오키노시마(okinosima)는 일본 시마네현의 행정구역에 소속된 곳으로 독도가 이 행정구역에 속하는 섬이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관련 교재를 제작해 구역 내 학교에 보급하는 등 독도의 일본 영유에 대한 일본국민에 대한 여론 환기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곳이다.

구글맵스에는 이미 수많은 국내 네티즌들이 찾아 비난 댓글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위성사진 서비스인 구글어스에도 ‘Dokdo’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구글어스에는 ‘리앙쿠르트 암(Liancourt Rocks)’이라고 나온다.

리앙쿠르트 암은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트호에서 비롯된 중립적 표현이지만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희석시키려는 일본의 의도가 들어간 표현이라는 것이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 측의 설명이다.

물론 구글어스나 맵스는 모두 선택 지명에 대한 정보를 위키피디아 영문판으로 바로 연결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는 독도를 리앙쿠르트 암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설명에서도 ‘한국에서는 독도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알려져있다’라며 중립적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바다 표기가 ‘sea of japan(east sea)’이라고 일본 중심적으로 표현돼 있어 독도 분쟁에 관해 잘 모르는 해외 네티즌들이 봤을 때 독도는 일본의 주변적 존재로 느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 민간단체·네티즌만 ‘아둥바둥’ = 이에 구글코리아는 나름대로의 노력은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구글코리아 관계자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지사라는 이유로 본사에 직접 수정을 요청할 수는 없고, 공인된 국가기관을 통해야 한다”며 “가장 정확한 국내 지리정보를 가지고 있는 국토해양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에 몇 차례 요청을 했으나 지리정보원 측에서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수정의 근거 자료로 제시할 수 있는 지리 정보의 노출 자체를 할 수 없다며 반려했다”고 말했다. 결국 구글코리아나 한국 정부 수준의 직접적인 요청은 시도 자체도 없었다는 셈이다.

이에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나 네티즌들만 애쓰고 있는 형국이다.

반크 관계자는 “이메일을 통해 구글 본사와 구글코리아 측에서 여러번 요청을 했으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반응’이었다”며 “정부에 요청도 해봤으나 정부는 개별 기업의 서비스에 간섭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일본식이나 중국식으로 표기된 일부 국내 지명의 표기오류는 네티즌들이 구글 측에 요청해 수정된 경우가 많다”며 “이런 서비스의 표기 변경은 정부를 통해 요청하기보다는 네티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시론]독도 ‘암초’ 만난 韓·日 동반자 관계 / 세계일보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사회교과의 새로운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명기하기로 했다고 일본의 한 신문이 전했다. 지금까지 해설서에는 일본 입장에서 영토분쟁 지역 가운데 러시아와의 분쟁지역인 북방 4개 섬에 관해서만 고유 영토라고 표기했었다. 이번에는 한국 및 중국과의 영토분쟁 지역을 모두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일본 청소년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교과서 파문의 배후에는 독도를 국제적 분쟁지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보수우익 세력이 있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일본의 우익세력은 주변 국가와의 우호적인 대외관계보다는 국수적 이익을 추구한다. 영토분쟁과 역사문제에 강경 대응하도록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 한일 간 미래지향적 관계 수립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보도된 대로 일본 정부가 발간하는 학습 해설서에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명기된다면 일본의 민간인 교과서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교과서로 교육받는 일본의 청소년은 당연히 독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고, 장래에는 그런 인식을 근거로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독도 영유권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이 노리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미래 세대에까지 독도가 영토 분쟁지역으로 지속된다면 미래지향적 한일 우호관계는 불가능하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방문 때 밝힌 “양국관계를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확대하고 새로운 한일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결의는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이다. 한일 미래세대 간의 화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본 정부에 독도 영유권을 제기하지 말도록 엄중히 요구해야 한다. 국제사회에 대해서도 독도는 한국의 고유한 영토이며, 그것은 역사·지리·국제법적으로 확립된 사실임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독도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실효적 지배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줄기차게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한 일본 정부도 우리의 실효적 지배 자체를 부인하진 않는다. 그래서 독도에 대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도전을 감행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19세기 말 한반도 전체가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뼈아픈 경험을 떠올리며 혹여 독도를 다시 일본에 뺏기지나 않을까 우려한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대한민국의 국력은 100여년 전 나약했던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다. 또 국민 개개인의 학식과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관심이나 국가에 대한 헌신도는 그 옛날 선조들의 그것과 견줄 수준이 아니다. 이러한 국력과 국민의 능력을 감안할 때 독도의 영유권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흔들림 없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이 자국 내에서조차 떠들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일본의 어느 누구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일본의 특정세력이 일본 국내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발언까지 저지하는 묘책은 없다는 것이다. 일본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국제사회에 일본의 주장이 부당하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알리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 정부와 전문가·학자들의 책무이다. 일본사회에 대해서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일 우호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도리밖에 없다. 힘이 들겠지만 그것은 동반자 관계를 모색하는 미래 한일관계를 위해 바람직한 선택이 될 것이다.

김호섭 중앙대 교수·국제관계학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정보시스템 개설 / 충청투데이 - 2008년 5월 15일

한국해양연구원은 15일 독도 관련 정보 웹사이트인 '독도종합정보시스템(www.dokdo.re.kr)'을 개설, 공식 서비스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해양연 내 독도전문연구사업단이 구축한 독도정보시스템은 독도와 주변 해역의 해양과학 연구조사 결과와 기존 자료를 망라해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독도에 관한 각종 연구자료를 표, 그림, 그래프 등으로 소개했고 독도 및 주변 해양환경의 시·공간적 변화를 관찰할 수 있도록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한 주제도와 위성 영상도 서비스한다.

김경환 기자 kmusic7@cctoday.co.kr

한ㆍ일 간행 2만5000분의 1 축적 독도 지도 비교해보니 [조인스]/중앙일보 - 2008년 5월 19일

“국제사법재판소가 한국과 일본 정부가 각각 제출한 독도 지도만 보고 판단한다면 일본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최선웅 매핑코리아 대표(63·한국산악회 부회장)은 16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지도학회 학술회의에서 “지난해 정부가 간행한 2만5000분의 1 축척의 독도 지형도가 정확성과 표현기법 측면에서 지난해 일본이 우주에서 촬영한 인공위성 영상으로 제작한 것보다 뒤떨어진다”고 말했다.

1974년부터 34년간 지도를 제작해온 최 대표는 한ㆍ일 정부가 공식 간행한 2만5000분의 1 축척의 독도 지형도를 비교한 논문‘독도의 지형도 제작과 표현기법’에서 2007년 한국 정부가 간행한 독도 지형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한국이 제작한 독도 지형도는 해안바위의 기호가 벼랑바위 기호와 유사하고 기호의 상단부가 바다 쪽을 향해 섬의 형태가 부정확하게 표현돼 있다”며 “섬의 내부를 녹색의 등고선만으로 표기해 바위섬으로 형성된 독도의 모습이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간행한 독도 지형도는 현지 측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차 범위가 큰 위성 데이터로 제작했지만 해안바위와 수중바위, 동도의 천장굴의 특수지형 등의 묘사가 독도의 형태를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
최 대표가 지도의 정밀도를 판단하기 위해 주목한 것은 독도 주변의 부속섬이다. 한국 국토지리정보원이 간행한 독도 지형도에는 부속섬이 12개밖에 없는 반면 일본 국토지리원 독도 지형도에는 50개의 부속 섬이 표현돼 있다.

또 접안시설을 비롯한 구조물도 빠져 있다. 물론 일본의 독도 지형도에서도 구조물은 빠져 있지만 사정은 좀 다르다. ‘불법 구축물’로 간주해 의도적으로 빠뜨린 것이다.

최 대표가 지적한 가장 큰 문제는 흔히 도엽명으로 불리는 지도의 고유번호를 부여하지 않은 점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이 간행한 독도 지형도는 ‘도엽명 울릉’의 삽입도로 제작돼 도엽명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일본 국토지리원이 제작한 독도 지형도는 삽입도임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위해 별도의 도엽명을 부여해놓았다. 도엽명은 고유한 것이어서 해당 도엽명만 대면 일본령 독도 지도를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최 대표는 “세계에서 정부가 간행한 지도 한 장만 딱 놓고 비교해 봐도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정부가 일본 보다 더 정교하고 더 정확한 독도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자

19세기 英여성이 기록한 오지 여행기 / 문화일보 - 2008년 5월 8일

이사벨라 버드 / 이블린 케이 지음, 류제선 옮김 / 바움

신세미기자 ssemi@munhwa.com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다…’. 시인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 등장하는 ‘여사’는 19세기말 한국여행기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로도 익숙한 19세기 여성선각자다.

1883∼1887년 네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영국여성은 ‘어느 모로 보나 단조로운’ 당시 서울을 비롯, 거룻배를 타고 한강 주변 마을의 모습은 물론 조랑말을 타고 금강산, 원산해변 등지의 사람과 풍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은 모험 가득한 여행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으로 사람들이 가지 않는 위험지역을 찾아다녔던 19세기 여성여행가의 전기다. 여성의 해외활동이 원활하지 못했던 시절, 그는 여성 최초로 중국 양쯔강을 거슬러 여행했고 중국, 티베트의 국경지대를 둘러봤다.

20대 중반 처음으로 미국, 캐나다 여행을 시작한 그는 35세때 모친 사망 후 오지여행을 통해 마음의 병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능력, 외모 등에서 특출나지 않았으며 건강이 나빴던 그에게 의사들은 치료 차원에서 여행을 권했던 것. 첫 여행에서 신체적 통증을 잊고 오히려 기력을 회복한 그는 그후 30년여 세계 각국을 여행한 뒤 영국 집에 돌아가선 여행기를 집필하는 여행작가의 삶을 살았다.

영국서 홀로 감행한(통역 및 하인을 동행하기는 했지만) 그의 논픽션여행기는 영국 등지서 인정받았다. 50세때 주치의 비숍과 결혼했으나 5년간의 짧은 결혼생활 후 페르시아와 티베트, 중국, 한국을 여행했다. 오지여행의 경험을 담은 8권의 여행기 외에, 후반엔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이국 사진집도 펴냈다. 60세 이후에도 거칠고 외딴 지역을 주로 찾았던 그는 영국 런던 왕립지리학회 사상 최초의 여성연설자이자 특별회원의 영예를 안았다.

티베트여행 때는 말이 급류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위기상황에 부딪히는 등 늘 참사와 재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특히 한국 등 극동지역에서의 동양적 생활을 재미나고 편하게 여겼다. 특히 1898년 펴낸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마침 한국과 극동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할 때라 이틀 만에 2000부가 팔렸고, 그를 한국정치 전문가로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심신의 병조차 여행을 통해 치유했던 그는 결국 1901년 모로코여행 후 중국여행의 꿈을 안고 70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여성여행가의 여로를 따라 19세기 후반 조선 부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프랑스 시계 등 유럽 상품의 흔적을 발견하는 등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각국 오지의 풍습도 흥미롭다.

신세미기자 ssemi@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8-05-09

英 케임브리지대 한국학 교수 협약식 / 매일경제 - 2008년 6월 4일

한국국제교류재단 임성준 이사장은 4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방문해 데이비드 예이츠 학장과 학국학 교수직 설치 협약식을 체결했다. 케임브리지대는 공모절차를 통해 10월쯤 '현대 한국사회'를 전공 분야로 하는 교수 1명을 임용할 예정이다. 한국학 교수는 케임브리지대 로빈슨 컬리지와 동아시아연구소에 소속된다.

이번 협약에 따라 국제교류재단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33만5천400파운드를 대학에 지원하기로 했다. 5년 후에는 대학 자체 경비로 교수직을 운영한다.

국제교류재단은 케임브리지대학에 한국학 강좌를 신설하기 위해 지난 1월 케임브리지대학과 한국학 교수를 1명 두기로 합의한 바 있다.

kjh@yna.co.kr

(런던=연합뉴스) 김진형 특파원

['조선왕실의궤' 인터넷으로 본다] / 매일경제 - 2008년 6월 2일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실의궤'를 포함한 한국학 관련 각종 고문서들을 인터넷을 통해 원본은 물론 해석 자료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고문서, 고도서 등 국내외에 산재한 한국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ㆍ정리하고 디지털화하기 위해 올해 28억원의 예산을 투입, 한국학자료센터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3일 밝혔다.

이번에 조성되는 한국학자료센터는 국내외 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학 관련 자료를 발굴, 수집한 뒤 이를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수집 대상 자료에는 족보, 호적, 호구문서, 민적부, 토지대장 등 각종 역사통계자료, 지리지, 읍지, 지도, 향교ㆍ서원ㆍ사찰 관련 고문서 등 인문지리 자료, 장서각과 규장각의 관찬사료, 연대기, 의궤, 어제, 국왕문집, 왕실족보 등 각종 왕실자료 등이 모두 포함된다.

교과부는 이를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한국학자료센터 중앙센터로, 장서각과 규장각을 권역별센터로 지정했으며 올해 중 2개의 기관을 권역별센터로 추가 지정할 계획이다.

한국학자료센터 구축이 완료되면 일반인들이 손쉽게 인터넷을 통해 옛 문서의 원본과 이에 대한 설명자료, 의역자료 등을 검색해 볼 수 있으며 일선 학교에서도 수업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고 교과부는 설명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 세자책봉, 임금 행차 등 각종 행사에 대한 기록이 담긴 조선왕실의궤의 경우 원본과 함께 원본에 대한 해석, 기록을 할 당시의 상황 등 설명자료까지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박주호 학술연구진흥과장은 "초중고교 학생들이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앞으로 매년 28억원씩 투자해 지속적으로 자료 발굴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yy@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한국학 디지털자료센터 조성 /뉴스와이어 - 2008년 6월 2일

오성영webmaster@hkbs.co.kr

교육과학기술부(장관 김도연)는 고문서, 고도서, 한문 원형의 향토 문집 등 국내외에 산재한 한국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 분석하고 표준화된 형식으로 디지털화하는 한국학자료센터를 만든다고 밝혔다.

이번 한국학자료센터사업을 위해 시행 첫해인 올해에는 28억원의 국고예산이 투자된다. 본 자료센터 사업은 학술정보관리계획 세부 집행사업의 일환으로 학술연구비에서 연간 28억원 규모의 사업비가 매년 지속적으로 투입될 전망이다.

이번에 조성되는 한국학자료센터는 중앙센터와 권역별 센터로 구분 운영되는데 우선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중앙센터로 지정해 운영한다.

중앙센터는 권역별 센터를 선정 조율하는 업무와 다양한 한국학 자료를 표준화할 수 있는 모듈 개발, 해외에 산재된 자료 수집 및 디지털화 등의 역할을 한다.
권역별 센터는 올해에 4개가 지정 또는 공모로 선정 운영되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과 서울대의 규장각은 국가전적보유기관으로써 권역별 센터로 우선 지정된다.
아울러 영남권과 호남권에서 각 1개의 권역별 센터가 공모 지정되는데 조성되는 각 센터에는 연간 사업비로 약 5억원이 지원된다.

이번에 조성되는 한국학자료 센터를 통해 발굴 수집 및 디지털화할 자료는 역사 통계자료, 인문지리 자료, 생활사 자료 및 국가 통치 문화자료 등 다양한 고문서나 고도서 자료가 포함된다.

과거 유사사업의 경우 한국학 자료에 대한 연구 없이 자료 소장기관 별로 단순 전산화에 치중해 일반인이나 연구자가 활용하는데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번에 추진되는 한국학자료센터는 관련성이 있는 기존 타 부처 주관 지식정보시스템(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지식정보자원 사업 등)과 상호 연계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전문연구자의 분석 설명이 부가된 자료를 생산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해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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