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30 septembre 2009

Le service continue sous une nouvelle forme

Le service de veille documentaire du Centre de Recherches sur la Corée (CRC) de l'EHESS continue aux adresses suivantes : "Veille sur la Corée" http://korea.hypotheses.org et "Service de documentation du CRC"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한국 연구센터의 모니터링 서비스는 "Veille sur la Corée" http://korea.hypotheses.org"Service de documentation du CRC" 에서 계속 제공됩니다.

mercredi 10 juin 2009

지도 이면의 세계 / 오마이뉴스 / 2009-06-03


여행기중독자가 자가 정신진단을 해 보건데 작금의 상태는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상태인 것 같다. 좀채로 벗어나기 힘들다. 일종의 정신적 디아스포라(유민) 상태이기도 하다. 앞으로 최소 3년 반은 가해자 그룹의 지배하에 살아야 하고, 그 이후의 미래도 보장된 것은 없다. 아픔을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죽음의 의미가 왜곡될까 하는 걱정에서 모두들 폭력을 자제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는 아직 피딱지는커녕, 채 지혈도 되지 않아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그들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지구인 마냥 그 상처에 이태리타월을 대고 밀어 재낀다. 고통스럽다.

아픔을 견디자니 괴로운 것이 사실이고, '치료'를 하려는 시도조차 왠지 미안스러워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로 지내고 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것도 사치스러운 도피만 같거니와 여유도 없다. 이 정도의 증상이면 정신적 외상이라는 소견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경험상, 이럴 땐 차라리 시야를 좀 더 깊고, 멀리 보내는 것이 정신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책을 집어 든다. 지도가 가득 들어있는 책 한권을 펴놓고 멍하니 바라본다. 지도를 보며 우리는 우짜든둥 이 지구라는 외로운 행성에서 살아가야 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한반도라는 땅덩어리에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도 이면의 세계

대략적으로 정치는 경제의 논리를 따라가고, 여행은 문화의 논리를 따라간다. 정치적 사건사고가 많은 나라들은 일단 '여행 금지국가' 혹은 '여행 주의국가'로 지정되어, 호기심 많은 여행자나 극성맞은 저널리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일단은 돌아가야 한다. 또 '주의국가'가 아니라도 어느 나라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군사지역이나 산업지역 지역은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 서울광장처럼...

해외 여행시 들뜬 마음으로 정신줄 놓고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는 스파이로 과대평가되어 어두운 골방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쉽게, 길 하나 차이로 일어난다. 그 어느 일본 관광객처럼...

정치와 여행이 상극인 이유는 또 있다. 정치 이야기는 여행자들에게 금기에 가깝다. 정치문제는 나라 간에도, 같은 나라 사람들 간에도 수많은 트리우마로 이루어져 있는 지뢰밭이다. 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가는 감정만 상하기 좋고, 길게 이야기 해봐야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딱 좋다.

그런데 문제는 여행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견문을 넓히는데 있고, 그곳의 생활을 지배하는 중요한 논리가 정치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여행을 온 외국인을 생각해 보자. 그저 영어 학원에서 알바 뛰며 홍대 클럽을 전전하는 여행자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다니는 여행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작금의 추모물결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문제일 것이다.

만약 몰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한국은 영어에 환장한 사람들과 놀기 좋아하는 젊은이의 나라로 기억될 것인 바, 그렇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을 깊이 이해할, 나아가서는 극동아시아를 이해할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다른 나라의 정치문제에 대해 주제넘게 따지는 짓은 몰상식한 짓이지만, 그 나라의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는 일은 여행자의 미덕이며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는 원래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한 아르테 TV에서 1990년부터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다큐멘터리 <지도의 이면>을 토대로 기획된 것으로, 2005년에 1권 <이틀라스 세계는 지금>에 이어서 그 후속작으로 펴낸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의 장점은 지도를 따라 정치, 경제, 역사, 종교, 환경 등을 다각도로 접근하여 세계의 내막을 심도 있게 파헤치고 있다는데 있다.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는 50여 개의 주제별로 주요 현안을 다루면서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윤곽을 보여준다.

"여러 영역에서 세계화의 충격을 다룬 1부에서는 급부상하는 신흥강국의 허와 실, 산업시설의 해외이전과 이민 문제, 경제 불평등, 확산 일로의 전염병, 다시 활개 치는 마피아와 해적, 위협받는 생물의 다양성 등을 짚어 본다. 이어 2부에서는 재편되는 역학 관계에 초점을 맞춰 미군의 재배치 문제, 국제동맹을 지향하는 나토의 변화, 에너지 자원을 둘러 싼 긴장국면, 중앙아시아의 지정학, 새로운 강국들이 탐을 내는 아프리카를 집중 조명한다." - 역자 후기 중

모든 주제가 새로울 것이 없게 느껴지다가도 일단 책을 펼치면 각각의 요소에 의해 세계가 얼마나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지도와 분석이 가득하다. 여행자들은 우리가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이 행성은 자원과 이권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앞질러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요충지들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내용은 자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국과 그 외의 강대국들과의 패권구도이다. 이념이 사라진 시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강국들은 어느 나라인가? 그리고 강대국들은 과연 무엇으로 영향력을 유지, 확대하고 있을까?

우선 떠오르는 신흥강국은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모두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각 대륙에서 중심국가로 거듭나고 있다. 중국은 이미 그 규모로 볼 때 강대국의 대열에 진입한지 오래고, 현재는 국제 패권 경쟁에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 러시아, 아프리카, 브라질과 연대를 이루는 외교에 바쁘다.

인도도 많은 사람들의 비관적인 전망을 극복했다. 농업을 발전시켜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하였으며, 인구, 영토, 성장률, 과도한 군사력(30년 전부터 핵무기를 보유했다), 안정된 정치질서, 첨단 과학기술로 '거의' 강국의 반열에 올라있다. 인도의 인구는 2030년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반열에 있는 브라질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다소 생소한데, 그 실상을 알고 나면 매우 놀랍다. 브라질은 엄청난 지하자원과 농업자원의 나라로 남아메리카 경제의 중심이다. 브라질은 미국과의 협정인 전미자유무역지대보다 '메르코수르', 즉 남미공동시장(브라질, 우르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베네수엘라)의 확대에 주력하고 있으며,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와 기술과 정치면에서 협력하여 미국경제에 종속되지 않은 경제대국을 꿈꾸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체 아프리카 GDP의 25%을 차지하고 있고, 생산시설은 전 아프리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다이아몬드가 이곳을 통해 거래되며, 세계에서 금이 가장 많이 매장된 곳도 이 지역이다.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대부분 외국 기업들의 지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변국은 일종의 하청관계가 되어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말 그대로 아프리카 남부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의 반열에 여전히 러시아가 있다. 러시아의 새로운 무기는 석유와 천연가스이다.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가스수송관은 러시아가 이 지역을 여전히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특히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 했다. 이제 이 지역은 "뉴 그레이트 게임의 거대한 체스판"이 되었다. 유럽으로 연결된 가스관이 지나가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절대적인 영향권이다. 몇 년 전, 수송관 수수료를 더 받으려 유럽과 러시아를 저울질하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가스공급을 중단한지 3일 만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든 바 있다.

벨로루시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벨로루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디파이언스>가 생각난다. "왼쪽에는 콧수염 짧은 괴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콧수염이 긴 괴물이 있다." 나치와 러시아군 사이에서 숨어사는 벨로루시 사람이 하던 이 말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한다. 이 비슷한 말이 일제 강점기 우리에게도 있었다. "되놈은 왔다가 되가는데, 왜놈은 왔다가 왜 안 가나." 이 말의 출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강대국 틈바구니에 있는 약소국의 비애가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도 석유자원이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젠은 상황이 다르다. 유럽은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과 중동을 관통하는 수송관을 연결하려하고 있다. 미국은 이 송유관 건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이유는 당연히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이들 중앙아시아의 산유국들은 필요에 따라 유럽연합과 러시아 사이를 오가며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길목에 터키가 있다. 터키는 여러모로 자원의 길을 따라 과거 비잔틴의 지정학적 위상이 되살아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이 '대대로 유럽의 적국이었던 터키를 유럽연합에 편입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안고 유럽이 고민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현대 국제사회는 자원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고 있는 중이고, 그 수송의 길목이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가고 있다. 중앙아시아 외에도 아프리카 기니만은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자원의 통로이다. 때문에 미국은 이 지역의 내정에 직,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일까지도 불사하며 석유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몽골도 새로운 요충지로 꼽힌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가스관을 건설한다면 그것은 몽골을 지나가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에 종속되어 지내 온, 그리고 그 자신이 산유국이기도 한 몽골은 이 기회에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몽골은 이라크전에 파병(130명)을 하였다.

아랍에미레이트와 두바이는 돈이 넘쳐나는 중동지역의 자유도시이다. 석유재벌들의 세금을 줄여주고 전 세계로 투자처를 찾아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젊은이들에게 자본주의적인 환락의 세계를 제공한다. 특히 이란에게 두바이는 미국의 금수조치망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어주고 있다.

또 중동의 호르무즈 해협, 예멘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지중해로 연결되는 통로인 수에즈 운하, 아시아로 가는 해상로에 있는 인도네시아의 말라카 해협은 모두 전통적인 해상 무역로의 요충지이다. 당연히 이곳에는 테러와 해적이 많다. 그리고 이 해상로 곳곳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군, 어디까지 갔나?

미국은 2000년대 초 새로운 시대에 맞춰 미군을 재편하였는데, 9.11 테러 이후 주둔군을 배치하는 새로운 기준을 채택하였다. 이제 문제는 "우리 군대가 어디에 있으며 보유한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당도할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기지를 확보하여 중동과 카프카스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유럽 내에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 미군기지가 있으며, 동유럽 국가 대부분은 러시아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하여 나토에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나토는 유럽사회의 안정을 위해 발칸지역과 같은 내전에 개입하였고, 과거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여러 분쟁에 개입하는 등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나토의 확대는 자연스럽게 미군의 영향력 확대를 동반한다.

중동지역은 말 그대로 포위상태다. 미국은 세계 석유소비량의 1/4을 소비하고 있는 나라로,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에 국가 안정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기술에 비해 석유대체 에너지의 개발이 유난히 더딘 이유가 분명 있을 듯한 생각이 들지만 확증이 없다) 이 지역에는 그루지아와 터키를 비롯하여 이라크와 쿠웨이트 등 아라비아 반도의 거의 모든 나라와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과 접경인 키르키스탄과 타지키스탄까지 미군기지가 있다.

새로운 자원의 보고 아프리카에는 과거 식민지를 거느리던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있다. 미국은 아프리카주변에 여러 함대를 배치하고 있는 한편 나토의 주둔지에 미군을 파견하고, 석유항인 기니만에 새 기지를 건설 중이다. 이 지역에 새로이 뛰어든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주요 석유 수입국인 앙골라, 수단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며, 아프리카 전역에 공격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몽골에 진입했다. 미국은 몽골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2000여명의 미군과 첨단 군사장비, 경제원조와 자원봉사단을 파견하였다. 몽골이 130명을 파병한 대가로 그 보상 규모가 너무 커 보인다. 다른 목적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대개 몽골이나 중앙아시아가 무슨 무주공산이나 되는 것 마냥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큰 착각일 것이다. 이미 미국과 일본이 많은 부분 선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거창하게 허황된 그림만 그릴 것이 아니고 좀 더 세밀한 계획 하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중앙아시아나 몽골과 통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 통행세를 물어야 하는 장애를 안고 있기도 한 것이다.

세계는, 그리고 너네는...

아시아에는 필리핀, 일본, 한국에 미군기지가 있다. 북한을 방어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기지들이다. 세계는 자원을 중심으로 팽팽 돌아가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대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지리의 구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도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리라.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를 읽고 여러 새로운 사실을 접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운 시간이다. 이 책은 정규교육과정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국제정치의 백과사전이며, 현재 진행형의 지구촌을 알 수 있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사회과부도이다. 하지만 이를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여행기중독자가 장황하게 미군의 주둔지를 늘어놓은 이유는 한반도의 전략적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유행어로 물어보자면,

"미국에게 한반도란?"
"석유는 없는 곳"

북한체제는 굴에 갇힌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양이다. 우리는 궁지에 몰린 그들을 참을성을 가지고 살살 달래서 나오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큰 분란 없이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루고 나면, 이곳의 지정학적 의미도 달라질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권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굴속으로 연기를 피우며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고 약을 올리고 있는 격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걱정되는 일은 언젠가 미국에게 한반도가 귀찮아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때가 되면 어쩌면 미국은 이런 긴장관계를 한 번에 털어내려 마음먹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황새가 아니라 뱁새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뱁새가 황새 꽁무니에 올라타고 얼마간 날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뱁새가 스스로 나는 법을 잊어버린다면 사태는 전적으로 황새 맘먹기에 달려있게 된다. 제발 스스로 나는 법을 포기하지 말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여행자이고 싶지 디아스포라가 되고 싶지는 않다.
출처 : 여행자가 모르는 지도 이면의 세계 - 오마이뉴스

“아 처절한 이 광경!…” 6·25 참상 신문기록 책으로 / 동아일보 / 009-0(6é(

본보 등 1950∼1953년 지면 내달 영인본 출간
정진석 교수 “신문용지 피란 짐에 얹어와 인쇄”

“아 처절한 이 광경! 병든 늙은이들까지 지금 지팡이로 동결한 한강 얼음판 위를 두들기며 남으로 향하고 있고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은 아낙네들이 한 손으로 큰 아기를 잡아당기며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서울 최종열차’, 동아일보 1951년 1월 10일자)

6·25전쟁 1·4후퇴 당시 1월 3일까지 서울에 남아 현장을 지키면서 전란의 참상을 기록한 최흥조 기자의 기사다. 이 기사는 6일 뒤 부산에서 속간된 10일자 2면에 실렸다. 이처럼 6·25전쟁 당시 날아드는 총탄에도 펜을 꺾지 않았던 동아일보의 지면(1950년 10월 4일∼1953년 12월 31일자)이 영인본으로 나온다.


이는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70·사진)가 LG상남언론재단의 의뢰를 받아서 정리한 자료다. LG상남언론재단은 2억 원의 예산을 들여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1953년 말까지 발간된 동아일보를 비롯해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을 ‘6·25전쟁 기간 4대신문 영인본’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정 교수는 “동아일보는 1·4후퇴 6일 뒤인 1월 10일 부산에서 신문을 속간했는데 전쟁 초기 갑작스러운 피란으로 3개월간 신문을 내지 못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산의 민주신보사에 미리 인쇄를 부탁해서 가능했던 일”이라며 “신문 용지 수급도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동아일보 사원들이 서울 을지로 창고에 쌓아둔 용지를 피란 짐에 얹어 가져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번 영인본 작업을 위해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각 신문사가 소장한 신문 제본과 마이크로필름을 수집해 대조했으며 지령이 선명하지 않은 일부 지면의 발행일도 검증했다. 신문마다 700쪽 분량의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세 권씩 내며 국공립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 해외 한국학연구소 등에 배포한다. 정 교수는 LG상남언론재단의 의뢰로 광복 직후부터 5년간 발행된 동아일보 등 4개 일간지의 영인본을 2005년 펴내기도 했다.

“신문은 전쟁뿐 아니라 그날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뉴스를 모두 보도합니다. 역사를 복원하는 1차 사료라는 의미가 크죠. 영인본은 통시적으로 사건의 앞뒤 맥락을 살피거나 같은 날짜의 신문들을 비교할 수 있어 연구에 활용하기에도 수월합니다.”

LG상남언론재단은 6월 18일 오후 6시 반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고에 갇혀있는 '조선의 기록정신' / 동아일보 / 2009-05-29


“세계기록유산 등재 ‘의궤’ 한글번역 겨우 3.3%… 현황 파악도 제대로 안돼”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 의궤. ‘조선 기록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의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전체의 3.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궤를 하루빨리 번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실제 수치로 조사된 것은 처음이다.

○ 박소동 교수, 29일 학술대회 논문 발표

박소동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는 26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된 의궤를 파악해 분석한 결과 의궤는 전체 606종이었으며 이 중 한국어로 번역된 의궤는 20종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을 한국고전번역원이 29일 오후 1시 반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여는 ‘조선왕조의궤 번역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박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의궤는 진연(進宴·나라 경사 때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 가례(嘉禮·왕실 혼례 등의 예식), 종묘(宗廟·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영건(營建·궁궐 등의 건축) 등 70여 분야로 분류가 가능하지만 이 중 1종의 의궤라도 번역된 분야는 11분야에 그쳤다.▶표 참조

가례 분야는 22종 중 영조 때의 가례도감의궤 1종(4.5%), 영건은 22종 중 순조 때의 경희궁 재건축 과정을 기록한 서궐영건도감의궤 1종(4.5%), 종묘는 25종 중 숙종 때의 종묘의궤 1종(4%)만 번역됐다. 박 교수는 “모든 분야의 모든 의궤를 다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분야별, 시대별로 흐름과 변화를 알 수 있는 대표성 있는 의궤가 다 번역돼야 왕실 의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번역 여부와 상관없이 영인본(원본을 사진 등으로 복제한 것)으로 제작해 공개된 의궤도 55종(9.1%)에 불과해 의궤 원본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지는 것으로 박 교수는 분석했다.

○ 원본 영인본 제작도 9% 그쳐

번역본에도 오류가 적지 않게 드러났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정조가 경기 화성에 성을 쌓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일을 정리한 화성성역의궤의 경우 ‘큰 사슬 고리 두 짝을 갖춰’를 ‘대사슬원환양배구(大沙瑟圓環兩排具)’로 표기했으나 번역본은 ‘큰사슬원환양배 갖춤’으로 표현해 ‘두 짝’이라는 뜻으로 쓰인 ‘양배’를 물품명처럼 잘못 썼다.

박 교수는 “국가 기록물에 해당하는 의궤를 종합적인 계획 없이 산발적으로 번역한 탓에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가 1997년 번역한 가례도감의궤가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다시 간행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 ‘의궤총서’로 간행 체계적 연구 필요

의궤의 전체 종수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한 실정이다. 박 교수는 의궤 종수를 606종으로 파악했지만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황에는 833종이 올라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한국사)는 “같은 종의 여러 의궤를 하나로 계산하느냐 책 수대로 세느냐에 따라 종수가 달라지고 규장각과 장서각에도 엄밀히 보면 한 종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중복 소장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위원인 신승운 성균관대 교수(서지학)는 “주제와 시대별 분류 체계를 갖춰 ‘한국의궤총서’로 간행해 세계기록유산에 걸맞은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의궤:

조선시대 왕실의 제사, 혼례, 잔치, 사신 접대, 장례 등 의식의 절차와 내용, 필요 물품 목록과 제작 과정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책. 조선시대에는 사고(史庫)에 보관됐으며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도서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돼 있다.

“조선왕조 의궤는 '불교式' 기록” / 문화일보 / 2009-06-02

우리나라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500여년에 걸쳐 제작된 의궤(儀軌)라는 게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등지에 현재 637종 3000여 책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의궤는 인류의 문화를 계승하는 중요 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조선왕조 의궤’란 명칭으로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조선시대 500여년간 제작된 의궤라는 용어나 형식이 원래 불교에서 기원한 것이란 주장이 나왔다. 신승운(문헌정보학) 성균관대 교수는 지난 5월29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조선왕조 의궤 번역의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열린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 정기학술대회에서 “불교, 특히 밀교(密敎)에서 각종 진언(眞言·축문)의 염송과 공양 등의 절차와 방법을 적은 책을 의궤라 불렀다”며 이같이 밝혔다. 반면 유가 문헌에선 도서의 명칭을 의궤로 명명한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날 학술대회에서 ‘조선 의궤의 분류와 정리방안 연구’를 발표한 신 교수의 설명이다.

아울러 조선왕조 의궤 중 화려한 비단 장정과 고급 종이, 채색을 갖춘 도판 등 어람용(御覽用·임금 열람용) 의궤에서 경배 대상에 대한 불교적 장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행사가 예정되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바탕으로 사전에 절차와 방법을 기록한 의주(儀註)를 작성했으며 사후 보고서용으로 의궤를 만들었다. 의궤는 의주에 따라 진행된 행사에 대한 실제적이고 종합적인 기록이다.

의궤는 어람용 외에도 5곳의 사고(史庫)와 예조 등 담당기관 비치용으로 5~10여부가 만들어졌다. 의궤는 편찬 목적에 따라 ▲행사형 의궤(국장도감의궤 등)와 ▲해당 부서의 전례(典禮) 지침을 수록한 서지형(署志形) 의궤(사직서의궤 등) ▲기록형 의궤(실록청의궤 등) ▲의주(儀註)에 대한 사항만을 기록한 의주형 의궤 등으로 구분된다.

이번 발표에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오례(五禮) 분류 체계를 바탕으로 조선왕조 의궤에 대해 보다 상세한 분류를 시도한 신 교수는 중복된 것을 제외한 조선시대 의궤 622종 941책(12만5444장)을 집대성한 ‘한국의궤집성’(영인본 150책)의 편찬을 제안했다. 또 이 중 중요한 것(영인본 100책 정도)을 골라 번역하면 300책 정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제국주의 비판 관점서 '동해 표기' 홍보해야” / 동아일보 / 2009-06-02

■ 도르멜스 오스트리아 빈대학 한국학과 교수

“1720∼1800년경 대다수의 서양 고지도가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했습니다. ‘일본해’가 확산된 건 1800년 이후입니다. 당시 조선에 비해 개방적이었던 일본을 먼저 접촉한 서양인들의 편의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대한해(大韓海)나 조선해(朝鮮海)였던 바다를 ‘일본 내륙해’로 강요했습니다.”

4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동해 표기와 일본 식민주의의 관계’를 주제로 특강하는 라이너 도르멜스 오스트리아 빈대학 동아시아학연구소 한국학과 교수(52)는 동해 표기 문제는 단순히 서양 고지도에 나타나는 통계를 볼 게 아니라 시기별로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을 받아 3월부터 동해 표기 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서양 고지도에 나타난 동해 표기를 △1720∼1800년 ‘한국해’란 명칭이 대부분을 차지한 기간과 △1800년∼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 직전까지 ‘일본해’가 확산된 기간으로 나눴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한국해가 주류였던 기간은 제외하고, 19세기 초 이후에는 서양 고지도에서 일본 식민주의와는 무관하게 일본해라는 명칭이 압도적으로 사용됐다는 점만 강조한다”고 말했다.

이 시기 일본해란 명칭이 확산된 데에는 서구 중심주의나 편의주의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해를 탐험한 뒤 이를 일본해로 기록한 러시아 해군제독 크루젠스테른의 책(1815년)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면서 유럽인들이 일본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역사적인 맥락을 살피지 않고) 편의에 따라 사용한 셈입니다.”

일본해라는 명칭이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에 대해 그는 “당시 일본은 동해를 ‘일본 내륙해’로 만들려고 했으며 현재 한국인이 일본해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발이 아니라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며 “이런 측면이 국제사회에는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국제수로기구(IHO)가 발간하는 국제표준원칙인 ‘리미츠 오브 오션스 앤드 시즈’에는 현재 동해가 일본해로 단독 표기되어 있다. IHO는 2012년 정례회의를 열어 한국이 요구하는 ‘동해(East Sea)’를 일본해와 병기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도르멜스 교수는 “이 회의를 앞두고 명칭을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동해는 동쪽 바다라는 의미인데 ‘한국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이 ‘한국해’로만 표기하는 데 결사 반대할 테니 일본 사이에 놓인 바다’라는 의미에서 ‘한일 바다(Sea of Korea/Japan)’ 등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요.”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jeudi 28 mai 2009

한불문화상 수상자 / 파리지성 / 2009-05-05

故이성자 화백,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 선정

프랑스에서 한국문화와 예술을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한불 양국의 문화예술인 및 기관에게 수여되는 '한불문화상' (Prix Culturel France-Coree) 수상자가 확정됐다. '한불문화상위원회'(위원장 조일환 주불대사)는 수상자로 재불화가 故 이성자,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 등 3명이 선정됐다고 밝히고 지난 5월5일 BNP 파리바 은행 파리본사에서 거행된 시상식에서 한불문화상을 수여했다.
지난 1999년 창설돼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한불문화상'은 재불 문화예술계 인사, 한국학자, 메세나 기업대표 등으로 구성된 '한불문화상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매년 수상자를 결정하며 각 수상자에게는 5천 유로의 상금이 부여된다. 올해의 메세나 기업은 BNP파리바 은행으로 상금을 비롯, 나폴레옹의 결혼식이 이뤄지기도 했던 역사적인 본사 살롱을 시상식 장소로 후원했다.

"2008 한불문화상" 수상자와
선정이유는 다음과 같다.
故 이성자 : 한국 현대미술을 프랑스에 알리는데 공헌
1918년 진주 생으로 지난 2009년 3월 8일 프랑스 투레트에서 타계. 1세대 재불 한국작가에 해당되는 이성자 화백은 1951년 한국전쟁 중 도불하여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50년대 말부터 에꼴 드 파리의 서정적 추상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화랑인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1964년과 1968년 개인전을 열었다. 대지와 여성, 도시, 음양, 극지로 가는 길, 우주 시리즈를 차례로 전개하면서 50여 년간 수많은 전시를 열었다.
1968년부터 근본적 조형언어로 자연과 조화, 자유를 상징하는 원형을 선택하였으며, 도시, 음양, 천체를 환기시키는 시적인 화면을 만들어 왔다. 60년대, 70년대에는 모자이크 벽화와 타피스트리를 공공 주문으로 제작했다. 최근 전시로는 2003년 남불 발로리스의 마니엘리 미술관 회고전, 2006년 니스시립도서관 목판화 회고전,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여성작가 8인전 등이 있다.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직접 설계한 '은하수' 작업실에서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했던 이 화백은 우주와 모성의 이미지를 화폭에 펼쳤고 음과 양의 조화 등 동양정신을 담아낸 작업으로 프랑스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인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두 차례 문화예술훈장을 받은 바 있다.
한편, 이성자 화백의 작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퐁피두 현대미술관, 파리시립미술관, 낭뜨 보자르 박물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8년에는 경남 진주시에 300여점의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김동호 : 프랑스에 한국영화를 알리는데 기여
1961년 문화공보부를 시작으로 27년간 공직생활을 역임했다. 이후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냈고 1992년에는 예술의 전당 사장에 취임했다. 1992년에는 문화부 차관을 역임한 바 있다. 1996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설, 현재까지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세계 10 대 영화제 중에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부산국제영화제가 꼽힐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특히 아시아의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발굴, 세계에 소개한다는 목표 하에 아시아 감독들의 좋은 프로젝트를 엄선해 왔는데 한국감독으로는 김기덕과 이창동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동호 위원장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는데 2000년에 문화예술훈장 기사장, 2006년엔 파리시 훈장과 도빌시 훈장, 그리고 2007년에는 문화예술훈장 오피시에를 수여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는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는 긴밀한 업무협조를 위해 지난 2000년 자매결연을 맺은 바 있으며, 2009년 도빌영화제에서 "똥파리"와 "추격자" 등 한국영화가 대거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발레리 줄레조(Valérie GELÉZEAU) : 서울의 도시화 연구를 통한 한국사회 소개
프랑스에서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2세대 한국학자로 마른라발레 대학 지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EHESS)에서 한국학 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했으며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대한 연구로 파리4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녀의 논문은 2003년 "Séoul, ville géante, cités radieuses"란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그 해 프랑스 국립지리학회가 수여하는 가르니에상을 수상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2005년에는 국립학술연구원(CNRS)으로부터 동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의 저서는 2007년 "아파트 공화국-불란서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 교양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연구에 그치지 않고 백령도와 같은 접경지역을 대상으로 남북한의 상호인식을 조사하는 등 한반도의 남북한 관계를 다루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특히, 지난 2008년에는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인터페이스"라는 국제학회를 열어 전세계 40여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를 마련한 바 있다.
파리지성>


"한불문화상 2008" 시상식
2009년 5월5일(화) 18시
Siège de BNP Paribas
3 rue d'Antin 75002 Paris
문의 : 주불한국문화원
(01 47 20 83 86 )

Bombe nord-coréenne / Monde Diplomatique / 2009-05-25

La Corée du Nord a annoncé lundi 25 mai avoir procédé à un essai nucléaire souterrain. Selon l’agence officielle, « l’essai va contribuer à garantir notre souveraineté, le socialisme, la paix et la sécurité sur la péninsule coréenne et dans la région ». C’est à la suite d’un tir de fusée le 5 avril, condamné par le Conseil de sécurité de l’ONU " qui a renforcé le régime de sanctions mis en place à l’encontre de Pyongyang en 2006 " que la Corée du Nord avait annoncé son retrait des négociations à six (Russie, Corée du Nord et Corée du Sud, Etats-Unis, Japon et la Chine), l’arrêt de sa coopération avec l’Agence internationale de l’énergie atomique (AIEA) et la réactivation de ses installations nucléaires.

Le Japon a demandé une réunion urgente du Conseil de sécurité, les pays occidentaux se sont déclarés « gravement préoccupés », la Russie s’est dite « inquiète », et l’Inde a jugé l’essai « malheureux ».

Dans son chapitre « Ces conflits qui persistent », L’Atlas du Monde diplomatique propose une double page : « Difficile normalisation entre Washington et Pyongyang ».


Armement, Armement nucléaire, Géopolitique, Nucléaire, Nations unies (ONU), Diplomatie, Asie, Corée du Nord

La démarche suicidaire de Kim Jong-il / Le Point / 2009-05-25

La grande différence entre l'essai nucléaire auquel les Nord-Coréens ont procédé durant la nuit , et celui qui l'avait précédé, le 9 octobre 2006, c'est que cette fois, il n'y a plus de place pour le doute : c'est bien d'un essai réussi dont il s'agit, et non d'un semi-échec, voire même d'un tir conventionnel de centaines de tonnes d'explosifs classiques ! Car les experts étrangers étaient encore incapables, ces derniers mois, de préciser la nature exacte de l'essai de 2006, et même s'il s'était réellement agi d'un tir atomique. La Corée du Nord confirme du coup son statut de problème majeur pour la communauté internationale tout entière , mais surtout pour ses voisins les plus menacés, au premier rang desquels la Corée du Sud et le Japon.

Le nucléaire répond depuis la fin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qui a vu se produire les deux seuls tirs opérationnels de l'histoire contre les villes japonaises d'Hiroshima et de Nagasaki, à une problématique assez simple : cette arme n'est plus aujourd'hui, de facto, utilisable par son détenteur que contre un pays qui la possède également. Elle introduit une forme de rationalité perverse : si tu t'en sers contre moi qui la possède, je te pulvérise en retour. C'est tout le concept de la dissuasion, qui prévaut, par exemple, entre l'Inde et le Pakistan, et qui a fonctionné duré toute la guerre froide entre les États-Unis et l'URSS. Toute chose étant égale par ailleurs, et au-delà des discours provocateurs de son président, c'est à cette position qu'aspire aujourd'hui l'Iran. Posséder l'arme nucléaire ne lui permettrait évidemment pas de s'en servir, sauf à courir à sa propre destruction dans les minutes suivant un tir. C'est ce que l'on a parfois appelé la "fonction égalisatrice de l'atome".

Kim Jong-il, un tyran au bout du rouleau

De ce point de vue, dès lors que même ses possesseurs accessibles à un raisonnement logique ne peuvent que s'interdire de l'utiliser, le discours de la dissuasion possède une certaine cohérence. Le chercheur Bruno Tertrais, de la Fondation pour la recherche stratégique, a produit un très intéressant document sur le sujet, intitulé La Logique de dissuasion est-elle universelle ? . Nous en avions fait une analyse le 16 janvier lors de sa publication. A propos du dirigeant de la Corée du Nord, il écrit : "Le cas des dirigeants appelés à gouverner du seul fait de leur lignée est une exception, mais ils contrôlent rarement d'emblée les leviers de pouvoir : Kim Jong-il a dû agir rationnellement pour consolider son leadership au sein de l'appareil nord-coréen." Sans doute, mais cette apparente capacité à procéder de manière raisonnée pour asseoir son pouvoir signifie-t-elle qu'il en serait de même avant de recourir à l'arme suprême ? Bruno Tertrais rappelle également qu'en 1996, le même Kim Jong-il déclarait qu'il suffirait de 30 % de la population nord-coréenne "pour reconstruire une société victorieuse". En clair : vous pouvez bien tenter de nous raser, notre régime survivra ! Est-ce le discours d'un dirigeant sensé ? Non...

Clairement, cet homme-là n'est pas accessible à un discours de raison. Saignant son peuple à blanc, l'affamant pour que survive la caste des dirigeants, sans doute atteint d'un mal profond que ses récents accidents de santé ont aggravé, Kim Jong-il est un boutefeu qui joue avec les six pays engagés dans les négociations nucléaires avec lui. Sa démarche est suicidaire, et il y a chez lui quelque chose qui ressemble à une forme d'"après moi, le déluge !". Les menaces de sanction n'y feront rien, l'appel au cartésianisme non plus, et encore moins les "attention, ou on va se fâcher !", que l'on entend à Paris.

C'est tout le défi que constitue cet acte délirant d'un tyran au bout du rouleau. Toutes les tentatives pour négocier n'ont abouti à rien, les accords pour conduire la Corée du Nord à une attitude moins provocatrice et plus constructive non plus, et on en vient à penser qu'il faudrait davantage avoir recours aux psychiatres qu'aux diplomates pour comprendre ce problème... ce qui ne voudrait pas dire qu'il serait soluble ! Pour tous les dirigeants du monde, une seule question se pose aujourd'hui : que faire ?

Funérailles nationales pour l'ancien président sud-coréen Roh / Le Point / 2009-05-24

La Corée du Sud organisera des funérailles nationales pour son ancien président Roh Moo-hyun, qui s'est selon toutes vraisemblances suicidé après avoir été impliqué dans un scandale de corruption.

Cette cérémonie, qui devrait avoir lieu vendredi selon les médias sud-coréens, a été décidée dimanche par les autorités et la famille de l'ancien chef de l'Etat.

Roh Moo-hyun, qui était âgé de 62 ans, était harcelé depuis des semaines pour son implication présumée dans un scandale de corruption.

Son corps a été retrouvé samedi au fond d'un ravin sur les pentes du mont Ponghwa, près de son domicile, dans le sud de la Corée du Sud. Il aurait effectué une chute de 20 à 30 mètres.

Les premiers éléments de l'enquête de police confirment la piste du suicide, avancée par des proches de l'ancien président. Dans une note laissée derrière lui, Roh Moo-hyun exprime sa volonté d'être incinéré. Il ajoute que, vivant, il ne serait qu'un fardeau.

"Il est plus souhaitable de l'accompagner d'une manière honorable et courtoise qui convient à un ancien président et de permettre à ceux qui le souhaitent de saluer sa mémoire", indique dans un communiqué Cheon Ho-seon, porte-parole de Roh lorsqu'il était président.

Roh, avocat de formation, avait exercé un mandat de cinq années à la tête de l'Etat sud-coréen, jusqu'en février 2008. Il était revenu récemment à la une de l'actualité en Corée du Sud pour avoir été interrogé par des magistrats dans le cadre d'un vaste scandale de corruption.

Il avait avoué que son épouse avait reçu de l'argent d'un homme d'affaires, jusqu'à 6 millions de dollars, pendant sa présidence et il avait présenté des excuses publiques. Il s'était plaint récemment de l'énorme présence médiatique déployée autour de son domicile.

Cheon Jong-woo et Jon Herskovitz, version française Henri-Pierre André

lundi 25 mai 2009

Les Nord-Coréens ont accès à l'Internet officiel sur leur portable - La Presse Canadienne / 2009-05-22

SEOUL — La Corée du Nord a commencé à offrir à quelques-uns de ses citoyens un service Internet limité sur téléphones portables, selon un site Web officiel.

Pyongyang a élaboré un réseau de téléphonie mobile avec l'aide de l'opérateur égyptien Orascom, opérationnel depuis décembre dernier.

Le service permet aux Nord-Coréens d'accéder à un site Web qui diffuse exclusivement les nouvelles de l'agence officielle KCNA, plus des informations concernant la capitale, Pyongyang, d'après le site gouvernemental Uriminzokkiri.

Uriminzokkiri ne précise pas si l'on peut accéder au site ailleurs qu'à Pyongyang. Une précédente expérience de téléphonie mobile avait brusquement été interrompue en 2004.

D'après le quotidien nord-coréen Choson Sinbo, imprimé à Tokyo, il y aurait 20.000 utilisateurs, parmi lesquels des étrangers. Cependant, un téléphone portable nord-coréen ne permet pas de téléphoner à l'étranger, ni de parler aux étrangers de passage disposant d'un portable.

'촛불'은 정치시장에 유입될 것이다" / 프레시안뉴스 / 2009-05-21

[의제27 '시선']<8>답은, 연합정치 운동이다

필자는 지난 달 프레시안 칼럼(4.16)에서 MB정권의 지지도 상승에 기가 눌려 민주개혁진영의 선거전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에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은 "대중들의 불만이 광범위하게 누적"되어 가고 있으며, "대중들이 MB정권의 저강도 심판에는 당장에라도 기꺼이 동참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 문가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를 움직이는 큰 줄기를 놓치고 현상 변수들만을 조합하여 맥락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정치현상의 이면에 놓여있는 큰 줄기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설령 순간적으로는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오히려 일시적 오류를 통해 자신의 모형을 보강해 나가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실패하는 확률이 적어지게 된다. 바로 큰 줄기를 잡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가 역사적 관점에서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하는 일이다. 오늘은 그와 관련하여 향후 정치정세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대중은 저만큼 앞서나가고 있다

재보선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촛불의 진화 경로에 대한 여러 가지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작년 이맘때부터 한국사회에는 촛불을 놓고 일대 토론이 벌어졌었다. 직접민주주의냐 대의민주주의냐의 이중권력 간의 긴장과 질서에 대한 치열한 논쟁들이 그것이었다. 또 최근에는 촛불이 "'자율적 봉기'이냐, '실체 없는 환상'이냐"라는 논쟁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논쟁들은 여전히 핵심에 근접해 있지 못하다. 대중은 이미 저만큼 앞서 나가고 있는데, 논쟁들은 저만큼 뒤쳐진 곳에서 촛불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촛불은 거세게 타오르며 또 다른 항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헛발질을 한다.

나는 촛불을 '역관계의 정치행위'라는 관점에서 보고 싶다. 2008년의 촛불은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 표출이 제도정치의 모든 방면에서 봉쇄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직까지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으로 남아 있던 '운동'의 공간을 통해 분출되어 나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후 촛불시민들은 엄혹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촛불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헌신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MB정권의 강력한 초동진압과 원천봉쇄 그리고 구속남발 등 초강경정책을 뚫어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MB정권이 평화적 집회와 가두투쟁을 날숨 하나까지 틀어막는 데 집중하고 있는 상황을 우회하여 자신의 요구 표출을 다시 선거정치의 장 속으로 전격 투입시켰다. 혹여나 보수층이 결집하여 자신들의 거사가 무산될까봐 투표일의 마지막 순간까지 숨을 죽이며 속속 투표장으로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에서 최근 재보선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사건의 궤적들은 마치 물줄기가 우회와 후퇴를 반복하면서 전진하듯, 좁은 정치적 공간 속에서 창의적으로 돌파구를 찾아나가는 시민들의 정치역량을 보여준 것이었다.

선거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는 촛불

필자는 작년 한 신문사 주최의 토론회에서 촛불의 동력이 중장기적으로 정치시장-선거시장에 진입해 들어오게 될 것이며, 이것은 양적 누증과정을 거쳐 어느 시점에 제도정치 전반에 대한 정치개혁의 압력으 로 작용하고 아울러 기성 정당구도를 재편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 바 있다. 촛불의 선거시장 유입은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정치집단들 사이의 정책 경쟁과 공론화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정당체제의 재편(realignment)을 둘러싼 경쟁을 촉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MB정권의 시대흐름을 무시한 무리한 권력전략과 그에 따른 반MB심리의 확산은 그 같은 흐름을 예상보다 더 빨리 가속화시키고 있다. 최근 4.29재보선 이후 부쩍 높아진 '연합정치', '반MB전선'과 같은 담론들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그 의미가 훨씬 심오하게 간파되어야 한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정치 및 선거지형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조들이 보인다. 이번 4.29재보선에서 30~40대 유권자들의 참여가 전반적으로 증가하고 투표율 하락추세가 역전되고 있는 현상은 그저 범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시장의 일방독주와 탈정치, 무당파화가 대세를 이루었던 시대적 국면이 종료해 가고, 다시 '정치적인 것'으로의 복귀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한국의 정치상황에도 이미 파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흐름들은 민주개혁세력들에게 아주 유의미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세력임을 너무도 짧고 극명하게 실증해 주고 있다. 가치와 비전을 창조할 수 있는 역량이 제로라는 것, 권력정치 말고는 별다른 지적 자산이 없는 집단이라는 것, 인위적 카르텔 장벽을 만들어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능수능란할 뿐 헤게모니적 지배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 새로운 보수세대의 리더십 동력이 벌써 고갈되어 버렸다는 것 등은 한국 보수의 미래를 암울하게 한다. 그에 비하면 민주개혁세력들은 확실히 더 많은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비록 민주화 1세대와 2세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2진들이 새로운 동력을 충전하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민주개혁세력들이 보수세력에 비해 훨씬 더 미래사회에 친화적인 가치와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의 위기'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민주개혁세력들의 현주소는 아직은 지리멸렬 그 자체이다. 한국사회가 나날이 공동체 붕괴의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는 상황인데도 민주개혁세력은 아직 어떤 해결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개혁세력의 위기의 본질은 한국사회 위기의 일부분으로서 '정치의 위기'이다.

한국사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집단적 삶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시민의 헌법적 권리, 즉 '공공성의 위기'이며, 그것의 핵심에는 '정치의 위기'가 놓여 있다. 박명림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양극화에 의한 시민적 삶의 피폐화에 대해 사회적 대응을 어렵게 만들어 온 것은 공동가치나 정신이라고 할 합의나 합의체계가 부재하다는 현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정치 역량은 정치의 존재 이유를 의문시할 정도로 소진되어 가고 있다.

민 주개혁세력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도 바로 그 같은 '정치의 내면적 위기'에 다름 아니다. 주지하듯이 지난 시기에 민주개혁세력은 분열과 파편화를 극복하지 못해왔고, 그것은 한국사회에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정치구도를 생산해 냄으로써 민주세력의 총체적 위기를 야기했다. 지난 시기 이라크파병, 비정규직해법, 한미FTA 등 거의 모든 주요 의제마다에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혹은 진보신당)이 분열하고, 민주당 내에서도 개혁파와 실용파가 분열하고, 나아가 지지 세력까지가 양분되어 왔다. 그런 분열의 와중에서 민주세력의 힘은 분산되고 소진되었으며, 보수 세력은 그런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민주개혁세력은 공멸하고 말았다.

정치의 생명은 기본적으로 '힘의 균형'에 있다. 정치발전의 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균형정치(balance politics)'가 잘 작동하게 된다. 힘이 한쪽으로 과도하게 쏠리게 되면 적절한 타이밍에 정권교체가 일어나든지, 아니면 민주적 권력분점이 일어나든지, 또 아니면 정당 간 연합의 재편성이 일어나서 균형을 회복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는 균형이 한 번 깨지자 걷잡을 수 없는 불균형의 심화 재생산이 전개되었다. 특히 민주개혁세력은 양당체제가 도괴되어 0.5세력으로 전락했음에도 또 다시 0.4와 0.1로 분열되고, 0.1이 다시 분열되었던 것이다.

딜레마 구조를 깨뜨리기 위한 '연합정치'

지금 민주개혁세력들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민주당은 호가호위 구조에 안주하여 좁쌀만한 기득권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다. 그래서 지금 민주당은 고사의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치적 개방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 고 있는데, 이들이 자력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보정치세력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낡은 계급, 통일의 이데올로기와 공허한 반신자유주의 타령을 전가의 보도인 양 붙든 채 지적 나태에 빠져 있다. 민주당이 망하면 진보세력이 약진할 것이라는 철부지 같은 몽상을 아직도 수년째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 진보적 시민단체세력들은 알맹이 없는 도덕적 오만을 현실정치에 그대로 투영시키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실정치에는 진출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는데,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주요한 정치 전략이 되고 있다. 요컨대 민주개혁세력들 모두가 각각의 개별적 자구책만으로는 탈출하기 힘든 딜레마 상태에 갇혀있다.

연합정치는 바로 그 같은 딜레마 구조를 깨드리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다. 그것은 현재의 경직된 판을 흔들어 현상유지 구조를 깨고, 인적·물적·정치적 자원의 효율적 배치를 통해 쇄신의 동력을 창출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것은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보다 유연하게 협력하고 경쟁하는 방법을 터득케 함으로써 민주개혁세력의 정치적 역량을 가일층 강화시킬 것이다.

또 한 연합정치는 현재 민주개혁세력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과제인 '리더십 복원'이라는 과제와 긴밀하게 결합될 수 있다. 리더십 복원은 단순히 어떤 탁월한 개인 지도자의 출현과정이 아니다. 리더십은 절실한 필요와 갈망을 기반으로 세력과 그룹에 의해 창조되는 '시스템'이다. 현 단계에서 리더십 복원의 핵심은 정치지도자 후보군들이 현재는 자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잠재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하고도 생산적인 경쟁과 보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내부의 리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 리그는 어떤 단일정파들만으로 구성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연합정치운동체'를 제안한다

지방선거에서부터 멋진 연합정치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 밑으로부터 정책협약을 만들어내고 그 기준에 맞는 후보를 만들어 내고 공동으로 선거운동을 기획하는 것을 통해 참여, 토론, 협상, 협력, 경쟁의 정치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전국 및 중앙단위 수준의 리그까지가 만들어지고, 민주세력 내부의 노선과 정책 차이도 그 과정을 통해서 검증해 나간다면, 지금까지의 관념적이고 진영론적인 대립의 폐해를 극복하는 데에도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주세력 전체를 아우르는 구심점이 발견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시대적 요구에 대한 자신의 좌표를 훨씬 분명하게 이해하면서 하나 둘씩 솟아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연합정치가 단순히 보수진영에 맞서기 위한 진영의 무기만은 아니다. 정치선진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개혁의 목표는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토론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정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추구를 위한 극한적 대립이 반복적으로 재생될 수 있는 유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 연합정치는 그 같은 정치개혁의 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연합정치는 합의민주주의를 강화하여 토론과 협상의 정치문화를 촉진한다. 둘째, 연합정치는 국회가 외부의 권력개입에 휘둘리지 않고 자율성을 제고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연합정치는 패권적 정당문화를 지양하고 정당의 기능과 역할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기여한다. 넷째, 연합정치는 대통령과 여당이 한 배를 타고 가는 식의 정국운영을 개선하여 온건다당제식의 대통령과 여당이 각각 자율성을 갖는 관계로 정립이 이루어져 대통령제 본래의 기능인 삼권분립의 의미를 강화시키고 동시에 여야 정쟁구도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요컨대 연합정치는 민주개혁세력의 내부의제의 차이 극복에 유용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선진화의 중요한 수단이다.

연합정치는 시민사회에서부터 정권 차원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에서 전개되는 극히 보편적인 정치행위이다. 연합정치라는 선진적 정치수단을 정치개혁과 쇄신의 수단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많다. 지금부터 연합정치운동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현실적으로 조직하는 연합정치운동체를 만들자.

고원 상지대 학술연구교수

식민지 일본어교과서 번역한 교수들 - 연합뉴스 / 2009-05-20

(광주=연합뉴스) 송형일 기자 = 일제 식민지 때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아동 교육을 위해 편찬했던 일본어 입문 교과서가 전남대 등 지역 교수들에 의해 번역, 발간됐다.

주인공들은 전남대 김순전, 정승운 교수와 전주대 박장경, 광주대 김현석 교수 등 4명.

김 교수 등은 최근 '조선총독부 제1기 초등학교 일본어독본' (제이앤씨刊) 번역본을 선보였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 일본어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고찰할 수 있는 자료로 일본의 식민지정치, 조선총독부의 정책, 학무국의 교육 제도와 교과서 편찬 등을 잘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어 교육을 동화(同化)정책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당시 한국 근대화 과정에 스며 있는 일본문화의 양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이 책의 대표적인 특징은 ‘띄어쓰기’를 허용했다는 점인데 본래 일본어는 띄어쓰기가 없지만 모국어(母國語)를 달리해 처음으로 일본어를 접하는 조선 아동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또 이 책이 활용됐던 1910년대에는 역사, 지리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이 일본어 교과서에는 역사, 신화, 설화 인물, 천황, 인명,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 등이 많이 포함된 점도 특징이다.

이 밖에도 조선총독부는 박혁거세나 석탈해 등 신라왕들이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는 등 역사를 끊임없이 조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순전 교수는 19일 "일본 지도자의 끊임없는 과거 회귀 발언과 망언, 그리고 일본 신보수주의자와 뜻을 같이하는 한국 내 일부 우익인사 발언은 모두 이 일본어 교육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며 "그들의 교육과정을 자세히 분석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nicepen@yna.co.kr

美 중.고교 교과서에 한국사 대폭 반영/- 연합뉴스 / 2009-05-21


美 교과서에 한국사 대폭 반영
사진은 캘리포니아주정부에 제출한 미국 교과서 한국 역사 내용 개정 청원서.

캘리포니아주 내년부터 사회.역사교과서 개편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김성용 특파원 =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고교 교과서에 한국의 문화적 역량과 일본에 끼친 영향, 한국의 현대 경제 발전사 등이 대폭 반영돼 2010년 가을 학기부터 미국 학생들이 배우게 될 전망이다.

현재 미국 중고교 사회ㆍ역사 교과서 내용 중 한국사 부분은 6.25 전쟁에 관한 간략한 기술이 거의 전부였으나 미국 주정부의 교과서 개편 작업을 통해 고대 일본에 대한 한국의 문화 전수,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사 부분 등이 처음으로 크게 반영될 예정이다.

20일 미국 현지 공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 교육부는 최근 중고교 교과서 내용의 기본 골격과 방향을 결정하는 프레임워크(FRAMEWORKㆍ교과 지침서) 실무위원회 회의를 통해 한국사를 대폭 반영하는 내용의 교과 지침서 초안을 마련, 막바지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주정부가 최근 마련한 `교과 지침서' 초안은 고대사 부문에서 `한국의 도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동아시아 사상과 문물을 한국이 일본에 전수, 영향을 미쳤다', `한국 이민자가 일본에 농업을 전파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사 부문의 본문과 부록 등에는 한국이 1980-90년대 일본과 중국, 싱가포르 등과 함께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표적인 국가로 소개되고 첨단 정보기술(IT)의 상징인 애플의 아이팟이 한국과 대만산 부품의 조립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는 설명이 들어 있다.

또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발전시킨 대표 국가로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등과 함께 소개되기도 한다.

공관 관계자는 이번 주정부의 교과 과정 개편 작업을 통해 미국 중학교 과정인 7학년과 고교 과정인 10-12학년 사회ㆍ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사 부분이 6차례 이상 처음 소개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 이지윤 영사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마련한 프레임워크 초안은 한국이 일본에 사상과 문물을 전수해 줬고 한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며 "미국 교과서에 거의 전무했던 한국사 부분이 대폭 반영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전직 교사인 메리 코너 씨,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한국학 연구소 존 던컨 교수 등 미국 학계 인사들은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왜 한국인가'(WHY KOREA) 제하의 청원서를 직접 제출하고 프레임워크 실무위원회에 참석, 한국사 기술의 필요성과 핵심 주제 등을 제시하며 초안 내용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코너씨는 역사 담당 교사 출신으로 `교사를 위한 한국 아카데미'(KAFE)를 설립, 미국 내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있는 인사로 LA 인근 산마리노에 살고 있으며 최근 주정부 청사가 위치한 새크라멘토를 수시로 오가며 미국 교과서 개정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청원서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 ▲한국의 지리 ▲한국의 혁신적 문화 ▲한국 경제와 IT 강국의 면모 ▲ 한국과 캘리포니아 관계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모델로서의 한국 ▲경제 리더로서의 한국의 중요성 등을 미국 교과서에 반영토록 요청했다.

프레임워크 실무위원회는 6월 4일 마지막 회의를 통해 초안 내용을 확정할 예정이며 주정부 커리큘럼위원회 등은 초안을 근거로 공청회 등을 거쳐 내년 1월까지 최종 골격을 결정한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주요 교과목(K-12) 별로 6-8년마다 개정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주정부가 이번에 마련하는 교육 지침서는 교과서 담당 출판사에 전달돼 한국사 개정 내용을 집필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김신옥 한국교육원장은 "이번 교과서 개편 작업 과정에서 미국인 전ㆍ현직 교사나 교수 등이 한국사를 바로 알리자는 개정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LA와 샌프란시스코 등 우리 공관도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왔다"고 말했다.

ksy@yna.co.kr

Pyongyang annule des contrats avec Séoul / Le Figaro / 2009-05-15

La Corée du Nord a annoncé aujourd'hui l'annulation de tous ses contrats avec la centaine de sociétés sud-coréennes à Kaesong, un parc industriel frontalier, financé par Séoul, censé symboliser la réconciliation des deux Corées.

"Nous déclarons caducs tous les contrats sur le complexe de Kaesong", a indiqué dans un communiqué une agence gouvernementale chargée de la gestion du site. "Le futur de Kaesong dépend entièrement de l'attitude de la Corée du Sud", ajoute le texte.

Financé par Séoul et ouvert en 2005, le parc de Kaesong emploie plus de 38.000 Nord-Coréens travaillant pour le compte de 101 sociétés du Sud qui génèrent chaque mois des millions de dollars en biens manufacturés (habits, chaussures, sacs, ustensiles de cuisine etc.).

Séoul a investi quelque 548 millions de dollars dans ce projet depuis le début de la construction du site en 2002.
Depuis plusieurs mois, les incidents s'y multiplient et Pyongyang ferme régulièrement sa frontière aux employés sudistes alors que les relations intercoréennes sont au plus bas.

Le 30 mars, un employé sud-coréen qui aurait critiqué le régime nord-coréen a été placé en détention par les autorités de Pyongyang à Kaesong où les autorités sud-coréennes n'ont pu avoir accès à leur ressortissant.
Le dialogue entre les deux voisins, toujours officiellement en état de guerre depuis le sanglant conflit de 1950-53, s'est détérioré depuis l'arrivée au pouvoir en février 2008 du président sud-coréen Lee Myung-bak qualifié de "traître" par le régime nord-coréen.

Rompant avec la ligne conciliante de ses prédécesseurs, M. Lee prône une ligne ferme envers le Nord et soumet notamment l'aide de son pays à des progrès tangibles dans le processus de dénucléarisation.
Ces négociations à six pays (deux Corées, Etats-Unis, Chine, Japon et Russie) sont dans l'impasse depuis des mois en raison de désaccords sur la vérification du démantèlement

황석영 또 "MB는 중도실용... 현 정부는 중도 아냐" 출처 : 황석영 또 "MB는 중도실용... 현 정부는 중도 아냐" / 오마이뉴스 / 2009-05-14

귀국 기내 간담회...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이행에 대한 강력한 소망 있다"

"이명박 젇부에 큰 틀에서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혀 논란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진보적 소설가 황석영씨가 재차 같은 의견을 밝혔다.

황씨는 14일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2개국 순방길에 동행한 뒤 귀국하는 특별기 안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명박 대통령은 중도실용"이라면서 "개인적으로 사담을 나눈 적이 있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대북관계로 볼 때 전향적으로 열려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중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고언도 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중도실용주의 노선이 확실하게 관철되면 다음에 훨씬 더 선진적인 정권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현 정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시끄럽다.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고 하셨는데'라는 질문에 대해, 황씨는 "저는 개인적으로 내년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가 과거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풀렸으면 좋겠고, 한반도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서 "현 정부가 지혜롭게 헤쳐 나가길 바라는 것이고, 그때까지 희망을 가져보려고 한다"고 답했다. 자신의 '변신'이 악화일로인 남북관계를 푸는 데 역할을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황씨는 전두환 정권 시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통해 1980년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고발했다. 또 1989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7회 만났고 이 때문에 4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으며, 2007년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의 비상시국선언까지 주도했었다. 하지만 최근 황씨가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면서 이 대통령을 긍정평가하고 나서자 '변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큰 파장이 일고 있다.

다음은 기내인터뷰 문답 전문.

"중도실용을 선언하고 출발했는데 꼬이면서 촛불시위를 하면서 그런 것을 견지하면서 실제 정치에서 펴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 같죠. 앞으로 좀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중도실용을 제대로 못 보여줬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런 얘기죠."

- 이 정권이 보수우익이라는 규정이 있는데?

"처음에 정책적인 면에서 나올 때, 말하자면 과거 10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을 너무 표가 나게 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에 했던 것 중에 좋은 것은 끌어안고 나갔어야 하는데 아쉬운 점이 있는 거죠. 제가 현 정부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는 건데, 앞으로 중도실용주의 노선이 확실하게 관철되면 다음에 훨씬 더 선진적인 정권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 정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 지금은 중도가 아닌가요?

"아직은 중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라고 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고언도 드릴 생각입니다."

- 대통령이 중도실용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사담을 나눈 적이 있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대북관계로 볼 때 전향적으로 열려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중도실용을 대통령 개인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런 강력한 생각을 가진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 촛불시위 때문에 못 했다는 건가요?

"촛불시위 때문에 안 됐다기보다는 양쪽이 다 맞물려 있는 거죠."

- 서울에서 시끄럽습니다,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내년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가 과거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풀렸으면 좋겠고, 한반도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 정부가 지혜롭게 헤쳐 나가길 바라는 거죠. 그때까지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 어떻게 수행단에 참여하게 됐나요?

"대통령이 가자고 개인적으로 권유해서 민간인 손님으로 참여했는데,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문화인까지 우리를 감성적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 문화적 친근성을 드러내고 친척인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꿈꾸는 알타이 중심의 동북아 협력 체제를 꾸릴 수 있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다면 남북분단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 중도실용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수정해야 합니까?

"내가 정치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회비판 세력 등의 민주적 권력,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더 많이 주어져서 정부가 갖는 역할을 분담해서 시민정치 세력이 올라와 같이 협력하고 타협했으면 합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정부가 자기 선택을 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수행하면서 본 대통령은 어떠셨나요?

"대단히, CEO 출신이라 적극적이고, 상대방도 그랬지만 보기에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통령이 문화유적 안내자로 가는 곳마다 해설하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파격적인 행보는 우리 대통령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점이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가 아직 가지고 있는 여러 약점 중 하나인데요, 제가 농담 삼아 정치는 모범생들이 하는 게 아니라 야간부가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모범생들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돼야 선진정치라고 하겠죠."(이명박 대통령이 상고 야간부 출신임을 빗댄 말)

- 민주노동당에 대해선?

"제일 섭섭한 것은 진보연합과 노동당이 분열된 게 안타깝습니다. 왜 한국사회의 중도를 얘기하게 됐냐면 한쪽은 우편향이 너무 심하고, 좌편향이라고 해도 고집스럽긴 하지만 서구적 의미에서 좌파인가 하면 의심스럽거든요. 양측이 모두 수평이동을 해야 합니다. 사민주의나 노동조합이나 이런 걸로 판단하기에는 한국 사회가 첨예한 정책적 가치를 주고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황방열

[사설] 황석영씨의 左派 비판과 中道 선언 / 쿠키뉴스 / 2009-05-14

문화계 좌파 세력의 좌장 격인 소설가 황석영씨가 그제 카자흐스탄에서 대통령 수행기자들에게 국내 좌파 운동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황씨가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따라나선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 이번에는 아예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면서 자신의 달라진 현실 인식을 개진했다.

그는 '한국의 좌파는 핀란드의 보수 같다'는 국내 체류 핀란드인의 말을 인용하고, 앞 정권에 대해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체결 등을 봤을 때 그게 어디 좌파 정권이냐"고 비판했다. 또 "좌파는 리버럴해야 하는데,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독재타도나 민주화운동을 억압당했던 관행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한국 좌파가 제대로 된 좌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좌파의 활로에 대한 처방을 내놓는 대신 자신이 2005년부터 중도론자라면서 현 정부에 "큰 틀에서 동참해서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현 정부가 "보수 우익이 아니라 중도실용 정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황씨는 과거 여러 차례 밀입북하고 북한으로부터 달러를 받아 쓴 죄로 수형 생활을 했다. 석방 후에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고 지난 대선에서는 반 이명박 진영에 섰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비정규직이며 청년실업 등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해 "고전적 이론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며 좌파 이론을 버리고 중도실용의 방법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두고 노회한 문사의 달변이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황씨는 민족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 몸을 던졌다. 그런 경험이 세월의 발효를 거쳐 숙성되면서 깨달음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통사회와 달리 현대 사회에선 노인이 청년의 공박을 받게 마련이다. 황씨의 발언을 두고 좌파 진영의 후배 세대에선 벌써 '변절' '전향' 운운하며 욕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황씨보다 더 짙게 고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체험이 부족하면 관념이 앞장서게 마련이다. 선배 세대가 비싼 수업료를 내고 체득한 식견과 통찰에 귀를 기울여 보는 상식이 좌파에게 절실한 때다.

미네르바 "한국사회에 환멸..이민가고 싶다" / 연합뉴스 / 2009-05-17

"한국 사회의 광기를 목격했다. 한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 이민을 가고 싶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터넷 논객 박대성(31) 씨가 최근 뉴욕타임스(NYT) 기자를 만나 한 말이다.

뉴욕타임스는 16일자에서 '온라인 금융 예언자, 현실 사회에서 비방받다'라는 기사를 싣고 신원이 밝혀진 이후 현실세계에서 비판받고 있는 박씨의 심경 고백을 전하면서 '미네르바 사태'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명했다.

온라인 살해 협박과 기자들을 피해 현재 서울 모처에 은신 중인 박씨는 지난주 NYT 기자를 만나 자신이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10년 전 한국사회가 겪은 외환위기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본격화한 1998년, 친구의 부모님이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을 목격한 후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학을 독학해 오던 중, 환율이 치솟는 것을 보고 외국 유학 중인 자녀를 둔 사람들,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모호한 언어로 경제 전망을 밝히는 오프라인 분석가들과는 달리, 나는 정부와 우리 사회의 병폐를 비판할 때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서 "익명성은 인터넷 소통의 기반이자 촉진제"라고 덧붙였다.

자신에 대해 제기된 허위 경력 논란과 관련, 박씨는 "만약 내가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면 사람들은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며, 사법 당국에 체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면서 "현실 세계로 나온 이후에는 벽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게 남은 건 사람들의 비난밖에 없다. 처음엔 보수주의자들이 나를 공격했고, 나를 지지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내가 그들의 대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나를 버렸다"면서 "내가 한 일을 후회하고 있다. 다시는 한국에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같은 박씨의 인터뷰 내용을 전하면서 '미네르바 사태'가 한국 사회의 온ㆍ오프라인 공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선동적이고 거친 표현도 자주 등장할 만큼 '표현의 자유'가 중시되고 있는데 미네르바의 등장을 계기로 온ㆍ오프라인 문화가 충돌하면서 이 같은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또 한국 사회가 인터넷 사용률이 매우 높은 사회이면서 정파간 대립도 심한 곳이어서 '미네르바 사건'의 파장이 더 컸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연정 기자 = rainmaker@yna.co.kr

미네르바 오마이뉴스도 외면했다 / 독립신문 / 2009-05-18

네티즌 "착각도 유분수... 문제는 거짓말" 비판글 이어져

‘미네르바’ 박대성(31)씨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좌우대립의 희생양’, ‘학벌사회의 희생양’임을 주장해 네티즌으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16일(현지시간) ´온라인 금융 예언자, 현실 사회에서 비방받다´라는 제목으로, 박씨의 신원이 밝혀진 이후 비판받고 있는 그의 심경 고백을 전하며 ´미네르바 사태´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NYT에 따르면 박씨는 “(한국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화가 난다”며 "한국 사회의 광기(madness)를 봤으며, 더 이상 한국에 살고 싶지 않고, 이민을 원한다"고 밝혔다.

박씨는 인터뷰에서 “10년 전 한국 사회가 겪은 외환위기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선의’에서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며 “모호한 언어로 경제 전망을 하는 분석가와 달리 나는 정부와 우리 사회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정부는 나를 테러리스트처럼 취급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에게 제기된 허위학력 논란과 관련해서도 “만약 내가 명문대를 졸업했다면 사람들은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법 당국에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현실 세계로 나온 이후에는 벽에 부딪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처음에는 보수주의자들이 나를 공격했고, 나를 지지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내가 그들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나를 버렸다”며 “내게 남은 건 비난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박씨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고 있으며 다시는 온라인에 글을 올리지 않겠다”고도 했다.

NYT는 이 같은 박씨의 인터뷰 내용을 전하면서 ´미네르바 사태´가 한국 사회의 온ㆍ오프라인 공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드러냈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미네르바가 욕먹는 건 학벌이 아닌 거짓말 때문” 등의 비판글을 올리며 박씨를 성토하고 있다.

포털 네이버의 아이디 ‘drreality’를 쓰는 네티즌은 “대성씨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며 “사람들이 공고르바라고 욕하고 당신 정체성 의심하는 건 박대성씨가 공고, 전문대 나와서 그런게 아니라 처음부터 구라를 쳤기(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짜증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차라리 본인 이력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수백권 경제서 혼자 독학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면 이렇게 비웃음 사지 않았을 거다. 백수가 죽을죄도 아니고”라면서 “그리고 한국사회의 광기라고 표현했는데, 자기 일에 치여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박씨에게 관심 자체가 없다. 미네르바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 정치인들과 인터넷 논객한테 찌질대는 정부, 하루 종일 인터넷만 하는 폐인들, 일부 단체들의 광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디 ‘vober’는 “불쌍한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다음+오마이뉴스한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다 팽당한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면서 “다음은 미네르바가 잡혔을 때 이미 그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다. 즉 이미 미네르바가 비밀자금으로 한국을 날려버릴 수 있는 고구마 굽는 노인네가 아니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 글을 메인에 올려가면서 낚시질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마이뉴스도 감옥에 갇힌 미네르바가 풀려나면 경제전문 기자로 채용하겠다고 했다가 무죄로 풀려난 뒤 인터뷰 해보고 바로 외면했다”고 꼬집었다.

조선일보의 아이디 ‘nabasa1’는 “박대성씨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당신이 월가에서 종사한 적이 있는 나이 지긋한 금융인이라고 했던 부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당신은 이미 그런 사회를 인정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명문대 출신이었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달랐을 것이라고 주장한 박씨를 비판했다.

중앙일보의 ‘graycat’도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 하에서 자기의 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거짓 사실을 유포하는 것은 나쁘며, 이것은 ´표현의 자유´로 감싸줄 것이 아니다”며 “미네르바는 명백히 허위 사실을 유포했고, 선동했다(또한 선동에 이용당했다.) 이자 가 아고라 등에 기고한 글은 반정부적인 것이 많아 이용해 먹기 좋은 자료였기에 한껏 띄워준 것이고 나중에 드러난 정체가 실망스럽고 분위기 바뀌니 버린 것”이라며 비판했다.

[박주연 기자] phjmy9757@naver.com

[Cover Story] u시티 개발 열풍 - 조선일보 / 2009-05-15

사람·사물·센서 하나로… 미래도시 'u시티'가 온다

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를 이끄는 존 체임버스 시스코 시스템즈 회장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 깜짝 놀랄 만한 계획을 발표했다. 송도 국제업무단지에 'u(ubiquitous) 시티' 관련 글로벌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투자하는 액수는 5년간 20억달러(2조4860억원)에 이른다.

또 다른 글로벌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GE·오티스엘리베이터도 송도 국제업무단지 u시티 개발을 맡은 게일(Gale) 인터내셔널과 MOU(양해각서)를 맺고 구체적인 사업내용을 협의 중이다.

u시티가 송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통신망 구축을 담당할 KT와 SK텔레콤은 송도뿐 아니라 판교·동탄·파주와 같은 신도시 개발과정에서 u시티 건설에 참여한다고 속속 발표했다. 서울·부산·안양 등 30여개 지방자치단체들도 도시 기능을 업그레이드한다는 취지로 u시티를 내세우고 있다.

u 시티가 도시 개발과정에서 거대한 아이콘(icon)으로 뜨고 있다. u시티란 모든 사물과 사람이 센서와 네트워크로 연결돼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구현된 도시를 말한다. 한마디로 IT인프라를 이용해 생활편의성을 높인 미래도시다. u시티가 뭐기에 이토록 관심을 받는 것일까?

◆시스코·MS 등 다국적 IT기업이 눈독 들이는 송도 국제업무단지

571 만㎡(170만평) 규모로 예정된 송도 국제업무단지. 허허벌판 속에 가장 먼저 입주를 시작한 '포스코 더 퍼스트 월드' 주상복합건물을 방문했다. 이곳을 안내한 u헬스 시스템 기업 유라클 이재학 과장이 집 안에 설치된 혈압·체성분 측정기에 올라섰다. 곧바로 거실 TV화면에 수치가 나온다. 처음 잰 날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막대그래프로도 볼 수 있다. 이 과장은 "이 수치가 자동으로 단지 내 헬스케어 센터에도 입력된다"고 설명했다. 헬스케어 센터는 입주민의 건강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입주민의 건강상담을 진행한다.

이곳 주상복합 입주민들은 입주자 전용 차량 내비게이터를 한대씩 받았다. 대전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집 가스 밸브가 잠겨 있는지 궁금하다면 내비게이터를 통해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가스 밸브를 잠글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집 안 조명이 켜져 있는지 체크하고 원격 제어할 수 있다.

게 일 인터내셔널 이상민 부장은 "이건 아직 맛보기"라고 말했다. 계획대로라면 가정에 설치된 단말기를 통해 원격으로 엘리베이터를 호출할 수 있다. 외출할 경우 집을 나서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주상복합 근처 버스 도착시각도 집 안에서 점검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업무단지 일부 빌딩에는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여유 주차 공간으로 유도하는 시스템을 구상 중이다.

u 시티의 클라이맥스는 도시를 구성하는 빌딩 전체를 제어하는 중앙관제센터다. 송도의 경우 LG CNS·시스코·KT 같은 IT회사들이 주축이 될 예정이다. 예컨대 어느 빌딩에서 가스누출이나 화재가 일어날 경우 중앙관제센터에서 실시간으로 발견하고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빌딩 혹은 아파트 가구마다 에너지(가스·전기·수도)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유무선 통합(FMC)망 구축도 진행될 예정이다. KT가 책임지는 것으로, 건물 내부의 인터넷망과 이동통신망을 연동한 유무선 통합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말한다. 휴대폰 한 대로 실내에서는 인터넷전화로 외부에서는 이동전화로 이용이 가능하다.

송도 u시티는 오는 2015년 완공 예정이다. 송도 국제업무단지 시스템 통합관리업체인 유라이프 허정화 이사는 "일본 오사카·스페인 사라고사·핀란드 헬싱키 등지에서 u시티를 준비 중이지만 IT인프라만큼은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지능화되는 교통시스템

지 방자치단체 지능형 교통시스템은 안양시가 대표적이다. 안양시청 7층에 지난 3월부터 u통합상황실이 생겼다. IT서비스업체 LG CNS가 기존의 버스정보시스템과 방범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한 대민(對民)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통합상황실은 안양시 주요 도로에 깔린 100만 화소 이상 디지털 CCTV 카메라·가변정보표지판(운전자에게 정체구간이나 사고지점 등 교통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정보판)·교통정보 수집제공 장치·첨단신호제어시스템 등을 총괄한다. CCTV와 검지기를 통해 수집된 교통량 정보를 기반으로 신호주기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첨단신호 제어시스템도 갖췄다.

교통정보가 바로 방범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내 221개 소 감시망(CCTV)을 통해 뺑소니와 같은 범죄 도발 상황을 자동으로 인식하고 추적한다.

안양시의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주관하는 LG CNS의 u엔지니어링사업본부장 김도현 부사장은 "교통과 관련한 사회적인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절감할 수 있을 때까지 IT기술이 끊임없이 접목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난·재해·환경오염 방지 시스템도 IT인프라와 접목

부산시 의 경우 풍수해·지진·해일정보 예보·경보, 취약지역 CCTV, 터널모니터링과 같은 방재관련 시스템과 인프라를 통합하는 관제센터를 구축 중이다. 침수피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동래구·북구·해운대구의 배수펌프장 3개소에 무선인터넷을 적용한 원격관리시스템을 시범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울산 태화강 환경보호를 위해 도입한 u시티 기술도 눈여겨볼 만하다. 울산시는 2007년부터 수질·수위·유속 측정을 통해 태화강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GIS(지리정보시스템·지리공간 데이터를 활용하는 시스템)·네트워크 카메라·무선네트워크 기술 등이 적용됐다. 이를테면 태화강 주변에 설치된 GIS기반 네트워크 카메라를 통해 수질·대기오염 경보 발령 시 오염원에 대한 영상추적을 하는 식이다.

◆u시티란 말에 실체가 없다?

IT 인프라가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u시티란 말에는 실체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미래의 도시는 IT인프라의 발달로 자연스럽게 중앙집중 관리식으로 변모하는데, 마치 u시티가 지금 세상과 다른 별천지로 그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u시티가 도시 개발 마케팅의 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혹평이다.

임주환 한국디지털케이블 연구원장은 "홈네트워크·빌딩관리·도시인프라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완벽한 u시티 건설은 100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열풍에 휩쓸리기보다 경제성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①BcN(광대역통합망) 현재의 통신망보다 용량이 50배나 커서 인터넷·전화·TV를 하나의 회선으로 이용할 수 있다. u시티의 핵심 인프라다.

②LED정보게시판 종이를 붙이던 지역정보게시판을 LED(발광다이오드)화면으로 바꿨다. 날씨와 뉴스·각종 지역생활정보를 보여준다.

③LBS(위치기반서비스) 이용자의 현재 위치와 상황을 파악해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는 주변의 맛집 정보가 휴대폰으로 들어온다.

④WIBRO(휴대인터넷) WCDMA(3세대이동통신) 유선 환경에서 BcN을 통해 전송한 대용량 콘텐츠를 휴대폰·넷북 등 이용자가 갖고 다니는 휴대형 기기로 보내준다.

⑤CCTV u시티는 고해상도의 CCTV 카메라를 도시 곳곳에 설치해 범죄를 예방하고 교통위반을 단속한다. u시티의 안전을 책임지는 장비다.

⑥USN(유비쿼터스센서네트워크) 도시주변의 각종 센서(감지기)가 측정한 대기(大氣)의 상태와 수질 오염도 등의 정보를 모아서 메인시스템으로 전송해준다.

⑦RFID(전자태그) u시티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의 이름표다. RFID가 붙은 시설물에 다가가면 관련 정보가 자동으로 떠서 편리하다.

⑧GIS(지리정보시스템) 지도 정보를 기반으로 시설물을 관리한다. u시티의 GIS는 3차원 입체 지도 형태여서 맨홀 깊숙한 곳의 시설도 쉽게 관리할 수 있다.

호경업 기자 hok@chosun.com

vendredi 22 mai 2009

[시론] 촛불시위와 인터넷, 그 난장의 정치 / 한겨례 / 2008-06-04

한 달여 계속된 촛불시위가 지난 주말을 계기로 반정부 투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나 15년밖에 못 살았어요"라는 중학생의 구호가 20대와 30대가 외치는 "이명박 아웃"과 "정권 퇴진"으로 바뀌었다. 시위 현장에 가 보았더니 유모차에 탄 갓난아기, 중학생 딸 손을 잡은 엄마와 젊은 아버지, 놀러 나온 듯 즐거운 대학생들까지, 정말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화가 많이 나서 거리로 나선 듯했지만, 웃고 떠들면서 시위를 즐기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신문이나 티브이 뉴스가 정부의 대처 방안, 여야 공방, 시위 진압 장면들만 보여줘서 그런지, 놀이와 정치가 어우러진 현장의 모습이 신기로웠다.
청와대와 경찰 그리고 몇몇 언론은 사태 초기 배후세력(심지어 친북세력까지)을 의심하다가, 자발적 시위가 한 달 이상 지속되고, 전국적으로 30만명도 넘는 시민이 촛불시위에 참여하자, 뭔가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듯하다. 사태가 악화된 원인을 꼽으면서 많은 분석들이 ‘국민과의 소통 실패’와 인터넷(그리고 몇몇 방송 프로그램)의 괴담 유포를 지적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청와대와 내각의 국정홍보기능 강화, 인터넷 사용자에 대한 규제 강화 등등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대응책이 아닐 수 없다.

촛불시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디지털 미디어 활동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탄핵 서명운동을 시작한 다음아고라, 시위 현장을 생중계하는 아프리카와 오마이뉴스, 실시간 글을 쓰고 동영상을 올리고 수백 수천 개씩 댓글이 붙는 블로그들. 여기에 실린 주장과 동영상 그리고 댓글들이 모두 괴담이고 감정의 분출일까. 150만명도 넘는 사람이 서명한 탄핵 사이트 아고라에 가보면 욕지거리, 사실무근, 허황된 주장들이 무수하게 널려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이렇게만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이트에 드나들면서 글을 읽고 쓰고 댓글을 반박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존 저널리즘 소비자와 달리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은 자신을 표출하고 드러낸다. 이를 표출적 공론장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인터넷은 난장이다. 난장에서 춤추고 노는 사람들에게 말의 내용이나 형식보다는 노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사실의 정확성·진실성은 글 자체, 댓글 하나를 통해 규명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이 욕하고 반박하고 주장하면서 사태의 진실성에 다가간다. 한 신문의 보도, 한 방송의 보도는 전문적 식견을 갖춘 기자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지만, 인터넷의 진실은 집단지성과 집단적 참여에 의해 확보된다. 난장에서는 심층보도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를 만들고 퍼뜨리면서 노는 사람들의 놀이터에 가깝다. 이렇게 난장에서 노는 사람들에게 괴담과 유언비어를 유포·선동했다고 구속수사 엄포를 놓으면, 닭장차에 자발적으로 탑승하고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셋째,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를 제도정치 수준에서 이명박 정부의 위기라는 틀에서만 보도하는 기존 저널리즘은 제도정치의 수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민 분노가 표출하는 생활정치와 욕망의 정치를 이해하기 어렵다. 욕망의 정치 입장에서 보면 정부가 고유가 타개책을 내놓지 못한다고 해서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인이 먹는 쇠고기나 내가 먹는 쇠고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다. 인터넷에서는 제도정치가 아닌 생활정치와 욕망의 정치가 더 중요하다.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lundi 18 mai 2009

조선왕릉 40基 세계유산 된다 / 문화일보 / 2009-05-13

조선왕릉 40基 세계유산 된다
유네스코 내달 확정…“왕조 전체 지정 유례없는 일”

서울과 경기, 강원도에 있는 조선시대(1392~1910년) 왕릉 40기를 망라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의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한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을 실사·평가하는 전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최근 유네스코에 제출한 조선왕릉에 대한 평가결과보고서에서 ‘등재권고’로 평가했음을 최종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이 지난해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조선왕릉’은 오는 6월22~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리는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보고 및 승인 절차만을 남겨두게 됐다.

문화재청 김홍동 국제교류과장은 “지금까지 ICOMOS가 등재권고한 유적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거부된 사례가 없다”고 밝혔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최종 결정되면 우리나라는 총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존속된 조선시대 27대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망라한 것으로, 한 왕조의 무덤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총 42기의 조선시대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지난해 세계유산으로 신청됐다.

ICOMOS는 유교적·풍수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릉의 독특한 건축 및 조경양식과 함께 지금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되고 있는 것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한편 ‘조선왕릉’과 함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전남과 경남 일대 공룡화석 유적인 ‘한국의 백악기 공룡해안(Korean Cretaceous Dinosaur Coast)’은 자연유산 실사·평가 전문기구인 세계자연보전연맹(ICUN)으로부터 ‘등재불가’로 평가받았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북한 사이버전 전담부대 확대 편성 / 동아일보 / 2009-05-05

북한이 사이버전 전담부대를 확대 편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5일 군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수년전부터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예하에 인터넷을 통해 한국과 미국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고 사이버전을 수행하는 '기술정찰조'를 운영 중이다. 이 부대에서 활동 중인 북한군 약 100여 명은 군 컴퓨터 전문요원을 양성하는 평양 지휘자동화대학에서 컴퓨터 해킹 등 사이버전을 습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대는 고성능 컴퓨터로 한미 군사관련 기관들의 컴퓨터 망에 침투해 비밀자료를 해킹하거나 바이러스를 유포해 전산망을 마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군은 종전에는 한반도 유사시 미군 증원전력에 대한 정보수집 및 미군 인터넷과 첨단지휘통신 체계 교란을 위한 자료 축적 활동 등에 주력했으나 최근엔 사이버전 수행과 군 정보화 체계 확립에 힘을 쏟고 있다고 정보당국은 전했다. 군 소식통은 "미국 국방부가 최근 수년간 미군 인터넷을 조회한 국가를 역추적한 결과 북한이 최다 접속국으로 판명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공간+너머] 3부 新남촌,강남―성장의 속도 ⑦ 대한민국 발전소,대치동 학원가 / 쿠키뉴스 / 2009-05-11

맹모삼천의 고단한 전리품… 상생으로 대치(代置)는 꿈인가

대한민국은 교육의 공화국이다. 교육감도 선거로 뽑고 기러기 아빠와 같은 교육 디아스포라가 일상화한, 그리고 논술을 위해서라면 수독오거서(須讀五車書) 정도는 '깜'도 안 되는 교육의 교육에 의한 교육을 위한 나라. 이쯤 하면 우리나라를 왜 교육공화국이 불러야 하는지 더 이상의 논증은 불필요하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을 찾았다. 이번엔 조금 늦은 심야 시간을 택했다. 그래서였을까? 지하철 3호선 대치역은 한산했고, 공기도 제법 신선했다. 아마 대치역 인근에 자리한 한티근린공원 때문일 것이다. 작은 공원인데도 퍽 단정했다. 무성한 신록들로 나무들이 휘어질 듯하다. 가벼운 차림의 시민과 어르신 몇 분이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계절은 어김이 없어 올해도 이렇게 푸른 향연을 펼친다. 그러나 이런 여유로움은 꼭 여기까지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은마사거리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는 이른바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 주변을 분주하게 오가는 승합차와 도로변에 주차된 버스들 그리고 육중한 승용차들로 은마사거리의 풍경은 낯선 활기로 넘친다. 대치동의 러시아워가 시작된 것이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늘 이래요. 방학 때는 지방에서도 와요."

"오면 뭐해. 목동에서도 공부 좀 한다는 남학생도 여기 와서 논술 특강을 듣다가 따라가지 못해 중도에 그만뒀다던데. 온다고 다 효과 보나."

"여기 A아파트는 서울대와 연·고대가 목표고, 저기 B아파트는 하버드에 보내려는 데니까, 수준이 다르지요."

다소의 과장이 없지 않겠지만, 학원가 주변의 상인들과 나눈 이 몇 마디가 대치동의 상황과 분위기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이 뜨거운 교육열이 어디 대치동뿐이랴. 내남없이 대한민국 전역이 입시 준비로 몸살을 앓고, 교육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관심사가 아니던가. 모든 것이 성적과 졸업장으로 환원되는, 또 학교 공부가 입시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집중된 교육의 공화국. 어쩌면 우리 교육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의 교육열이 다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터이다. 이 열정과 에너지가 있었기에 국민의 교육 수준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국이 단시간에 압축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신흥경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교육은 수출과 함께 이미 한국(사회)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치동을 키운 것은 8할이 우리의 교육열과 학원이었다. 그로 인해 대치동이란 이름에는 어떤 선망과 질시가, 동경과 환멸이 착종돼 있다. 명문대학과 기득권층을 향해 뻗어 있는 익스프레스 웨이. 그러나 실제로는 공교육의 붕괴와 교육 양극화의 상징이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원 웨이 스트리트'가 바로 우리의 교육현실 또는 대치동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하도 공부가 치열한 곳이어서 그랬는지 어감이 강해서 그랬는지 대치동이란 말에서는 언제나 '대치(對峙)'란 말부터 떠올랐다. 그러나 대치동은 큰 대(大), 산 우뚝할 치(峙) 곧 큰 고개를 뜻하는 '한티'란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평범한 이름이다.

지금처럼 대치동은 자녀의 성적과 입시 일정에 맞춰 옮겨 다니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원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으레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마련이다. 이 한티마을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쪽박산'과 '은행나무'에 관한 전설이다.

강남 일대가 그렇듯 한티마을 역시 경기도 광주군에 속한 궁벽한 농촌이었다. 주변에 양재천과 탄천이 있어 큰물이 날 때마다 범람했고, 갈대가 무성하여 농사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한다. 쪽박산이란 어의 그대로 이곳 한티재는 가난한 고을이었고, 쪽박산이 없어지는 날 이곳이 부자가 된다는 풍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과연 그 전설대로 강남 개발로 쪽박산이 없어지면서 이곳은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쪽박산과 함께 대치동을 대표하는 명물로 수령이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꼽을 수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의 은행나무는 용문산 은행나무의 가지라고 한다. 대치역에서 은마사거리까지 와서 우회전한 다음 영동대로 방향으로 100m쯤 직진하다 다시 골목길로 50m쯤 들어서면 1968년 7월 3일 보호수로 지정된 한티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인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을의 전설과 대치동의 유일한 쉼표인 보호수는 그저 이곳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며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대치동을 만들고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육열과 학원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일종의 계급이다. 그리고 이는 맹모삼천을 능가하는 열성과 치열한 경쟁을 뚫었을 때 주어지는 고단한 전리품이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밀렸을 때 긴 인생의 운용에 있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벌써 알아챈 걸까? 창백한, 또는 결연해 보이는 얼굴로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하게 아롱진다. 획하고 나타났다, 획하고 사라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왠지 꿈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소음과 함께 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꽃다운 우리 아이들을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역에서 느닷없이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의 절창 '지하철역에서'(1916)가 떠올랐다.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얼굴들
젖은,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넘 기 힘든 큰 고개란 뜻에서 유래한 대치. 모쪼록 우리의 이 어린 꽃잎들 모두가 입시경쟁이라는 인생의 큰 고개를 무탈하게 잘 넘어주길 조용히 기도해본다. 아울러 이 대치(大峙)가 나만 잘되고 보자는 대치(大痴)가 아니라 참교육과 상생의 윤리가 실현되는 대치(大治)로 대치(代置)되었으면 하는 장난 같은 바람을 가져본다.

대치동 30년… ‘학원 타운’의 탄생

대치·도곡동에 아파트가 집중적으로 들어선 것은 1978년 전후다. 서울 도심에서 12㎞ 떨어진 이곳에 당시 민간에서 6000가구, 주공이 1500가구를 지었다. 청화기업이 지금의 단대부고 남쪽에 1090가구의 청실아파트를, 한보주택이 민간으로 최대 규모인 4368가구의 은마아파트를 공급했다. 청실아파트 서쪽에 지었던 주공아파트는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loan)차관'으로 건설됐으나 지금은 공원으로 변했다.

당시 이 동네 주도로는 너비 40m의 남부순환도로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곽순환도로인 셈인데 그 무렵만 하더라도 이 아파트단지에서 잠실 방향으로는 비포장도로였다. 숙명여고, 단대부고 등 강북의 학교들도 발 빠르게 이곳으로 옮겨와 명문학교로 거듭나게 된다.

조성면(인하대 강의전담 교수)

전국역사학대회 반세기만에 분열 기로 / 연합뉴스 / 2009-05-10

전국역사학대회 반세기만에 분열 기로, 한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 불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 역사학계의 '학술올림픽'에 비견할 만한 연례 학술행사인 '전국역사학대회'가 출범 반세기 만에 분열의 기로에 섰다.

11일 역사학계에 따르면 오는 29-30일 서울대에서 역사학회(회장 노명호) 주관으로 열리는 제52회 전국역사학대회에 한국사연구회(회장 조광)와 한국역사연구회(회장 한상권) 두 단체가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두 단체는 한국사부ㆍ서양사부ㆍ고고학부ㆍ과학사부ㆍ역사교육부ㆍ미술사부ㆍ경제사부 등으로 나뉜 패널 중 한국사부에 참여하는 학회로 다른 역사 관련 학회에 비해 회원 수가 많고 이른바 진보성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이들의 불참은 역사학대회의 위상 자체를 흔들고 있다.

두 학회가 명목상 내세우는 불참 이유는 역사학회의 독점적인 행사 운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사연구회 관계자는 "역사학대회는 관련 학회가 돌아가면서 주관하다가 2000년 이후 역사학회만이 주관하는 행사로 고착화됐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역사학대회가 파행을 빚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지난해 연말에 터져 나온 정부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방침이 결정적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검인정인 현행 근현대사 교과서에 좌편향적 내용이 많다면서 교과서 집필자들과 출판사에 대해 수정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20여개 역사학 관련 단체들은 이런 압박이 검인정교과서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반대 움직임을 조직화했고 반대성명까지 냈다.

이 단체들은 역사학회에 대해서도 동참을 요구했지만, 역사학회는 거절했다.

이에 더해 역사학회의 주축을 이루는 일부 중진학자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교과서 개편 움직임에 동조하거나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의견들을 공개 표명하기도 했다.

역사학회 측도 역사학대회 '독점' 운운하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이다. 역사학회의 한 관계자는 "역사학대회는 무엇보다 역사학회가 시작한 데다, 2000년 이후 역사학회 주관행사로 변경된 것도 대회 개최에 따른 업무 가중 등을 이유로 다른 학회가 기피했기 때문이지 역사학회가 무슨 이득을 바라고 독점하려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올해 대회 불참을 선언한 두 학회는 역사학대회 불참 결정이 우선은 올해만 해당하는 '일시적 방침'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올해 역사학대회는 여느 해보다 맥 빠진 모습으로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청·홍 실전보, 묘수풀이 담긴 한국 최고 추정 기보집 발견 / 중앙일보 / 2009-05-07

18~19세기 제작 추정 두 권
순장바둑의 17개 장점 없어
한국 바둑사 뒤집어질 수도

세계 최초의 기보(棋譜)는 중국 삼국시대 강동의 패자였던 손책(AD 175~200)과 그의 막료 여범의 대국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의 것이다. 일본엔 1200년대의 기보가 있고, 1600년 무렵 탄생한 본인방가(本人坊家)의 대국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은 1913년 육당 최남선이 중국 원나라 때의 현현기경을 수록한 ‘기보’라는 책이 바둑돌이 들어 있는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왔다. 또 한국인의 기보로는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해 본인방 슈에이(秀榮)와 6점을 놓고 대국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바둑 대국을 기록해 둔 기보집들. 재야 사학자 이청씨가 발견한 것으로 18~19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실전보(左)는 연한 붉은 색과 푸른 색 물감으로 흑백을 표시했고 그 안에 한문으로 숫자를 써 넣었다. 다른 한 권(右)엔 기보 작성법, 묘수풀이가 기록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문규 기자]

재야 바둑사학자인 이청씨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18~19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기보’ 두 권을 찾아냈다. 모두 필사본인데 한 권은 작자 미상이고 일절 설명 없이 실전보와 묘수풀이만 수록돼 있는 책이다. 실전보는 연한 붉은 색과 푸른 색 물감으로 흑백을 표시했고, 그 안에 한문으로 오늘날의 기보처럼 숫자를 써넣었다. 다른 한 권엔 바둑의 의미와 기보 작성법, 바둑용어 풀이, 그리고 현현기경 소개와 묘수풀이들로 꾸며져 있다. 송나라 때부터 전해지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을 혁가십결(奕家十訣)이란 독특한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청씨는 “조선 후기 바둑은 저 높은 궁궐에서부터 바닷가의 염전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유행이었다. 지성인들 사이에서 바둑에 대한 찬반 논쟁도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보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기록으로만 전하던 기보집을 찾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기보집이 18~19세기 것이라는 건 아직 추정일 뿐이다. 장서각 측에선 “과거 민간에서 구입한 것이다. 서지학자에 의뢰해 정확한 연대를 밝혀보겠다”고 말한다.

만약에 이 책이 18~19세기 것이라면 당연히 한국 최초의 기보집이 될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책자에 수록된 기보는 순장바둑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보에 순장바둑을 표시하는 17개의 장점이 없다. 이청씨는 “그동안 조선실록이나 각종 문헌들에서 우리 바둑이 순장바둑이란 사실을 유출할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에 발견된 기보를 보면 순장바둑이 우리 고유의 바둑이란 종래의 통설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구한말과 일제시대 우리 국수들의 기보는 모두 순장바둑으로 돼 있다. 이 때문에 대국 전에 17개의 돌을 미리 놓고 출발하는 순장바둑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한국 고유의 스타일이며 지금의 바둑은 일제 이후에야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신라인이 중국 황실의 기대조(바둑 사범)를 할 정도로 한·중 간의 바둑 소통이 꾸준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순장바둑을 두었을까 하는 의심은 끊이지 않았고 순장바둑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명지대 바둑학과 정수현 교수는 “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순장바둑에 대한 의문도 이 기회에 풀릴 수 있을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lundi 11 mai 2009

사회학자가 한국 교회에게 - 쿠키뉴스 / 2009-05-01

[미션라이프] 국내 기독교의 저변확대를 위해서는 교회 내부에서 가족·지역 친화적인 여가 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회학자인 이기홍(한림대 사회학과·사진) 교수는 1일 한반도평화연구원(KPI)에 기고한 칼럼과 본보 인터뷰를 통해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화적 수요 가운데 하나는 저성장 시대에 맞는 가족 및 지역친화적 여가 문화”라며 “한국의 기독교가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면 이 부분을 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진단은 과거 고도성장 시대의 여가 활동이 대부분 성인 남성 위주로 이뤄져 왔다면 현재는 주5일 근무제 확산과 고령화, 여성 취업률 증가 등으로 여가활동 주체가 가족 구성원 전체로 확대되면서 가족 중심적 사고가 보편화됐다는데 따른 것이다.

이 교수는 “기독교가 일상생활 측면에서 더욱 큰 영향력을 지니기 위한 전략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교회가 가족 친화적이고 지역 친화적인 여가문화를 개발해서 대중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고 제안했다.

그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타종교 등과의 ‘차별성’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라이프 스타일 측면에서는 대중에게 매력이 없고 고립돼 있다”면서 자칫 ‘문화지체 집단’으로 낙오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매력있는 교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우선 교회 조직이 지금보다 더 가족 중심 단위로 묶어지고, 지역봉사나 선교활동 역시 같은 단위로 구성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주축이 돼서 주말 등에 온 가족이 다양한 문화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음악회나 영화상영, 뮤지컬 공연 등을 통해 이미 가족 중심의 목회가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몇몇 중대형 교회에 국한돼 있는 상황이다. 이 교수는 영·유아나 노인층, 장애인, 탈북자, 외국인 이주노동자 등을 위한 선교 차원에서의 복지서비스 역시 지역 교회 중심으로 이뤄질 때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만혼과 독신, 저출산 등의 특징을 지닌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3545세대)에 속하는 연령 집단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도 부각됐다. 이 교수는 “‘3545’세대의 교회내 구성 비율은 같은 연령대의 우리나라 인구비율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집중적인 선교대상”으로 꼽으면서 “이들을 타깃으로 한 선교적 전략 역시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아래는 칼럼 전문



‘차별성’과 ‘매력’이 필요한 한국 교회

한국 개신교의 위기를 우려하는 소리가 높다. 이번 기회에 교회의 사회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 볼 것을 제안한다. 한 세력이 사회 일반에 대해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차별성과 매력을 지녀야 한다. 차별성이 다른 점을 강조하는 정적 개념이라면, 매력은 그곳으로 이끄는 힘과 관련된 동적 개념이다.

교회 문화의 일부는 대중과의 교류에 상당히 성공하기도 했다. 일례를 들자면 기독교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으로 출발하였으나 일반 대중들에게 급속히 전이된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 노래는 어떻게 교회의 경계를 넘어 일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여러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될 수 있었는가?

필자는 ‘갑은 을을 사랑한다’는 식의 단순하고 극화된 메시지에 식상한 대중들에게 ‘당신’ 즉 개별적 청자(聽者)가 태어난 목적 자체가 사랑 받기 위함이라는 차별적 메시지가 화사하고 세련된 멜로디를 타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성공의 모범이 한국 개신교의 다른 부분에 적용될 수는 없을까?

부부 상담 전문가로부터 들은 말이다. 최근 이혼율을 보면 크리스천들과 불신자들 간에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얼마 전에 유명한 크리스천 커플이 혼전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가십 거리가 되기도 했다. 대중 문화계에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이들의 암울한 자살 소식 역시 연이어 보도되었다. 청년 시절까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이들일수록 사회에 진출했을 때 급속도로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예들을 보면 현재 한국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매력 문화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차별성도 거의 잃은 듯하다.

과거의 한국 개신교는 달랐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개신교는 당시 선진적이라고 여겼던 서구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신흥 중산층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근거해서 한국 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앞서나가는 측면을 보여주었다. 일부 교파는 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고, 이주 노동이 시작될 무렵 외국인들을 돕는 데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결과보다는 수단과 과정을 중시하는 노동 윤리, 당시 사회가 그리 배려하지 않았던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물질적 성공보다 정신적 평안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등은 당시 개신교도에게는 어색하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요즘의 한국 개신교는 보수정치와 유착하고, 상업화되고 대자본화된 제도종교의 모습을 보이며, 고성장/산업화 시대의 일시적 유행 정도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기 개신교는 차별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엄청난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하며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혁신적 이념을 제시하고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베버(Weber)는 백여 년 전에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개신교가 창발한 새로운 사상 즉 직업소명설과 예정 교리에 주목한 바 있다. 이러한 가치관들이 세속적 직업에 강한 동기를 부여하고, 노동자로서의 상시적 긴장을 요구하는 금욕주의를 확산시킴으로써 근대 경제 시스템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그는 보았다. 그 내용은 풀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개신교적 사고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가치관을 보편화시켰다는 것이다. 베버는 당시 신흥 상공업 및 기술직과 근대 경제가 상대적으로 발전했던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 화란 등에 개신교도가 과분포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전근대 유럽에서는 성직과 세속 직업 간의 우열이 뚜렷했고 그것이 신분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런 차별을 성서에 근거한 만인제사장설 등을 바탕으로 비판하였고, 무슨 직업이든 신의 부름(vocation)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직업소명설을 확산시킴으로써 전근대적 직업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강한 노동 의욕을 일반인들에게 고취시켰다.

베버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해 가는 태도 역시 당시 개신교도의 라이프스타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한다. 중세 가톨릭의 구원관에서는 신앙뿐 아니라 선행도 필수적이었다. 단 선행의 정의가 매우 유동적이어서 한 때 교황청에서는 죽은 이들의 천국 진입을 염원하는 속죄기도 신청서를 구입하는 것도 선행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면죄부 관련 정책은 종교 개혁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구원 교리 자체를 재검토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깔뱅(Calvin)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그 구원이 절대자인 신의 결정에 따라 탄생 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생에서의 어떠한 선행도 구원 여부를 바꿀 수 없다는 예정 교리를 많은 개신교도가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초기 개신교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 나타내야 할 징표로서 상시적 긴장감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육체적 쾌락을 절제하는 금욕적 노동 윤리를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근대 초기의 개신교는 그야말로 ‘고쳐 새로운 가르침(改新敎)’이었다. 베버의 설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면은 근대 초기 유럽의 개신교도가 보여준 문화적 차별성과 그에 따른 사회 변혁의 에너지이다. 그들은 비록 신흥 세력이었으나 부의 추구 자체를 죄악시하기도 했던 전근대적 경제관을 갈아치우는 영향력을 발휘했고, 현재 전세계를 관통하는 시장경제 시스템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유대 혈통이었으나 정치적 압력 때문에 선대에 개신교로 개종했던 베버가 이러한 설명을 했다는 점은 당시 개신교의 문화적 영향력이 매우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고전적 개념으로 취급되는 그람시(Gramsci)의 ‘문화 정치’, 파슨스(Parsons)가 지적한 가치 체계로서의 ‘잠재성(latency)’, 부르디외(Bourdieu)가 제시한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 등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상징, 관념, 사상 등을 반영하는 습관과 라이프스타일과 같은 문화적 요소가 중요함을 지지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 및 행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 집단이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중의 일상생활까지 지배하는 문화적 기제로서 기능한다. 특히 그람시와 부르디외의 이론은 한 세력의 문화가 외부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차별성뿐 아니라 매력을 지녀야 한다는 실천적 함의를 제공한다.

현재 한국 개신교가 문화적 영향력 없는 집단으로 전락하는 이유는 차별성은 남아있을지 몰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이념으로서 그리고 라이프스타일로서 매력이 없고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노골화된 개신교에 대한 집단적 저항 특히 인터넷 상에서의 공격은 당분간 줄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집단 내에도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현 정부의 탄생에 개신교계 지지가 중요했다는 일반 대중의 인식은 촛불시위 이후 개신교 활동에 큰 족쇄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는 서구의 대중들이 이탈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막차에 허둥거리며 올라탔다는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가 이러한 진부함을 스스로 털어내지 못하면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바탕으로 한 비종교적이고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확산, 한국 사회의 고령화와 다문화화, 한반도 통일 문제 등의 쟁점에 대해 모종의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세속 문화의 변화조차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문화 지체 집단으로 낙오될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이념적 역기능도 현재와 같은 문화적 고립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계 주류가 공유해 온 하위문화적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주의’일 것이다. 복음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단, 자유주의 신학 등과 구별된 정통 신학의 계승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주로 쓰여 왔다. 한국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준 미국에서는 복음주의가 근본주의적 크리스천, 극우파 정치인, 연방제 반대 그룹, 미국 주류 문화로부터 고립되다시피 한 남부의 바이블 벨트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복음주의적 크리스천들이 많이 분포한 남부에 인종차별적 문화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나, 민병대(militia)들이 기독교적 이념으로 무장하고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다문화적 가치관을 지지해 온 미국의 지식인들이 보수적 기독교의 문화적 독선과 후진성을 비판할 때에 자주 드는 예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에도 이러한 경향들이 보이고 있다면 그것은 기우일까?

한국의 복음주의는 세속과의 구별을 강조한다. 그런 요구는 이원론적 경향을 불가피하게 동반하며, 이에 충실한 크리스천들이 일상생활에서 한국사회에 파고 들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도록 하기도 한다. 혹시 그들은 현재 일반 대중과 단절된 채 정신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가톨릭처럼 하나의 조직을 갖춘 일부 종교와는 달리 한국 개신교는 전체를 대표하는 단일한 아이콘이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반 대중들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의 현실감이 매우 떨어진 행동이나 발언을 통해 한국 개신교를 외면하게 된다. 그들이 갖는 묘한 상징성 때문에 그들과 다른 개신교인들까지도 도매금으로 비판 받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가르침(基督敎 또는 Christianity) 외의 이념이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면, 복음주의와 같은 이념은 신도와 일반 대중들에게 약간은 더 친화적이고 명확한 방향으로 개혁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한국 개신교는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전략과 논의가 필요하다. 그 한 예로서 필자는 현행 교회 활동과 연계하여 대중적 라이프스타일로서의 가족친화적이고 지역친화적인 여가 문화의 개발을 제안하고 싶다.

과거 고도성장 시대의 여가 활동은 상당 부분 기업 업무의 연장선에서 성인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는 여성의 취업률 증가, 고령화, 주 5일 근무제의 확산, 다문화화 등에 기인한 가족 중심적 사고가 보편화되면서 여가 활동의 주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화적 수요들 중 하나는 저성장 시대에 맞는 가족 및 지역 친화적 여가 문화이다. 한국 개신교가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선점하기를 희망한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교회 조직을 더욱 철저히 가족 단위로 구성하고, 지역 봉사 및 선교 역시 같은 단위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 중심의 여가 생활은 주로 주말에 집중되므로 일단 전통적 교회 프로그램들과 시간상 충돌할 수밖에 없다. 만족도가 높은 여가 문화일수록 과시적이며 고비용이라는 점과 일부 사교육 제공자들이 이 부문의 경쟁자라는 점도 한국 교회가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이를 위해 영유아, 어르신, 장애우, 새터민, 이주 노동자 등 특별 시설과 서비스가 필요한 이들에 대해 각 지역 교회가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교회가 더욱 가족친화적, 지역 친화적으로 변하여 대중의 일상생활에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구 변동 추이를 꼭 감안하기 바란다. 2010년대 말을 정점으로 한국의 총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할 것으로 추계되는데, 이미 감소 추세인 개신교 인구는 그때 이후 더욱 가파르게 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은 2020년대 중후반에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의 비경제활동인구인 초고령 사회(super-aged society)가 될 전망이다. 지금 상태로서는 40대 이하 교인 인구가 획기적으로 늘지 않을 경우, 개신교내 신앙의 세대 간 전승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연령 집단은 한때 한국 사회 세대 논쟁의 초점이었던 신세대가 시작되는 문지방이자, 만혼, 독신, 저출산 등의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현재 한국 전체 인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교회 내에서보다 훨씬 크다. 대부분의 매력적인 문화가 동일 연령 집단 내에서 우선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감안하면, 바로 그 연령대가 결정적 전환점(tipping point)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교회 내의 이런 인구 불균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개신교 인구는 한국 사회 전체보다 더욱 급속히 고령화될 수밖에 없다. 고령화 과정에서 고령 세대를 교회 내에 유지시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에 비해 교회가 더욱 고령화되는 것은 교회의 활동성을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젊은 세대에 대한 적극적 배려가 더더욱 필요하다. 또한 날로 증가하는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및 독신 가구를 포용하기 위해 교회는 어떠한 전략을 갖고 있는가? 한국 개신교가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구 변동의 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범교회적 전략을 짜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촛불집회 1년] 내가 본 '촛불'과 한국사회 / 서울신문 / 2009-05-01

[촛불집회 1년] 내가 본 ‘촛불’과 한국사회
“정부는 옳은일만 한다는 환상 깨져” “사회적 공공성 등 생활정치 중시를”

지난해 이맘 때쯤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 그리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지금 당시의 촛불집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촛불집회에서 ‘평화의 상징’이 된 ‘유모차부대’ 인터넷 카페 운영자 정혜원(34)씨는 “아이의 건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부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참가했던 것”이라면서 “그 후로 정부 정책을 보면 ‘우리 가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다음 ‘아고라’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 청원’을 처음 제안해 138만명의 지지를 받아낸 ‘안단테’ 황모(17)군도 “집회 참가 뒤 ‘정부는 항상 옳은 일만 한다.’는 환상이 깨져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됐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주부 김모(36)씨는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통령을 촛불이 너무 시끄럽게 몰아붙여서 불편한 점도 있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문가들도 촛불의 지난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렸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뜻 ‘촛불’이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듯 보이지만 당시 국민들이 공유했던 기억은 언제든 다시 표출될 수 있다.”면서 “최근 경기도 교육감 선거나 4·29 재보궐 선거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공정방송시민연대 최홍재 사무처장은 “지금까지는 촛불집회가 특별히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1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가 촛불의 공과를 제대로 돌아보며 진화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우 선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제는 미시적인 민주주의에 주목할 때”라고 강조한 뒤 “정치권력의 민주화와 같은 거시적 주제보다는 정책의 실현과정이나 일상적 삶과 관련된 민주화가 확장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개인과 사회단체와 활발하게 소통해야 한다. 결국 삶의 민주화는 신뢰의 문제와 연계돼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정부의 책임이 중요하게 거론됐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나 정치세력들은 경제적 효율성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공성과 인간적 존엄성에 기초한 생활정치에 무게중심을 둬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도 “촛불은 정부와 과학계, 언론 등 전문가 집단에 대한 반란의 성격이 강하다.”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정부가 자기 확신에 취해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정책을 결정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전문가들은 진보진영이 뚜렷한 대안을 보여 줘야 불신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의견도 빠뜨리지 않았다. 김 교수는 “보수세력은 시민사회의 참여를 통한 거버넌스(협치)를 받아들이고 진보세력은 현 정권의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적 국정운영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진보세력은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것 말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오바마 미 대통령은 자신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는 지위에 있을 때도 비전을 보여줬고 국민들이 이에 공감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대근 박성국기자 dynamic@seoul.co.kr

길, 박물관에 들어가다 / 한겨레 / 2009-04-27

경북 문경 ‘옛길 박물관’ 개관
옛 지도·봇짐·기행문 등 전시

조선시대에도 출장 명령서가 있었고, 자동차처럼 말에도 연식이 있었다. 옛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괴나리 봇짐 안에 무엇을 지니고 다녔을까. 과거 합격의 영광과 금의환향, 낙방길의 시름은 어떤 것이었을까. 국내에서 유일한 길 전문 박물관인 경북 문경의 ‘옛길 박물관’(oldroad.go.kr)에 오면 이와 관련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문경시가 28일 문을 여는 옛길 박물관은 문경새재 도립공원 안에 있다. 1997년 문경새재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했다가 최근 총 사업비 40억원을 들인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길을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 옛길 박물관에 전시되는 조선 말 지금의 문경새재 일대를 그려 놓은 지도인 〈조령진산도〉. 사진 문경시 제공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였던 문경은 고갯길의 대명사인 문경새재와 가장 높은 고갯길인 하늘재, 그리고 한국의 차마고도라 말할 수 있는 토끼비리, 영남대로의 주축 역할을 했던 유곡역 등이 있는 문화 지리의 보고다. 옛길 박물관은 이런 문경의 정체성과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각종 문화상을 보여주기 위해 건립됐다.

전시실에는 선비의 과거 길을 연상케 하는 괴나리 봇짐과 봇짐 속의 좁쌀책, 호패, 휴대용 옛지도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조선의 10대 도로, 옛 지도의 제작, 운송도구, 이중환의 <택리지>(필사본)도 구경할 수 있다.

대구/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북한에 석유가 매장된 사실을 아십니까? / 데일리안 / 2009-05-04

1.
「북한개발(開發)」의 대(大)전제는 「체제전환」이다.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로 바꿔야 북한을 재건(再建)할 수 있다. 공산독재를 내버려둔 채 아무리 많은 지원과 협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 지난 10여 년 간 햇볕정책 아래 북한에 무작정 「퍼주기」와 「퍼붓기」를 해왔지만, 남북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조선로동당을 해체한 뒤 북한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식(移植)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자유, 인권, 법치의 보편적 가치를 전하고 북한주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리게 한 뒤 북한을 개발(開發)하고, 재건(再建)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자유민주주의 통일, 곧 자유통일(自由統一)이다.

북한정권을 멸망(滅亡)시키지 않고 이뤄지는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은 공산독재를 강화하고 주민폭압을 유지시키는 무익(無益)한 일이다. 위헌(違憲)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적(主敵)인 북한정권을 돕는 이적(利敵)행위이다.

북한에 매장돼 있다고 거론되는 석유(石油) 역시 마찬가지이다. 북한정권을 멸망시킨 뒤 대한민국이 개발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북한정권과 함께 공동개발하자는 논리는 위헌(違憲)이며, 이적(利敵)이고, 북한정권에 주민들을 폭압하라고 더러운 돈을 대 주자는 사악(邪惡)한 발상이다. 무엇보다 가능하지도 않은 공상(空想)이다.

북한의 석유는 자유통일 이후 대한민국이 감당해야 할 「통일비용(費用)」을 「통일이익(利益)」으로 바꿔줄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이다. 공산독재를 하루빨리 붕괴시킨 후 노다지와 같은 북한의 자원을 개발해 국가를 선진화시켜야 한다. 헌법적 결단이 늦어질수록, 백만을 넘어선 청년 무직자들은 깽판세력으로 타락하고, 나라는 남미(南美)처럼 몰락해갈 것이다. 지금 필요한 지도자는 이 위대한 결단을 실천할 사람이다.

2.
북한은 워낙 폐쇄적이어서 석유매장 사실 여부도 미스터리에 가깝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정보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97년 10월 동경에서 북한 유전(油田)설명회 개최 : 북한 원유공업부 보고서가 발표됨. 서한만 일대 최대 430억 배럴 유전 매장 가능성 발표됨

△1998년 10월 정주영 『평양이 기름 더미 위에 떠 있다』고 발언.

△1998년 11월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 뉴스메이커에 『북한 서한만 연간 5백만 톤 규모의 유전이 있다』고 발언.

△1999년 5월 경향신문, 서한만 원유 탐사 활동 장면 보도

△2000년 무렵 박부섭 박사 환구석유심탐공사 사장 보고서, 서한만 5개 구역 42억3400만 배럴 원유 매장 사실 발표. 이는 매장량 세계 20위인 인도네시아와 비슷한 규모이다.

△2004년 영국 석유회사 아미넥스(Aminex), 북한과 서해안 대륙붕 및 평남지역 석유광권 개발계약 체결

△2005년 1월17일 영국 아미넥스 CEO 브라이언 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 『약 40억~50억 배럴의 채굴 가능한 원유가 북한 매장』 주장

△2005년 10월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 발해만 해역에 660억 배럴 원유 매장된 대형 유전층 발견 발표(중국 최대 유전 다칭(大慶)유전과 같은 맥임).

△2005년 중국 석유부 내부 보고서, 서한만 일대 50억~60억 배럴 원유 매장 평가

△2005년 12월 중국 로두철 부총리 쩡페이옌(曾培炎) 부총리, 다목적용 「조중 정부 간 해상 원유 공동개발에 관한 협정(내용은 미공개)」 체결

△2007년 10월5일 연합뉴스 「요령해양공능계획(遼寧海洋功能區劃)」 보도, 동 계획은 압록강 하구 삼각주를 석유탐사 「예류구(豫留區)」로 지정(예류구는 그 기능을 확정하기는 했지만 아직 개발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구역, 조사를 통해 매장자원을 이미 확인했으나 국가 차원의 계획에 따른 개발준비를 아직 못해 자원비축구역으로 삼고 있는 구역. 중국이 조사를 통해 압록강 하구 일대에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향후 본격적 탐사에 들어가겠지만 아직 중앙정부 차원의 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당분간은 자원 비축을 위해 탐사를 미뤄두기로 했다는 의미임)

△2008년 1월31일 아미넥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채굴 가능한 원유해 매장량은 40억~50억 배럴』이라고 밝힘.

『북한은 상당한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발해만 지역과 가까워서, 북한에 석유 사업전망이 매우 높습니다. 지리학적으로도 매우 흥미 있는 지역이에요(아미넥스의 CEO 브라이언 홀(Brian Hall)』

3.
이상의 fact를 정리하고 몇 가지 fact를 추가해 정리하면 이러하다. 북한의 석유 매장 여부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2004년 무렵 북한 석유 매장 논란은 사실상 끝이 난다. 같은 해 중국 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황해(黃海)의 발해만(渤海灣) 대륙붕에서 유전을 발견했는데, 경제성 높은 유전은 북한 영해인 서한만 인근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前국회의원 이승철이 최근 펴 낸 「오일시크릿」이라는 책에 따르면, 북한의 유전 맥(脈)은 중국 최대 유전 다칭(大慶)유전과 같은 맥이다. 매장량 역시 엄청난 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일시크릿」은 『중국이 2005년 말 이후 북한 서한만 일대를 정밀탐사해서 밝혀낸 내용들은 그간 서방 탐사업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를 단순한 추정이 아닌 현실과 사실의 문제로 급부상 내지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간 서방 탐사업체들은 고작해야 해상에서 탄성파를 쏘아 해저 지형을 파악하는 간접(間接)방식에 의존했던 데 비해서 중국 측은 동일 지층 지역에 대한 풍부한 탐사 및 시추 경험, 특히 대륙붕 탐사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추정(推定)이 사실(事實)로 확인됐다는 내용이다. 중국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외부 접근이 차단된 방대한 비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4.
아이러니하게도 아미넥스를 비롯한 서방 탐사업체들은 최근 북한에서 모두 철수했다. 북한이 지질탐사결과를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난 해 1월 아미넥스의 브라이언 홀(Brian Hall)은 RFA와의 인터뷰에서 석유개발 포기이유를 이렇게 말했었다.

『외국기업들의 북한 석유개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석유투자 설명회를 해야 하고 개발을 맡은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북한에 대한 지질탐사결과를 밝혀야합니다. 그런데 개발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토록 중요한 북한의 지질 탐사결과를 북한당국이 공개하지 말라고 요구해서 결국 북한 내의 유전 개발이 중단됐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대북(對北)투자 컨설턴트로 활동했던 영국인 「프렌치액세스아시아(Access Asia)」 폴 프렌치(Paul French)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에 부닥쳤죠. 영국에 있는 투자자들이 과학적 자료를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정작 북한당국은 지질 탐사 자료자체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탐사자료가 국가기밀이라고 우기거든요. 결국, 사업이 중단됐죠』

폴 프렌치(Paul French)의 이어진 발언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국제시장의 투자자들에게 아무리 북한 석유매장량이 많다고 말로 해봐야 소용이 없다』며 『지질탐사자료를 보여주고 설득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북한은 자기 고집으로 인해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석유매장량이 많기는 많다는 지적이다.

서방 탐사업체들의 북한 이탈과 달리 중국은 북한에 「굶주린 사자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한다. 석유를 포함한 북한의 지하자원 획득은 중국이 「실행 중」인 신(新)조선전략의 구체적 목표 가운데 하나다.

주간동아가 지난 해 5월 6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중국은 발해만 유전을 발견한 직후 「중조일치(中朝一致·북한을 중국화한다는 뜻)」라는 계획을 만들어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북한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역사적·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이라면,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중조일치(中朝一致)」는 전통적으로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북한을 중국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액션 플랜(action plan)이다.

중조일치의 대표적 전략은 「신조선전략」이다. 구체적으로 공개된 바 없으며 비밀리에 작성된 이 전략은 중국 공산당의 북한 담당 조직과 연구소가 총망라해 입안됐는데, 동북3성과 북한을 하나로 묶어 개발한다는 게 골자다.

주간동안은 『중국은 신조선전략을 바탕으로 50억 달러의 대북 경협자금을 준비해놓고 북한을 설득하면서 집행 시기를 저울질해왔다. 중조(中朝)경협을 토대로 북한의 전 분야를 중국과 일치(一致)화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 전략을 토대로 북한의 지하자원 접수에도 나섰다』며 석유 역시 이 「신조선전략」의 주요 공략대상임을 지적했다. 우리가 남북화해협력 어쩌고 하며 어물거리는 사이, 북한석유를 중국이 독차지할 지경인 것이다.

5.
2009년 4월. 한반도 현상유지는 어차피 불가능하다. 지금 같은 좌익들의 친북(親北)과 보수층의 방관(傍觀)은 북한정권의 멸망 또는 쇠락 이후 중국이 북한을 접수해 석유까지 독식하는 영구(永久)분단을 초래할 것이다. 이는 남한의 남미화(化)와 북한의 티벳화(化)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의 선택은 하루빨리 조선로동당을 해체하고 북한정권을 멸망시킨 뒤 자유통일하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동포를 구출하고, 통일한국이 일류국가로 비약하는 유일무이한 길이기도 하다.

김 성 욱/칼럼니스트<이 글은 리버티헤럴트(www.libertyheald.co.kr)에서 볼 수 있음>

《직지심체요절》의 진면모 / 조선일보 / 2009-04-30

[문화재사랑] 《직지심체요절》의 진면모를 밝힌 박병선 박사
글·사진 라경준 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사진·눌와 경향신문사

한국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임을 고증한 박병선 박사


《직지》는 충청북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고려 우왕 3)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 《직지》의 정식 책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백운 스님이 부처님과 부처의 제자인 인도와 중국 및 한국의 역대 고승高僧이 남긴 말씀 중 선禪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요약한 책이다.
이 책은 백운화상에 의해 저술되었고, 그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 그리고 재정적지원자인 비구니 묘덕 등에 의해 두 가지 형태로 책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고, 또 하나는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入寂 : 사망)한 경기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1378년에 인쇄된 목판본 《직지》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상·하권이 보존되어 있으며, 1997년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에서 출토되어 총 3종의 목판본이 국내에 현존한다. 이에 반해 금속활자본 《직지》는 하권 1책 만이 프랑스파리국립도서관(동양원서부)에 보존되고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19세기 말에 초대 주한 프랑스공사로 부임한 꼴랭드 쁠랑시가 수집하여 프랑스로 반출하였다. 그 후 《직지》는 1911년 드루오경매장에서 꼴랭드 쁠랑시 소장 컬렉션 경매 때 앙리 베베르가 구입하여 보존하고 있다가, 1953년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된 것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에 대한 기록은 꼴랭드 쁠랑시와 조선에서 함께 근무한 모리스 꾸랑이 1901년 지은 《조선서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불어판으로 출간되었지만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했다는 사실을 서구의 학자들은 인정을 하지 않았다. 백인우월주의와 서양의 문물이 동양을 앞지른다는 고정 관념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했음을 고증하여 유럽내 동양학 학자들의 모임인 동양학 학회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여 인정받은 분이 박병선 박사이다. 그 후에야 많은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6.25후 초기의 프랑스 유학생
박 병선박사는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와 큰 오빠는 일제 강점시기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 비밀리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조달하신 분이다. 그녀는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도불을 원했던 그녀는 6.25를 겪었고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 후 마침내 고국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 유학을 위해 모교 은사님들에게 인사를 다니던 그녀에게, 이병도 선생은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강화에서 약탈해간 물품의 행방을 찾게” 은사의 이 한마디는 프랑스 유학의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약탈해간 물품의 소재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해방 이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된 그녀는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프랑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에 대하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프랑스에 유학중인 그녀는 학문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고, 많은 정보를 섭렵하고자 파리국립도서관을 자주 출입하면서 도서관내 많은 서적을 접하였다. 그녀의 잦은 도서관 출입은 도서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었고, 특별연구원으로 채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파리국립도서관과의 인연과 애증
UNESCO 는 1972년을 “세계 도서의 해”로 선포했다. 이에 UNESCO가 소재한 프랑스 파리의 각 급 기관에서는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기획한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도 도서관 소재 세계 각 국의 책을 전시하고자 “BOOKS”라는 전시회를 기획하였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는 동·서양을 망라한 많은 책들이 소장되어 있고, 각 언어권 별로 책의 선별과 해제를 담당할 책임자가 정해졌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인 동양을 담당할 실무자가 당시 파리국립도서관에는 없었기에 박병선 박사를 영입하여 한국 책의 선별과 해제를 맡겼다.


박 병선 박사는 《직지》를 1967년경에 처음 접했다. 이 책은 한국 서적 코너 한 귀퉁이에 있었다고 한다. 《직지》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간행기록을 본 박병선 박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꼴랭드 쁠랑시와 모리스 꾸랑도 만약 간행기록이 사실이라면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70여년 앞서 한국이 금속활자를 먼저 사용했음을 의심을 가지고 다루었다. 그러므로 박병선 박사는 이에 한국 금속활자임을 고증하기 위해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프랑스에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쇄술 관련 책자는 있지만,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책자는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한국에 있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책을 요청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관련 자료가 없다는 회신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인쇄술을 연구하는 학문인 ‘서지학’이 막 태동하는 시기였기에 박병선 박사가 만족할 만한 자료를 제공할 수 없었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내 간행되어 있는 중국과 일본 인쇄술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프랑스내 대장간을 돌며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또한 감자와 지우개 등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금속활자와 목판 인쇄술의 차이점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와중에 3번의 화재를 겪었다. 납활자를 만들기 위해 가스렌지에 납을 녹이면서 다른 연구를 하던 중 화재가 난 것이다.
박병선 박사는 이런 갖은 난관을 극복하며 마침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 연구 성과는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 주최로 개최된 “BOOKS” 전시회와 1972년 개최된 유럽내 ‘동양학 학자대회’에서 발표되어 인정받았다.

조국을 위한 그녀의 또 다른 행보
박 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이 고증되어 한국이 독일보다 70여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사용했음을 서구에서 인정하자 국내에서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박병선 박사의 《직지》에 대한 연구는 그 후 국내 서지학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많은 연구 성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2001년 9월 4일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직지의 고장 청주시에서는 박병선 박사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1999년 4월 청주시명예시민증을 수여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년 9월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박병선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청주고인쇄박물관내 ‘박병선실’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1972 년 《직지》 고증 이후, 박병선 박사는 본격적으로 《외규장각 도서》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을 찾은 것은 1978년이었다.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외규장각 도서》가 거명되었고, 이 직원의 제보로 프랑스국립도서관 별관 수장고에서 이 책을 찾았다. 《외규장각 도서》의 소재를 찾고자 결심한 지 20여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는 베르사이유에 있는 파리 국립도서관 별관에(파손된 서적을 보관하는 건물)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직지》를 찾아 고증한 이후 열광했던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외규장각 도서》를 찾은 그녀에게 권고사직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떠난 박병선 박사는 현재까지 프랑스에 한국을 알리거나 유럽지역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 연구하고 있으며, 프랑스에 있는 숨어있는 한국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 고증하고 있다.


박병선 박사는 매년 청주시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가 오십 여 년이란 긴 세월을 때때로 수돗물로 허기를 면하고 명예도 사생활도 희생해가며 문화재를 찾는데 헌신 하고 있는 나약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박병선 박사는 파리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에게 “조국이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네가 조국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서 하라.”는 말씀을 항상 하신다. 이 말은 프랑스 유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수리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회한] / 매일경제 / 2009-05-02

장서각, 소령원 산도.비문 자료 정리

"일찍이 임금의 은총 입어 / 순종으로써 공경히 모셨네 / 마음에 성실함 온축하시니 / 궁궐 법도에 부합했네 / 이내 상서로운 복 품으시어 / 우리 성궁(聖躬) 낳으셨네 / 대왕이 될 점괘에 부합하니 / 하늘이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조가 즉위하던 해인 1725년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숙빈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숙빈최씨는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갔다가 숙종의 성은을 입어 영조를 낳았다.

영조는 70세에 도달한 1763년에는 자신의 출생 내력을 기록한 '갑술년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를 열람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승정원일기는 적고 있다.

"아! 칠순이 되는 해 9월에 우연히 호산청일기를 얻어 보고는 감회가 일어나 (육상궁<毓祥宮>으로 가서) 다만 배알(拜謁)만 하고 돌아오니 이 마음 갑절이나 새롭다" 이 육상궁은 숙빈최씨를 봉사(奉祀)하기 위한 사당으로 지금은 청와대 경내의 칠궁(七宮) 중 하나로 남아있다.

워낙 출신이 미천한 까닭에 자세한 가문 내력이나 초반기 생애가 알려지지 않은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년) 11월6일에 태어나 7세에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1692년 우연히 한밤중 왕궁 '순찰'에 나선 숙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고, 아들을 낳아 일약 내명부 최고 품계인 숙빈까지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품계가 높아졌다 해도, 그리고 그 아들이 임금이 되었다고 해도, 숙빈최씨의 신주는 종묘에 갈 수 없었다.

1718년(숙종 44년) 3월, 49세로 생을 마감한 숙빈은 그 해 5월12일, 양주 고령동 웅장리 묘향(卯向) 언덕에 안장됐다.

국왕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고한 신분제 아래서 임금인 아들은 죽은 어머니를 대대적으로 추숭하는 일들을 벌이게 된다.

재위 29년(1753)에는 화경(和敬)이라는 존호를 올린 데 이어 묘(墓)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조선시대 능묘제도에서 원(園)은 왕이나 왕비 무덤에나 붙일 수 있는 능(陵) 다음 칭호였다.

재위 34년(1758), 어머니 묘소를 참배한 영조는 어머니가 죽던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어 "붓을 쥐고 회포를 써 내려가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통곡했다.

이처럼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절절한 회포의 정을 담은 흔적 중에서도 산도(山圖)와 비문만을 정리한 자료집이자 해제집이 최근 이들 자료 소장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도록 형태로 나왔다.

이에는 숙빈최씨의 장지를 물색하고 지관(地官)이 그림 형식으로 올린 산도와 그 지역 풍수론을 정리한 산론(山論), 소릉원 전체와 그 석물(石物) 배치도, 그리고 소릉원 주변 화재 방지선인 화소(火巢) 그림 등이 포함됐다.

나아가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각종 비문 7종의 탁본도 있다.

이번 자료 해제에 관여한 윤진영 장서각 연구원은 이 중에서도 "숙빈최씨의 산도와 산론은 이런 종류의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현존 유일하다"고 말했다.

윤 연구원은 또 "영조는 자기 어머니 관련한 기록은 한장도 버리지 않고 육상궁에 모아뒀다"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 콤플렉스도 느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조의 효심은 극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한중연은 6일 장서각에서 숙빈최씨자료집 출판과 관련, '영조와 숙빈최씨'를 주제로 '제17회 장서각 콜로키엄'을 연다.

정만조 국민대 교수가 '영조와 숙빈 최씨' 을 주제로, 이현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영.정조대 육상국의 조성과 운영'을 주제로 각각 발제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lundi 4 mai 2009

International Pyongyang rejette les sanctions de l'ONU contre des compagnies nord-coréennes / NATIONS UNIES (New York) / 25 avril 2009

Pyongyang rejette la décision du Conseil de sécurité de l'ONU de sanctionner trois compagnies nord-coréennes en réponse au lancement d'un missile par la Corée du Nord le 5 avril dernier, a annoncé aux journalistes le représentant adjoint de ce pays à l'ONU Pak Tok-hun.

Le Comité des sanctions du Conseil de sécurité des Nations unies a pris la décision de geler les comptes de trois compagnies nord-coréennes dans les banques étrangères et d'interrompre la coopération des Etats membres de l'ONU avec ces entreprises. Il s'agit notamment de la Compagnie commerciale coréenne pour le développement minier, de la société coréenne Yongbyong et de la banque commerciale Tanchon considérées comme les plus grandes structures de l'économie nord-coréenne.

"La décision du Conseil de sécurité de décréter des sanctions contre la République démocratique populaire de Corée au motif du lancement d'un satellite constitue une violation de la Charte des Nations unies. Chaque pays a le droit d'utiliser l'espace extra-atmosphérique à des fins pacifiques. C'est la raison pour laquelle nous nous opposons à toute décision de ce genre qui a été ou sera adoptée par le Conseil de sécurité", a indiqué le diplomate nord-coréen.

RIA Novosti.

한국전쟁 소재 책 펴낸 영국인 기자 앤드루 새먼 / 중앙일보 / 2009-04-22

“설마리 전투 영웅들 얘기 담았어요”

영국 런던시 남부에 있는 한 주택가엔 ‘설마리(Solma-ri)’라는 이름의 집이 있다. 이 집의 주인은 샘 머서(Sam Mercer·80)라는 한국전 참전용사다. 58년 전 오늘인 1951년 4월22일, 임진강변의 설마리(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소재) 전투에 참가해 살아남았지만 한 쪽 눈과 한 쪽 다리를 잃고 귀향한 상이용사다. 그는 자신을 돌봐준 영국인 간호사와 결혼한 뒤 꾸민 보금자리를 ‘설마리’로 이름지었다. 21일 통화한 그는 “설마리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2001년 설마리 전투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그 언덕을 다시 밟았는데, 모두 지프차를 타고 갔지만 나는 의족으로 걸어 올라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영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활약했던 설마리 전투를 소재로 책을 펴낸 앤드루 새먼. 자신이 그린 설마리 전장 지도를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영 국인 기자인 앤드루 새먼(42)은 이 광경을 감명깊게 지켜봤다. 그는 97년 말 한국에 와서 영국의 더 타임스와 미국의 워싱턴 타임스에 서울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는 머서를 비롯해 많은 설마리 전투 참전용사를 인터뷰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이야기를 담은 책 『마지막 총알-임진강에서의 전설적인 저항』(가제)을 썼다. 이 책은 22일자로 영국에서 출판된다. 이 날은 설마리 전투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고, ‘런던 책 박람회(London Book Fair)’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새먼은 책 출판에 앞서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인 대니얼 고든과 함께 책의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했다”며 “책 인세로 받을 1만 파운드를 다큐멘터리 제작에 내놓을 생각이지만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에 제작 지원비를 문의해봤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한국정부가 내놓고자 하는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라서 지원이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세계적으로는 ‘잊혀진 전쟁’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과거는 잊겠다고 해서 없어질 수 없습니다. 한국은 눈부신 경제성장도 이뤘고, 오히려 한국전쟁을 잘 활용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사진=전수진 기자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전쟁 끝나자 도로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 중앙일보 / 2009-04-26

모든 위기는 기회를 수반한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이 이반된 조선은 망국의 위기에 몰렸다가 면천법·속오군 같은 개혁 입법으로 회생했다. 그러나 종전(終戰)이 다가오자 선조와 사대부의 마음은 달라졌다. 전시의 개혁입법들이 무력화되면서 나라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임란은 우리에게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자세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임 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 류성룡에게 내려진 호성공신 녹권. 일등공신에 이항복·정권수 이름이 보인다.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선조를 수행했고, 정권수는 명나라 사신으로 가 명군 파병을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았다. 류성룡은 이등공신에 책봉됐으나 이를 사양하면서 국가에서 화원(畵員)을 보내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것도 거부했다(경북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소장). 사진가 권태균

임 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백성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10월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이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군(束伍軍) 제도 같은 개혁입법들을 강행하면서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분제의 완화 내지 철폐는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이 희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향성이 견지된다면 임란은 조선에 되레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선조도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란 초에는 개혁입법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먼저 ‘전쟁영웅 제거’가 시작되었다. 그 희생양이 육전의 영웅 김덕령(金德齡)이었다.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한 예단을 지닌 선조는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면서 직접 친국했다.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조수정실록』은 ‘소문을 들은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며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29년 8월 1일)고 적고 있다. 5000 의병을 거느렸던 김덕령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는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육전 영웅 김덕령 죽이기는 수전 영웅 이순신 제거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김덕령이 체포되기 한 달 전쯤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선조실록』 29년 6월 26일)고 비판했다.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은 선조의 이순신 비난에 적극 동조했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충장사의 김덕령 충효비. 김덕령은 현종 때 신원됐으며 비각은 정조 때 세워진 것이다(왼쪽 사진). 충장사에 있는 김덕령의 친필. 거제도에 있는 적의 간계에 속지 말자는 것과 둔전 개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오른쪽 사진). 사진가 권태균

선 조가 요동 망명을 포기한 것은 일본군과 싸우기로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명나라에서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본국(本國:선조)을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두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비로소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선조실록』 25년 6월 26일)는 기록처럼 명나라에서 선조를 요동의 빈 관아에 유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요동에서 비빈(妃嬪)들을 거느리며 제후 행세를 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선조는 망명을 포기했다.

이순신 제거 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한 일본과 명(明) 사이의 강화협상이 전개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城)에게 조선 남부 4도(道)를 떼어 달라는 ‘할지(割地)’와 명나라 공주를 후비(后妃)로 달라는 ‘납녀(納女)’ 등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선조 30년(1597) 정월 다시 대군을 보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 제거에 달렸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간자(間者:간첩) 요시라(要時羅)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역정보를 조선에 제공하게 했다. 유인책으로 간주한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선조와 서인은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순신을 압송해 형문(刑問)하게 하고 원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했다.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金弘微)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순신이 ‘무군지죄(無君之罪:역적죄)’ ‘부국지죄(負國之罪:국가 반역죄)’ ‘함인지죄(陷人之罪:남(원균)을 함정에 빠트린 죄)’를 저질렀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니 마땅히 율(律)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선조실록』30년 3월 13일)고 말했다.

27 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鄭琢)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원균은 선조 30년(1597) 6월과 7월 한산도와 칠천도(七川島)에서 거듭 대패해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수군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했다. 『이충무공 행록(行錄)』은 이때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설령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신(微臣:미천한 신하)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라고 장계했다고 전한다.

정유재란도 처음에는 임란 초기처럼 일본군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제해권을 되찾으면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 이른바 사대로(四大老)는 8월 28일과 9월 5일 조선 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렇게 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다시 전쟁영웅 제거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번 대상은 류성룡이었다. 선조 31년(1598) 9월 말께부터 류성룡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는데, 남이공(南以恭)은 “(류성룡이) 속오(束伍)·작미(作米)법을 만들고…서예(庶<96B8>)의 천한 신분을 발탁했습니다”고 비난했다. 양반의 특권을 크게 제한한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폐지하고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사대부의 천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공세였다.

선조는 몇 번 반대의 제스처를 취한 후 류성룡을 버리는데, 그가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다. 『서애선생 연보』는 “통제사 이순신은 선생(류성룡)이 논핵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한 듯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크게 탄식했다”고 전한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난중잡록』에서 노량해전 때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고, 적은 선미에 엎드려 일제히 공(公)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실각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노량해전의 전과를 보고하자, 선조는 “수병(水兵)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전사를 애석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당연히 전공자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유정)의 공덕입니다”(『선조실록』32년 2월 2일)면서 임란 극복이 명나라 덕이라는 궤변을 만들어냈다. 선조는 36년(1603) 4월에는 “이제는 마땅히 군공청(軍功廳)을 혁파하여 쓸데없는 관원을 한 명이라도 덜어야 할 것이다”고 말해 논공행상 자체에 불만을 토로했다.

선조 37년(1604)에야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공신이 책봉되는데 문신들인 호성(扈聖)공신이 86명인 데 비해 일본군과 직접 싸운 무신들인 선무(宣武)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호성공신 중에선 내시(內侍)가 24명이고 선조의 말을 관리했던 이마(理馬)가 6명이나 되었다. 선무 1등인 이순신·권율·원균은 모두 사망한 장수들이었는데 당초 2등으로 의정되었던 원균은 선조의 명령으로 1등으로 올라갔다. 선조는 류성룡의 정적이던 서인·북인과 손잡고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모두 무력화했다. 이렇게 조선은 다시 전란 전으로 회귀했다.

임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멸망했어야 하지만 성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없었고, 새 나라를 개창할 주도 세력이 없었다. 양명학은 이단으로 몰렸고, 사대부에 맞설 유일한 지식인 집단인 승려들은 호국(護國)의 틀에 안주했다. 그렇게 조선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형해(形骸)를 유지했다. <선조 끝. 다음부터는 효종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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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현상: 병든 한국사회 징표 / 독립신문 / 2009-04-22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장점 중의 하나는 사회가 분업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분업화가 되었다는 것은 각 분야에 전문가가 존재하여 각 개인이 모두 각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될 수는 없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전문적 견해를 듣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가 세분화 되어 있는 전문 영역의 지식을 모두 다 배울려면 평생을 공부만 하여도 모자란다. 각자가 일을 나누어 각 분야의 전문적 지식의 수준을 한껏 높여 사회전체가 그리고 각자가 전문화의 덕을 볼 수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사회가 전문화되지 못한 원시시대에는 전문가 행세를 한 사람들이 바로 점쟁이들이다. 이들은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도 세상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일이 허다하다. 소위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단골 점쟁이를 두고 있다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매사 로또처럼 찍어서 운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경제 분야를 다루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특정 성향의 네티즌들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는 글들일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용어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그것이 한 때 그의 예측이 맞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마치 ‘경제 대통령’처럼 우상화되었다. 물론 특정 포털 사이트의 특정 성향을 가진 네티즌들이 그를 신화적 존재로 승격시켰다. 그가 신적 존재로 승격되는데는 물론 한국의 정상적 언론인들이 한 몫 했다. 그의 글을 마치 정상적인 경제 평론이나 되는 것처럼 인용하고 기사화하고 신비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경제 분야에 대해 권위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배경이 없다. 전문가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며 그 많은 경제연구소를 운영하는 것도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정말 자격 있는 경제 평론가라면 숨어서 익명으로 글을 올릴 이유가 없다. 정말 한국 경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충고를 하고 싶었다면 더더욱 익명으로 글을 올릴 이유가 없다. 그는 익명의 뒤에서 마치 점쟁이가 점을 치듯 책임 없는 글을 마구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격도 없는 그가 한 때 경제 대통령이란 별명까지 들으며 우상화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지금 깊게 병들어 있다. 바로 국가에 대해 반역을 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진보’인양, 또는 ‘평화’이며 ‘통일’인양, 그리고 마치 성스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자기기만과 자기도취에 빠진 친북좌익반역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사회의 모든 상식이 무너져 버렸다. 이들은 검은색을 흰색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마치 진실을 말하고 있는 양, 또는 자신들의 말이 진리인 양 떠들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바로 반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하고 부풀리고 신격화 한다. 미네르바는 바로 이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위선과 거짓 세력이 우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멀쩡하여야 할 언론인들이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져 있어 이런 가치 없는 글이 마치 대단한 평론이나 되는 것처럼 부풀려 놓았다는 사실이다. 검찰과 법원도 이들의 부풀리기 놀음에 놀아나 미네르바가 마치 대단한 사회적 악인 것처럼 취급하였다. 이 세상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 마디씩 하는 점쟁이들의 발언이 아마 그의 글보다 더 선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큰소리를 친 점쟁이를 검찰에서 고소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미네르바라고 하는 무시해도 좋은 한 네티즌을 구속하여 수사하고 재판까지 하였으나 무죄로 석방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옳고 그름에 대해 올바로 판단할 능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대중의 덧없는 휩쓸림에 사회전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밑바탕에는 바로 건전한 상식을 마비시킨 친북좌익반역세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이 나라의 언론인들이 가치가 없는 논쟁을 크게 부풀리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KBS 라디오에서 그 미네르바란 사람과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다. 라디오 진행자는 그에게 현재 한국 경제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바닥을 친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질문이 어디 있는가? 그가 경제 전문가인가? 한국에 익히 알려진 경제연구소도 많고 경제학자도 많으며 경제 관료도 많은데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바로 그에게 점을 쳐달라는 주문으로밖에 안 들린다. 아무리 공적 자원으로 운영하는 KBS라지만 이런 식으로 전파와 시간을 죽이는 것은 사회의 악이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정직한 사람은 숨는다. 난세에 휘말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 가장 혼란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런 난세를 바로 잡으라고 국가를 세웠고 정권을 만들었다. 정권 담당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점쟁이들이 날뛰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다. 그러나 제대로 살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가를 존중한다. 전문가의 의견이나 점쟁이의 의견이 동일시된다면 마치 항법장치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아 나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제발 정부가 제 역할을 다 해주기 바란다.

[정창인 독립신문 주필] http://blog.chosun.com/cchung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