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25 février 2009

[블로그] 일본 조상도 인정한 ‘우리 독도’의 호적- 한겨레 / 2009-02-23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서유석의 '홀로아리랑'을 지금도 즐겨 부른다. 왠지 예전부터 끌렸다. 하지만 이젠 부를 수 없다. 잘 자지 못하고 떠도는 우리 땅 막내둥이 독도를 대하기가 미안해서다. 지난 연말 개봉된 다큐멘타리 영화 제목, 그대로다. "미안하다 독도야".

고래 심줄이 아무리 질기다한들 일본의 독도 도발보다 못할 것이다. 끝이 없다. 이명박 정부가 삽질하는 사이 그들의 독도 야욕은 볼썽사나울 정도다. 지독하다. 일본 시마네(島根)현 정부가 또 우리를 비웃었다. 벌써 4년째다. 어제(22일)는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표기)의 날' 조례 제정(2005. 3)을 기념하는 행사를 강행했다. 대세를 몰아 국제사회에 더욱 여론몰이 하자는 망언이 빗발쳤다. 참석을 미룬채 행사를 지켜보는 일본 정부는 또 얼마나 대견스러웠겠는가.

한 번 정리하고 싶었다.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자꾸 일본에선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지, 일본 조상들이 스스로 '인정한 우리 독도의 호적'을 알고 싶었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입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의견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억지 망언이라고 일축하고 넘겨버릴 것인가. 그동안 독도지킴이들의 잇따른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아직도 일본 외무성 웹사이트에 버젓이 실려 있다. 이런 터무니없는 내용은 팸플릿으로 제작하여 영어·중국어·독일어·스페인어 등 세계 각국 언어로 옮겨 재외공관에 돌리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장단 맞춰 일본 방위청도 '방위백서'에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것으로 기술했다. 한마디로 선전포고다. 2008년 2월부터 게시된 <다케시마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일관된 입장>이란 제목의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竹島の領有権に関する我が国の一貫した立場 >

竹島は、歴史的事実に照らしても、かつ国際法上も明らかに我が国固有の領土です。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입니다.)

韓国による竹島の占拠は、国際法上何ら根拠がないまま行われている不法占拠であり、韓国がこのような不法占拠に基づいて竹島に対して行ういかなる措置も法的な正当性を有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점거는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 점거이며 한국이 이런 불법 점거에 의거하며 다케시마에서 행하는 어떤 조치도 법적인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韓国側からは、我が国が竹島を実効的に支配し、領有権を確立した以前に、韓国が同島を実効的に支配していたことを示す明確な根拠は提示されていません。

(한국측으로부터 일본이 다케시마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영유권을 확립하기 이전에 한국이 이 섬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어떻게 했을까. 이제 그만 내려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했을까. 말은 걸어 봤을까. 양국관계에 별다른 지장이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자, 그랬을까.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AD 512년) 때부터 엄연한 우리 영토다.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엄연한 우리의 영토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한국을 '독도의 불법 점거국'으로 단정하여 국제사회에 악성루머를 퍼뜨리는 행위야말로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 아닐까. 언제까지 우리 국민은 분노만 하고 있을 것인가. 속이 아프다.

눈총받던 '무주지 선점론' 포기 대신 '고유영토론'

일본이 내세우는 국제법상 주장의 원천은 조선 병탄의 서막을 알린 1905년 강제침탈 조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9월만 해도 일본 정부는 독도 편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어업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같은 해 9월 29일 제출한 '독도 편입 및 대하청원(貸下請願)'을 반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 땅이라는 의혹이 있는 쓸모없는 암초를 편입할 경우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외국 여러 나라들에게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크게 갖게 한다." 당시 일본 내무성 이노우에(井上) 서기관이 한 말이다.

이랬던 일본 정부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05년 1월,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대 격전을 벌이기 위해 나카이 요사부로의 청원을 승인하는 형식으로 '독도의 강제 편입'을 전격 단행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외무성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 정무국장이 나카이 요사부로에게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는 데 극히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에서도 그들의 저의를 읽을 수 있다.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은 독도를 편입하면서 "타국이 이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形迹)이 없는" 무주지인 독도가, 일본인에게 "국제법상 점령된 사실이 있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이른바 무주지 선점론(無主地 先占論)이다. 1962년까지는 그랬다. 당시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 영토취득의 필요 요건으로 '영토 취득의사, 영토취득의 대외 공표 및 실효적 점유'를 들었다. 그러면서 1905년 1월 내각회의의 결정과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의 강치잡이 어로행위 등이 영토취득에 필요한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국제법상 '선점'으로 영토를 유효하게 취득하기 위해서는 임자 없는 땅인 무주지에 대해 취득할 의사를 갖고, 다른 나라에 앞서 실효적으로 점유해야 한다. 일본의 1905년 강제침탈 조치가 국제법상 유효한 선점이 될 수 있는가.

미안하게도 1905년 강탈 조치 당시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다. 독도가 1905년 1월 이전에, 다시 말해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이래 조선의 고유영토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 고려사 지리지(1451년), 세종실록 지리지(1423년 및 1454년), 성종실록, 동국여지승람(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숙종실록, 만기요람 군정편(1808년), 증보동국문헌비고(1792년), 증보문헌비고(1908년)와 기타 여러 문헌에 나와 있다. 우산국이 신라에 병합되기 이전까지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 2개 섬을 거느린 고대 해상 소왕국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 독도의 이름은 '우산도'였다. 국적이 없는 무주지가 아니었다.

일본 기록에 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1667년)부터다. 그것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이고 일본영토의 서북경계는 은주(隱岐島)를 한계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독도를 울릉군수의 관할 아래 두었다. 이는 일본의 1905년 강탈조치보다 4년 이상 앞선 조치로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1905년 일본 내각의 독도 강탈 조치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니 지적(地籍)에 넣지 말라"(1877년)고 한 메이지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인 태정관과 내무성의 명령과도 완전히 배치된다.

그리고, 실효적 점유가 '평온(平穩)하고, 공연(公然)'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5년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에 고문을 두어 내정과 외교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당시 군사전략상 필요하다면 조선의 어떠한 지역이든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통제되고 있었다. 1905년의 상태를 '평온'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대외에 공표했다는 시마네현 고시(1905. 2)도 전혀 '공연(公然)하지 않게' 일부 공무원들만이 인지할 수 있는 회람용에 그쳤다. 그리고 고시 이후에 나온 시마네현 지도에조차 독도가 표시되지 않았다.(1917년, 1935년, 1940년 발행 지도) 오히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초등지리서부도'는 독도를 한국(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한국이 독도의 침탈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일본 내각회의에서 침탈 결정이 되고 1년이 지난 뒤였다. 즉 1906년 3월 28일 일본 지방공무원들이 울릉도를 방문하면서였다. 하지만 이 때는 변변한 항의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항의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독도에는 우리 조선의 슬픈 역사가 운명처럼 뒤엉켜 있다.

1905년 이전에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 정부는 1962년 7월 13일 공식 입장에서 '무주지 선점론'을 슬그머니 빼버렸다. 무주지인 독도를 선점했다는 이론이 더 는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궤변이 '고유영토론'이다.

우리가 언제 울릉도와 독도를 포기했었나?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은 조선의 공도정책(空島政策)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쇄환(刷還)·쇄출(刷出)정책으로도 표현되는 이 조선의 공도정책은 그 유래가 15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정부는 1403년(태종 3년) 8월 강원도에서 올라온 보고에 기초하여 울릉도 거주민에게 육지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고려 말 이후 계속된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반드시 왜구의 노략질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지역적으로 가까운 강원도까지 위태롭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조정은 울릉도 거주민을 설득하여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삼척의 만호인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농기구도 지급하고 군대도 파견할 것이냐, 아니면 강제로 이주시킬 것이냐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결국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자도 있으니 강제 이주시키자는 쪽으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1417년, 울릉도민 이주정책은 확정되고 곧바로 시행됐다. 1438년까지 섬주민은 모두 육지로 이주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공도정책을 '영토포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 무인도라고 하여 영토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공도정책으로 텅 빈 섬 역시 영토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조정은 17세기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어와 벌목이 문제가 되자 일본측에 울릉도 도해금지를 요구하여 약속을 받아냈고, 이후 2년마다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일본인들의 침범 여부를 감시한 사실이 있다. 조선이 영토를 포기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한마디로 궤변에 불과하다.

또 한 가지. '독도의 실효적 경영'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본은 17세기 울릉도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발견하고 선박의 기항지로 이용했고, 17세기 중반에는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를 받아 실효적으로 경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1696년 일본 에도(江戶) 막부 정부가 조선령임을 인정하여 울릉도를 반환할 때 독도까지 반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도 억지다. 일본이 '울릉도를 실효적으로 경영했다'는 것은 공도정책으로 주민들이 살고 있지 않은 섬을 주인 몰래 도둑질한 것이나 다름없다.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에 '조선국으로부터 거류를 위해 잠시 파견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송도도해면허 자체가 외국 출입을 허가한다는 뜻인데,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반증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도해면허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독도를 실효적으로 경영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일본은 1905년 독도침탈 결정 당시 독도를 자국의 고유영토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가 타국이 점유하지 않은 무인도이므로 편입하게 된 것이라고 명시하여 무리하게 국제법상 무주지 선점을 주장했다. 그들 스스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님을 고백하는 꼴이 돼버렸다.

게다가 1696년 울릉도를 반환할 때 독도까지 반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메이지 유신기인 1877년 내무성 질품서에서 '구정부의 평의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고 결정한 것과도 완전히 배치된다.

우리나라는 역사 이래 울릉도와 독도를 포기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만기요람(1808년) 군정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우산국의 영토'로서, 우산국 이래 독도는 울릉도와 운명을 같이해왔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거나 발견된 섬도 아니다.

일본의 조상들도 조선 영토로 인정했다

오늘날 일본의 독도 망언이 헛된 망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는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인들의 독도인식이 지금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붕괴시킨 메이지 정부는 해외 진출로 내환을 극복하고자 했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일본 외무성은 태정관의 지시를 받아 비밀리에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등 고위관료들을 부산에 파견했다. 조선과의 국교 재개 및 병탄의 가능성을 내탐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여기에는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가 조선의 영토로 되어 있는 전말을 조사하라'는 지시사항도 들어 있었다.

1870년 조선을 내탐하고 결과를 보고한 문서가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다. 이 보고서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령임을 확인하고 있다. 관련보고서인 죽도 및 송도가 조선에 부속하게 된 전말(竹島松島朝鮮附屬ニ相成候始末, 일본외무성, 1870. 5. 15) 자료에도 독도가 한국령이고,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1877년 메이지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더욱 분명하게 인정했다. 메이지유신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 정부는 지적을 조사하고 지도를 편제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일본 내무성은 공문(1876. 10. 16)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관한 질의를 시마네현으로부터 받았다. 내무성은 약 5개월에 걸친 심층 검토 끝에 이 건은 1696년에 끝난 문제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서 '일본과 관계가 없다(本邦關係無之)'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877년 3월 17일, 내무성은 '영토의 가부를 결정하는 문제는 중대한 일'이라며 태정관에 최종 결심을 요구했다. 3월 20일 태정관은 '품의한 취지의 울릉도 외 1도의 건에 대해서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하여 3월 29일 내무성에 내려 보냈다. 내무성은 이 지령문을 4월 9일자로 다시 시마네현에 전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와 같은 메이지 정부의 독도 인식은 일본 해군성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1876년과 1887년에 발간한 조선동해안도, 1894년에 발간한 조선수로지 등에 독도를 모두 조선 부속령으로 표기했다.

만약 일본이 독도가 조선의 영토가 아니라고 인식했다면 당연히 일본 서북해안도(西北海岸圖)나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에 포함시켰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 해군성은 1876년 한 일본인이 이른바 울릉도 개척원인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를 외무성에 제출한 일로 실제 울릉도 주변을 실측한 바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1903년 1월 어민단체 흑룡회에서 발행한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에는 '맑은 날 울릉도의 높은 산봉우리에서 (독도를) 볼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대한제국의 강원도에 소속된 섬으로 독도를 바라보았다. 1904년 독도 침탈의 계기를 마련한 나카이요사브로(中井養三郞)마저 다른 어부들과 같이 '독도가 울릉도에 부속된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그가 직접 쓴 '독도경영개요'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 해군성 수로부의 한 자료(鬱陵島及竹刀, 1933. 1)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취급하여 일본 스스로 두 섬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독도가 한국령인 울릉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의 섬'이라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연합군최고사령부 지령(SCAPIN) 제677호(1946. 1. 29)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시킬 대상을 결정한 문서이다. 그 내용 중 3항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됨을 명백히 규정하여 독도가 한국령임을 증명하는 귀중한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제677호에는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지역에 독도를 'Liancourt Rocks(Take island)'로 표시하면서 한국 영토로 부속시켰다.

얼마 전에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완전히 거짓임을 드러내는 일본 법령 2개가 발견됐다. 일본이 1951년 2월 13일 공포한 대장성령 4호와 6월 6일 공포한 총리부령 24호가 그것이다. 조선 총독부 소유 일본재산을 정리하는 것과 관련된 법령들이다. 일본은 대장성령에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 및 치시마 열도와 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섬을 모두 일본 자국 영유권 내 부속도서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했다. 총리부령에서는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부속도서'에서 제외했다. 일본이 독도가 부속도서가 아니라는 점을 법률로 공식 인정한 귀중한 자료다.

일본과 한국 정부에게 보내는 충고

독도가 한국령임을 입증하는 옛지도들은 따로 정리했다. 이 자료들의 대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독도를 둘러싼 일련의 기록물이 아니다. 일본 선조들이 우리 땅 독도를 인정한 자료들이다. 자기들 조상들이 시인한 것을 감추고 오늘날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부르며 망언을 일삼는 부끄러움은 마땅히 접어야 할 것이다. '독도는 일본 땅이다'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가지려면, 자기 조상들이 남긴 발자취를 먼저 전면으로 부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렇지 않겠다면, 이 또한 정치·경제·군사상 허황된 욕심을 부리는 식민의 야욕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지난 어두운 역사로부터 일본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독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끌어올려 최종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서 독도가 자국 영토임을 인정받기 위한 명분임을 모르지 않는다. 독도의 정치·경제·군사적 가치가 하늘을 찌르기에.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반성을 회피하는 것도 모자라 과거사 왜곡, 독도 침탈 등을 일삼으면서 끊임없는 궤변과 망언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역사를 난도질하고, 시대의 진실을 왜곡한다면 양국 관계의 '미래'는 없다. 한일관계는 급냉동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안겨준 제국주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시아 민중들에게 남을 짓밟으면서 자국의 욕심만을 채우는 열등 국가로 영원히 기억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라건대, 승냥이처럼 굴지 말고 독도에서 깨끗이 물러나라.

이명박 정부에게 요구한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망언에 대해 국민 모두가 경악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답답한 영토 분쟁에 여전히 어물쩍거리는 정부 태도가 못마땅하다. 어제 오늘이 아니다. 여러 정권이 '독도 망언'에 핏대를 올렸지만, 여태 달라진 것은 없다. 국민의 감정에 매달려 추임새나 넣는 짓은 그만 둘 때가 됐다. 이것은 전쟁이다. 독도 침탈을 서푼어치 외교 수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소심하게 굴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 독도가 홀로 흐르다 일본 섬으로 불시착 되는 일이 없도록 죽을 각오로 싸워라. Ø굴렁쇠

≫독도가 한국령임을 입증하는 옛지도들

≫우리나라를 조롱하는 문제의 일본 외무성 웹사이트

≫일본 외무성의 독도 영유권 주장 한국어판 자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도와 동해를 잃어버릴 수 있는 이유 - 오마이뉴스 / 2009-02-17

리투아니아의 독립기념일인 오늘도 하늘에서 풀풀 눈발이 날리고 있습니다. 영원히 봄을 맞지 못할 것처럼, 온하늘이 꾸덕꾸덕하고 우중충한 하루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바대로, 저는 이곳 대학교에서 한국학 강의를 맡고 있습니다. 한국학 강의를 시작한 지가 얼마 안되다 보니, 우리 과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고, 그러다 보니 한국 관련 자료나 서적들이 여러 모로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래도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서 애써 주시는 여러 민간단체들의 도움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민간단체들의 관심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부 관련단체에서의 무관심은 생각보다 더 심하다는 느낌입니다. 올해 있을 저희 학교의 행사와 관련해서 정부 측의 지원을 바라며 여기저기 부탁을 해봤지만, 썩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뭐, 행사 첫해이고, 또 시작하는 과정이니 처음부터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게다가 아직 리투아니아에는 한국 대사관도 없고, 나라의 경제 사정도 어려운데, 리투아니아 같은 작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정부가 일일히 신경쓸 여유가 없을 겁니다.

앞으로 돈 들어갈 사업이 산더미 같은데, 한푼 두분 모아서 4대강 정비 사업에 써야죠. 나랏님 말로는 그게 돈 버는 일이라니 우리 같은 무지한 민초들은 그냥 따를 수 밖에요.

우리나라 정부가 이런 작은 나라에서의 홍보에 등한시 하고 있는 사이, 우리의 영원한 이웃이나 맞수는 일본은 이곳에서 진작부터 엄청난 홍보와 '판촉'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 이곳에 대사관도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곤 하지만, 경제도 우리보다 여러 모로 나은 것은 사실이고요.

자, 그럼, 그 부자나라 일본에서 리투아니아에서 벌이고 있는 판촉 활동을 잘 한번 살펴볼까요?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일본은 '일본해' 명칭과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주장이 담긴 책자를, 우리는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은 이 작은 나라에도 보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시아 지역학과'인 우리 과의 도서관에도 그 책자들은 보기 좋게 전시되어있습니다.



굳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친절하게 한국어로까지 설명이 되어있는 일본해 명칭에 관한 자료집.




보기 좋고 읽기 쉽게 정리된 자료집. 이 책 첫부분에는, 한국과 북한이 동해라는 명칭을 홍보하는 것에 대한 대처로 이 책을 펴냈다고 명시 되어있어서, 한국 정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제시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은 그르고 일본이 옳다라고 말하기 위함이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된 고대 지도에서 '한국해'와 '일본해' 어느 것이 더 많이 적혀있는가를 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연코일본해가 더 많습닏. 그러나 정작 우리가 주장하는 '동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더군요. 빌뉴스 대학교에서 우연히 보게된 18세기 세계지도에서도 Mare Oriental (동해)이라고 적힌 것을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한국해보다 일본해가 월등히 많을 것은 당연할 듯. 혹시 한국이 일본해처럼 '한국해'라 부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 역시 독도 영유권에 관한 일본 정부의 주장과 증거자료를 모아서 펴낸 책자입니다.




내용이 영어로 번역되어있지는 않지만, 우리 일본어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우리 학생들은 충분히 읽울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책 역시 한국과 북한의 주장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놓았더군요.



이것은 약간 다른 내용이지만, 일왕 내외에 대한 자료집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겠지만, 일왕 내외의 대외 활동을 소개하는 부분에 발트3국 각국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들이 맨 처음으로 나와있습니다. 발간처는 일본 외무성이던데, 발트3국 국민들을 위해서 일부러 편집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자료들에도 이 내용이 맨 먼저 들어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약 특별히 편집한 거라면, 발트3국 같은 작은 나라를 위해 이런 섬세한 데까지 관심을 보이는 일본 외무성의 활동에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 보급된 책자에도 똑같이 실려있다면, 일본이 발트3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되겠죠.




제가 일본어 공부를 그만 둔지가 옛날이라서, 내용을 거의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북한에 살고 있는 일본교민들의 생활에 관한 책인 것 같습니다. (이건 내용과 많은 관계는 없지만, 그냥 같이 발견한 책이라...)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에 이런 작은 나라에서 펼치는 홍보활동에 딴지를 걸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성실하고 꼼꼼하게 일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남한 반 정도 크기에 360만 인구만이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면적과 인구는 일본과 한국 모두가 보기에도 동일한 수치입니다. 그러나 그 수치를 '작고 보잘 것 없다'고 판단하느냐 아니면,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느냐는 그 국가에 대한 정책 수립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과가 리투아니아를 포함해서 발트3국 전체에서 유일이자 최대규모의 아시아 지역학과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탈린 대학교에도 있지만 거긴 한국어를 제외한 한국학 강의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졸업 후 리투아니아 정계에서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며, 그리고 대학시절에 얻은 경헙과 지식은 앞으로의 정책 결정 방향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동해와 독도와 관련해서 리투아니아의 입장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 과연 그들은 어느 편에서 평가를 하게 될까요? 그렇게 본다면, 이 문제는 단지 눈 앞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을 떠나서 엄청난 결과를 양산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을 민간단체에서 담당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에서 관심 분야를 더욱 넓히지 않는 한 우린 영원히 일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소수의 민간단체를 제외하곤 정부나 대사관에서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는 나라권에 대해서 그 누가 공부를 하려고 할까요. 리투아니아에 대사관이 없어서 한국 정부의 관심이 없다는 핑계로 언제까지 둘러대야하나요.

저는 위의 책들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구석진 곳에 감추지 않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두었습니다. 그것도 그 아이들이 공부해야할 소중한 자료들이니까요. 그러나 그 책들 옆에 우리나라의 입장을 대변한 책들을 같이 전시할 수 있도록, 정부 관련단체에서도 많은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 어찌 보면 삽질해서 강 뒤짚어 헤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고추,임진왜란전부터 한국에 존재했다"] - 매일경제 / 2009-02-19

식품硏 주장..역사.인류학계와 논쟁예고

한국의 매운맛을 상징하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는 통설과 달리, 훨씬 이전부터 국내에 고추가 존재하고 식용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여러 고서(古書)에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고추장에 대한 기록은 조선 세종과 세조 때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문헌기록도 있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돼 학계에서 논란이 있을 전망이다.

18일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경란 책임연구원은 연구원이 발간하는 계간 「한맛.한얼」에 게재한 고추의 전래에 대한 연구에서 통설인 `일본 전래설`을 고문헌과 생물학적 분석을 토대로 정면 부인했다.

권 박사팀은 "일본 전래설의 핵심은 콜럼부스가 중앙아메리카에서 `아히`(aji)라는 고추를 유럽으로 가져간 뒤 일본을 통해 들어와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인도로 재전파됐다는 것이나 `아히`는 생물학적, 농경사학적 분석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 고유의 고추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대영백과사전에도 고추의 원산지로 중앙아메리카 외에 중국,인도도 기록되고 있으며 아시아 대륙, 특히 중국에 수천년 전부터 고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고문헌 기록이 다량 존재한다는 게 권 박사팀의 연구 결과다.

권 박사팀은 국내 고문헌에도 임진왜란 이전에 고추의 존재를 알려주는 문헌이 다수 존재한다면서 그 근거로 임란 100여년전 문헌인 조선 성종 18년(1487년)의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과 중종 22년(1527년) 발간된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꼽았다.

구급간이방에는 한자 `椒`(초)에 한글로 `고쵸`라는 설명이 매우 선명하게 나오고 훈몽자회 역시 `고쵸`를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역사학계 등에서 `椒`를 고추가 아닌 천초(산초)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고쵸`라는 설명이 붙어있다"고 주장했다.

고추장 역시 조선 세종 15년(1433년) 발간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세조 6년(1천460년)의 식료찬요(食療纂要)에 `椒醬`(초장)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고 권 박사팀은 지적했다.

1670년대 문헌에 `순창 고추장(淳昌椒醬)이 전국에 유명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봤을 때 향약집성방과 식료찬요의 `椒醬`은 고추장임이 분명하다는 게 연구팀의 주장이다.

나아가 연구팀은 고추와 고추장이 중앙아메리카가 아닌 중국에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근거로 중국 당나라 선종(850년. 신라 문성왕 12년) 때 발간된 중국문헌 식의심감(食醫心鑑)에 닭 관련 음식을 설명하며 `椒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는 점을 들었다.

권 박사는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중앙아메리카와 일본을 통한 국내 고추 전래설에 의문을 갖고 15년 전부터 이 문제를 연구해왔다"면서 "인류학회나 식문화학회에 토론을 제안했으며 6월께 일정을 잡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jsking@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종수 기자

lundi 23 février 2009

[기고]'88만원 세대'가 바라보는 '<88만원 세대> 논쟁'(上) / 프레시안뉴스 / 2009-02-10

'세대경제론'이라는 틀로 한국의 20대 문제를 처음으로 조망해 책 제목 자체가 개념어로 굳어진 <88만원 세대>를 둘러싼 논란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젊 은 보수논객을 자처하는 변희재 씨가 '실크세대론'을 주창하면서 끼어들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다. 공저자인 박권일 씨는 <88만원 세대>가 세대내 '계급'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 했다는 일종의 자기 비판을 하면서 함께 책을 쓴 우석훈 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변희재 씨의 글은 논외로 치더라도, 박권일 씨가 제기한 '세대론'과 '계급론'의 문제는 진보진영 내에서 충분히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논란과 관련해 20대 논객 중 한 명인 한윤형(yhhan.tistory.com) 씨가 기고를 보내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1. 왜 세대론과 계급론은 대립하지 않는가?

얼마 전 변희재 실크로드 CEO 포럼 회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장문의 글 "실크세대론과 88만원 세대론의 소통을 위하여" (<조선일보> 2009년 1월 27일)는 많은 파장을 낳았다. 그것이 일전에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이 변희재에게 건넨 '덕담'(<한겨레> 2009년 1월 15일)에 대한 반응이란 점에서 더 그랬다. 역시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자유기고가 박권일은 레디앙 기고문(<레디앙> 2009년 1월 30일)에서 우석훈이 조선일보의 독우물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우 석훈이 변희재를 상대해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가 가열찬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박권일의 글은 88만원 세대 담론을 그릇되게 활용하는 어떤 조류에 대한 탁월한 지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의 말이 수용되는 방식이다. 변희재는 재차 조선일보에 쓴 "88만원세대론은 계급투쟁용이라 고백한 공저자 박권일" (<조선일보> 2009년 2월 7일) 이란 글을 통해 '드디어 그들은 세대론이 계급론이라는 사실을 실토했다. 386세대의 계급투쟁의 방식이다. 타도하라!!'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부 좌파들은 "세대론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계급론만이 킹왕짱이라는 사실을 저자 스스로 인정했다. 세대론은 파탄났다. 계급!!! 계급!!!! 계급!!!!!"을 부르짖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평소의 논의의 정합성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내가 폄하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 놓고 생각해보면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고민해보지 않은 분들이 아닌가 싶다. 박권일의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을 '계급'이란 단어 하나로 에스컬레이션시켜 '이념 투쟁'을 하자고 덤비는 꼴을 보니 말이다.

▲ <88만원 세대> 책 표지. ⓒ프레시안
'88 만원 세대'론이 제기한 사회 문제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1000유로 세대', 심지어 이제는 '700유로 세대'라는 말까지 운위되는 유럽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도성장 시대의 종언과 고용없는 성장으로 인해 윗 세대들에 비해 평생 기대소득이 적을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유달리도 가혹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게임의 룰이다. 전자 때문에 한국 사회는 청년실업 문제를 온전히 떨칠 수는 없지만, 후자 때문에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만 그 열악함이 당장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빈곤층이 아닌 젊은이들의 경우 아직 그들의 부모들이 자식들을 건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88만원 세대>에 이런 현상에 대한 지적이 비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쉽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부모와 한 팀이 되어 용돈을 받으며 자발적으로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로 뛰어드는 사실을 지적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을 가장 불쌍한 이들로만 묘사한 것도 아쉽다. 하지만 한권의 책이 모든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88만원 세대>는 편하게 자라났지만 열정도 없고 부모 재산을 축내며 게으름을 피워 대한민국을 망칠 천형을 타고 났다고 지금껏 묘사되었던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만으로도 크나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좌파들은 이런 문제들을 '세대론'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말한다. 무조건 계급문제라는 것이다. 진보좌파들이 말하는 모든 논의는 무조건 계급투쟁하자는 얘기라는 변희재 류의 독법과 어쩌면 이리 판박이인지. 뭐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계급론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일까. 그럼 학벌문제라는 말도 쓰지 말고 계급론이라 부르고, 비정규직 문제라는 말도 쓰지 말고 계급문제라고 부르며,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 문제도 계급문제라고 부르거나 자본가들 내부의 문제니까 신경쓰지 말기로 하자, 뭐 이런 얘긴가? 천하에 한심한 족속들이다.

당 신들 말이 맞다. 변희재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이유도 계급적이고, 우리 동네 어떤 할머니가 상습적으로 쓰레기를 투기하는 이유도 계급적이고, 바바리맨이 여고 앞에서 바바리를 벗어 제끼는 이유도 계급적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좌파 바바리맨들이 바바리를 벗어 제끼고 제 거시기가 붉다는 것을 자랑하는 습속도 계급적인 것으로 보인다. 안 그런가?

나는 <88만원 세대>에서 두드러진 세대론적 접근의 함의는, 계층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지금까지 내가 이긴다고 믿고 있었던 사회의 평균적인 인간들이 패배할 거라는 사실을 폭로한'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게 잔인한 사회다. 그 약자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한국의 중간계급들은 하위 30%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다투어 빚을 내면서까지 제 자식을 대학에 보내 85%라는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률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88만원 세대'는 당신들 자녀의 95%가 패배자가 될 거라고 말한다. "약자는 죽어도 돼. 그래야 사회가 더 발전하거든."이라고 말하던 이들에게, "당신네 자식이 바로 그 죽어가는 약자가 될 거요."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더 밀어주고 사회적 약자를 철저하게 외면하던 대한민국식 게임의 룰이 파탄나는 현장을 <88만원 세대>는 조망하고 있다. 따라서 '88만원 세대'의 문제접근은 지금껏 대한민국이란 사회가 작동하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다른 고도화된 자본주의 공업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대 간 불균형 현상을 겪으면서, 또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방치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모조리 얻어맞게 된 것이다. 지금껏 방치했던 문제들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형국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오늘날의 20대들의 처지를 반추하면서 이 사회의 문제를 추려내야 하고, 그 추려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론과 계급론은 대립된다고 볼 수 없다.

따 라서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고 그 소홀히 취급된 문제들을 언급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88만원 세대론'을 건전한 담론으로 만들 것이라는 박권일의 판단은 영원히 진실이다. 문제는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 세대론의 주창자 우석훈이 현재 취하고 있는 정치적인 스탠스이다.

2. 우석훈의 '세대론적 환원'의 문제에 대해

언 어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사람은 제 생각을 담을 도구로 하나의 말을 선택하겠지만, 그 말을 계속 쓰다보면 그의 생각자체가 말에 얽매이게 된다. <88만원 세대>를 집필할 때 박권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입장이었을 우석훈이 일종의 '세대론적 환원'을 감행하게 된 건 '88만원 세대' 담론의 창시자로서 그 말을 자꾸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 일종의 말의 덫에 걸려들게 된 것일 거라고 좋게 해석해 주고 싶다. 말하자면 건전한 책임윤리가 가져온 역작용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우석훈이 변희재를 상대해 준 것 자체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변희재를 의미있는 존재로 파악하게 된 까닭이 그의 평소 지론에 맞닿아 있다면, 나는 그 지론을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지론은 사실에 어긋나고 전략적으로도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 지론에 대해 내가 붙인 이름이 바로 '세대론적 환원'이다.

글 첫부분에 간략하게 설명했던 세대론과 계급론의 한국적인 중첩에 대해 이해한다면, 우리는 '20대들이 문제이긴 하되, 20대만이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대안이란 것도 그 사실을 이해하는 틀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우석훈은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 마치 '20대들만을 위하는'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인양 굴었다. 변희재의 준동 이후에야 그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우석훈이 그 지점에서 이미 세대론을 잘못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에 줄기차게 밀었던 두 개의 정책적인 대안이 '20대 국회의원'론과 '20대 아파트'론이다. 20대 국회의원론의 경우 그가 2008년 총선 정국에서 직접 경향신문에서 언급 (<경향신문> 2008년 3월 6일)하기도 했고,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이 경향신문 블로그인 지면을 통해 소개(<경향신문> 2008년 3월 13일)되기도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하지만 20대 아파트론의 경우 공식적인 지면에서 논의 된 일이 없고 우석훈의 '세대론적 환원'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얘기를 해보아야겠다.

모 두 알다시피 <88만원 세대>는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주거권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그 접근방식에 대해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우석훈이 20대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 아파트'란 것을 지어서 공급하자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우석훈은 프랑스에서 나온 정책이란 이유로 이것의 합당함을 강변한 것으로 안다. 동의할 수 없다. 프랑스와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첫째, 프랑스에서 아파트는 빈민층이 사는 주거공간이지만, 한국의 경우 아파트는 모든 이들의 욕망의 대상이다. 한국 실정에 맞추려면 차라리 지금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염가의 고시원을 공급해주겠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일일 텐데, 부모님의 집에 기거하는 대다수의 20대들은 그런 식의 '독립'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님 집에서 비비는 것이 훨씬 더 높은 생활의 질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 고시원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으니, 정말로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면 고시원 크기를 늘려달라고 시위하자고 주장하는 쪽이 더 나은 일이겠다.

둘째, 많은 경우 한국에서 가장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20대라고 볼 수 없다. 가령 막 아이를 낳은 30대 신혼부부를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이야말로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만약에 20대 아파트라는 것이 실제로 건설되어, 이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독립하기도 싫어하는 일군의 20대들에게 집에서 나오라는 메시지만 던지게 된다면, 이보다 코미디 같은 일이 어디 있으랴.

이런 문제제기는 '88만원 세대' 담론의 현실적인 조건을 챙기자는 것이다. 20대 아파트론이 택도 없는 소리가 되는 이유는 1) 한국 사회에 20대가 아닌 사회적인 약자들이 넘쳐난다는 경제적인 현실과, 2) 20대들의 권리박탈이 그들 부모와의 유대 아래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화적인 현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발성이 환경에 의해 강요된 자발성이라는 지적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번에 그런 환경적 조건과 그것을 통해 형성된 문화적 조건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우석훈의 영향으로 '20대 아파트'론을 말하는 희망청 상근자들에게 왜 이 정책이 말도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해 나름대로 열변을 토한 바가 있다. 내 말에 그들이 동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나도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88만원 세대론의 정립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한 셈이다.

나는 원래 우석훈의 그와 같은 실책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천명한 '20대 국회의원'론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 공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했고, (나는 우석훈의 말을 좇아 '20대 비례대표론'을 주장한 진보신당 학생당원들과도 논쟁을 했다.) 그가 블로그에서 얘기하고 희망청 상근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20대 아파트'론에 대해서는 희망청 상근자들을 향해 문제점을 제기한바 있으니 다른 비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석훈이 변희재 류의 창업운동을 '세대론에 대한 우파적 대응'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대론적 환원'에 대한 비판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변희재의 활동은 어떤 측면에서 보든 세대론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하로는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음 편에 계속)

/한윤형 블로거, 진보신당 학생당원

[야!한국사회] 미네르바, 흉악범, 엑스파일 / 한겨레 / 2009-02-12

흉악범죄자 얼굴 공개 논쟁이 뜨겁다. 그 이전에 일부 언론의 ‘미네르바’ 실명 보도가 있었고, 그 와중에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에게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다. ‘엑스파일’을 보도한 이상호 기자 역시 2006년 항소심 재판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가 인정되었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미네르바 실명 보도, 흉악범 얼굴 공개, ‘엑스파일’ 실명 공개, 이 사건들은 동일한 문제의 다른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적 인물’의 실명 보도, 알권리 등 쟁점의 기본 구조가 유사하고, 문제의 근본은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놓여 있다.

‘엑스파일’ 보도 사건에서 항소심 법원은 “실명을 공개함으로써 당사자의 인격권을 더욱 크게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언론의 자유와 의무, 국민의 알 권리를 ‘크게’ 간과한 것이다. 독수독과(毒樹毒果·위법수집 증거 배제)의 원칙이나 통신비밀보호법이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제한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엑스파일의 대화 당사자들이 누구인지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법선거를 도모하고, 권력자의 떡값을 준비하는 ‘힘센’ 사람들이 어떠한 지위를 이용하여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시민들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공적 인물에 대한 정당한 관심사를 보도한 것이었고, 법은 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 강씨의 경우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언론 보도를 제한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공공의 이익이 크다면 공개할 수 있다는 원칙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공의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각심 고취를 통한 범죄 예방이 얼굴 공개로 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 가족의 분노는 백번 공감한다. 그러나 피해자 인권은 재판 절차 참여권이나 양형에 관한 의견 진술 제도 등을 통해서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문제다. 분노를 치유하기 위한 공개 주장은 언론에 형벌권을 주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죄 수사를 목적으로 공개하자고 한다면, 그건 무죄추정의 원칙 문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언론과의 관계에서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지만, 수사기관에 대해서는 예외를 허용할 수 없는 원칙이다.

<조선일보>가 ‘미네르바’의 실명을 보도한 이후 많은 언론들이 뒤를 이었다. 실명에 이어 학력, 성적, 집 평수와 여동생의 근황까지 보도했다. 범죄 성립 여부가 법리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미네르바의 실명 공개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관련되는 문제다. ‘제한적 공인이론’을 적용하더라도, 그가 공인이 되었다는 것과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는 ‘익명의 공인’, ‘미네르바’여야 한다.

‘신정아 사건’과 고인이 된 ‘최진실 사채설’ 보도도 같은 맥락이다. 이 사건들 모두는 단순히 얼굴이나 실명 공개의 문제가 아니다. ‘엑스파일’ 보도에는 자본·언론·검찰 권력의 문제가 놓여 있었고, ‘최진실 사채설’ 보도는 결과적으로 사이버모욕죄 신설 논란을 이끌었다. 미네르바 실명 보도는 ‘익명의 그늘에 숨어’라는 표현의 자유 제한 논리가 깔려 있다. 일부 언론의 얼굴 공개는 간접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겨냥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형 집행으로 나가고 있다.

얼굴 공개 논쟁은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언론의 상업적 전략을 넘어서는 정치적 전략이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지지하지만, 자유로 포장된 남용을 걸러내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엑스파일’ 사건의 유무죄 판단은 법원에 있지만, 나머지는 우리의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 책임 있는 자유를 언론에 선물할 때이다.

정정훈 변호사

[강준만칼럼] 기우뚱한 균형 / 한겨레 / 2009-02-15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개혁·진보 세력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데도 여론은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혹 이 물음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철학자 김진석이 내놓은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걸 권하고 싶다.

지난여름 김진석이 그 제목으로 책을 냈을 때, 나는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미 책에 김진석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기우뚱한 균형을 잡는 일은 ‘뻔뻔하고 쫀쫀하고 구차한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각자 자기 진영을 갖고 살아가지만, ‘기우뚱한 균형’은 진영 의식에서 벗어날 걸 요구한다.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반드시 ‘우충좌돌’해야 한다. 왜 ‘좌충우돌’이 아니라 ‘우충좌돌’인가? “이제까지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쳤던 한국의 사회정치적 혹은 이념적 상황을 수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간에 그냥 서 있기만 하려는 중도와는 다르다. “중도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의미로 확보되려면, 오른쪽과 왼쪽 양편의 극단과 부딪치는 일이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김진석의 책은 내내 기우뚱 균형을 잡느라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대단히 도발적인 주장들을 담고 있다. 중도좌파로서 그는 진보세력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진보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강하게 역설하기만 하면 진보진영에서 지지를 누리는 기존 풍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기를 촉구하고 있다. 아무리 옳아도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을 상대로 한 정치가 아니라 대중과 여론을 상대로 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김진석은 진보세력이 일방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세속화’와 ‘상품화’를 다시 볼 걸 요구한다. 자기 자신은 세속화와 상품화를 껴안으면서도 사회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기준을 적용해 비판하는 진보세력의 성찰을 제안한다. 김진석은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가슴 아픈 것은 시장자유주의자와 부딪치는 것보다 진보주의자와 부딪친 일이다”라고 토로한다. 진보주의자들의 근본주의적 완고함이 시장자유주의자들의 입지를 오히려 넓혀주는 역설에 대한 고발인 셈이다.

김진석은 한국 사회를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잣대로 후려치는 일은 조심했으면 싶다”며 “한국 사회의 막가는 상황을 비판하지 말자는 건 아니다. 비판하더라도 조심하거나 차분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을 지난 세기의 선진국과 비교하면서 거칠게 비판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보시다시피, 이런 ‘기우뚱한 균형’은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받기 어렵다. 아니 욕만 먹기 십상이다. 진영이 없으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기도 어렵다.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도 주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스트레스’만 줄 가능성이 높다. 양쪽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우충좌돌해야 하니, 그게 어디 사람 할 짓인가.

그러나 ‘기우뚱한 균형’이 없이는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하기 어렵다. 누가 옳건 그르건 일방적인 완승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양자택일형 옳고 그름을 따지고 밀어붙이는 데에 국민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다. 우리 모두 ‘기우뚱한 균형’을 읽으면서 우리 후손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특히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이 지난 10년에 대한 원한과 그로 인해 뒤틀린 시각을 이제 그만 거두고 상호 존중과 소통을 기반으로 삼는 대타협의 길로 나서야 한다.

"나는 씨받이였다"… 베트남 신부 결국'패소' / 한국일보 / 2009-02-16

[디시뉴스 권지현 기자] 한국 남자와 결혼해 두 딸을 낳자마자 이혼당한 베트남 신부가 양육권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법원은 친모로서 면접교섭권을 인정했지만 이마저도 전 남편이 불복해 항고한 상태다.

서울 가정법원은 베트남 출신의 투하(26, 가명)씨가 전 남편 A(53)씨를 상대로 낸 양육자변경심판청구를 기각했다고 15일 밝혔다. "아이들이 친부와 계모 등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고려할 때 현재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다. 그러나 "다만 친모로서 매주 4시간 전 남편의 집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면접교섭권은 인정한다"고 덧붙였다.

투하씨의 사연은 지난 2007년 한 언론사를 통해 소개되며 뜨거운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19살 꽃다운 나이에 한국 남자와 결혼한 투하씨가 두 딸을 낳자마자 버림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대판 '씨받이' 논란이 불거졌던 것.

투하씨와 결혼한 A씨는 20년 동안 아내의 불임으로 갈등하다 결국 이혼하고 브로커의 알선을 통해 투하씨를 만났다. 그러나 첫 딸을 낳자마자 A씨는 투하씨와 상의도 없이 전 부인에게 아이를 보내 양육했다. 첫 아이의 행방을 알지 못해 눈물로 날을 지새우던 투하씨가 둘째 딸을 출산하자 A씨는 일주일 만에 이혼을 요구했다. "전 부인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경제적 문제로 가정을 돌볼 수 없다"며 "베트남에 돌아가 있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곧 따라가겠다"고 회유했다. 결국 투하씨는 협의이혼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A씨는 한 달도 안돼 모든 연락처를 바꾸고 전 부인과 재결합했다.

투하씨의 변호인은 "피해자가 재생산 기능을 탈법적으로 유용 당함으로써 인격권 및 신체불훼손권을 심각하게 훼손당했으며, 아이들에 대한 친권 행사의 기회마저 박탈당해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이는 명백한 현대판 '씨받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A씨의 주장은 달랐다. 투하씨가 "아이를 낳아주고 이혼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에 동의했고, 약속한 금액도 모두 지급했기 때문에 어떠한 잘못도 없다는 설명이다. 이에 투하씨 측은 "자신의 자궁을 빌려주고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위험천만한 제안에 동의하는 데 있어 어떠한 법적·의학적 조언은 커녕 제대로 된 통역조차 제공받지 못했다"며 "조약한 한·베 사전이 대리모 약정 성립에 동원된 소통 방법의 전부였다"고 반박했다.

법 원이 이날 아이들의 안정을 이유로 투하씨의 양육권을 기각하면서 '씨받이' 논란도 재점화됐다. '정황상 아이를 낳기 위해 투하씨를 이용한 것이 명백한데 양육권 기각은 너무 했다'며 '한국말도 서툰 19살 신부에게 대리모 계약을 했다는 것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목소리가 높다. 많은 네티즌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아이도, 여자로서의 인생도 빼앗긴 투하씨가 정말 안타깝다'며 '가슴 아프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또 해당 사건이 베트남 사회에서도 논란이 됐던 것을 지적하며 '외국인 신부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증명하는 사건'이라며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아이들의 엄마'라며 국제결혼의 폐해에 대한 우려도 쏟아졌다.

한편 투하씨는 현재 서울 성동구의 반지하 단칸방에 거주하며 힘겨운 법정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3월부터는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1운동, 민족주의 너머 ‘다층적 의미’ 조명한다 / 한겨레 / 2009-02-11

90돌 맞아 다양한 학술행사
‘식민지적 주체’ 탄생 과정과
보편주의·기억과 기념 문제 등
새로운 접근 방식의 연구 선봬

‘민족해방의 단일서사를 넘어라.’

3·1운동에 관한 학계의 담론이 다양해지고 있다. 3·1운동을 ‘억압적 식민통치에 저항한 전 민족적 반일운동’으로 규정하는 관성화된 시각에서 벗어나, 문명·사상사적 의미나 역사적 기억의 전유 방식에 주목하는 새로운 연구가 활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3·1운동 90돌을 맞아 이번주부터 시작되는 여러 학술행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동아시아 근대의 새로운 전개’라는 주제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13~14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는 근대적 주체의 출현과 동시대 서구사상과의 만남 같은 3·1운동의 보편사적 차원으로 시선을 돌린다. 3·1운동이 일차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건의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실체를 파악하려면 ‘민족’이 아닌 다양한 ‘주체들’과 ‘의식’의 복합적 층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유선영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은 ‘3·1만세운동 이후의 근대 주체-리미널 페르소나의 형성’이라는 발표문에서 3·1운동이 가져온 ‘식민지적 주체’의 탄생 과정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3·1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갑오개혁과는 다른 차원의 근대화를 열어젖힌 사건이다. 갑오개혁이 “국가 주도 근대화의 시작”이었다면, 3·1운동은 “개인이 근대화의 필요를 절감하고 스스로 의식·가치·행동·문화의 혁신에 나서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획득된 자아와 개인 역량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은, 독립을 향한 집단적 열망의 좌절이 가져온 결과물이란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개인 차원의 근대화를 욕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자주독립을 미완의 희망으로 남겨두고 식민 지배를 현실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의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는 게 유 위원의 분석이다.

권보드래 동국대 교수는 ‘진화론의 갱생, 인류의 탄생’이란 논문을 통해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경험한 ‘인식론적 전환’을 조명한다. 권 교수가 보기에 19세기 말~20세기 초 지식인의 민족주의를 추동했던 사회진화론적 인식은 국권 상실을 계기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지식인들은 독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새로운 논리를 필요로 했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동시대 서구에서 등장한 진화론 비판과 인류의 공존공영에 대한 보편주의적 호소였다는 게 권 교수의 분석이다. 요컨대 조선 독립을 세계 평화와 인류공영과 연결짓는 3·1독립선언서의 사상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탄을 맞은 사회진화론에 대한 성찰과 ‘세계’와 ‘인류애’의 발견과 같은 새로운 세계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오는 26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공동학술대회 역시 3·1운동에 대한 ‘기억과 기념’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3·1운동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이 자리에선 3·1운동을 통해 역사적 주체로 등장한 민중들은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좌익과 우익은 그것을 어떻게 기념하고 재구성해 왔는지, 3·1운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유관순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지금 같은 독보적 위상을 차지하게 됐고, 일본인과 중국인들은 3·1운동을 또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등을 탐문한 다섯 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한국역사연구회 부회장인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발발 원인이 된 억압적 식민통치에 대한 연구부터,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주도 계층의 성격과 운동의 진행과정, 발생 지역에 대한 사례 연구에 이르기까지, 3·1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풍부한 실증 연구가 진행됐다”며 “주체들의 기억과 타자의 시선으로 관심을 확장함으로써 실증 연구가 갖는 객관주의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고구려·발해는 中 역사? 韓 역사? / 시민일보 - 2009-2-11

일본 세계사 교과서에 고구려 및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인지 한국 역사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명시돼 있어 파문이 예상된다.

한국학중앙연구소 이길상 교수는 11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며 우리나라 정부와 학계, 민간기업 등의 적극적인 대처방안 마련을 요구했다.

일전에도 일본 교과서는 한국 역사를 일본 중심으로 서술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으나 고구려 역사에 대해 언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발간된 일본 교과서에는 ‘고구려가 중국 역사인지 한국 역사인지 정확하기 말하기 어렵다, 발해역사도 마찬가지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마치 중국이 우리 역사를 상처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본이 옆에서 끼어들어 잘못된 역사적 시각을 드러낸 것도 잘못된 것”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나타냈다.

특히 이 교수는 “(다른 외국 교과서에도)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프다”며 일부 국가의 예를 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는 최근 독도 문제를 서술하며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기술했으며 호주 교과서의 경우 ‘태권도는 중국에서 차용한 스포츠’, ‘한국요리는 중국과 일본 요리를 섞어놓은 요리’ 등으로 기술해 한국문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드러냈다.

한편 이 교수는 이에 대해 “정부와 학계, 민간기업 등 다양한 주체들이 협력해 대응해야 한다”며 “정부나 민간기업은 새로운 전문가들이 계속 외국 교과서를 연구하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국내 교과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주제를 발굴, 세계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서 해외에 알리는 일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록현 기자roki@siminilbo.co.kr

lundi 16 février 2009

가족법 대가 김주수 前 연세대 교수 / 세계일보 / 2009-02-06

가족법 바로잡기 50년…“호주제 폐지 등 보람 ”

전쟁 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5년 어느 날, 젊은 법학도 김주수의 손에 ‘대한민국 민법 초안’이 쥐어졌다. 그의 눈길은 친족의 권리·의무와 상속 절차를 규정한 가족법 부분에 멎었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의 가족법인가? 일제가 조선 통치를 위해 들여온 식민지 시절의 호주제 그대로가 아닌가?’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김주수 전 교수는 “호주제 때문에 남아선호 사상이 더욱 강해지고, 그로 인해 인구 증가가 멈추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고 말했다.
“ 우리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겁니다. 헌법이 남녀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당연히 거기에 맞는 가족제도로 나아가야죠. 더욱이 우리 고유의 전통도 아니고 일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돌아가선 안 되죠. 이것을 내 평생 연구 테마로 삼아야겠다, 가족법이 제 모습을 찾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서울대 법대 시절 은사의 영향도 컸다. 조용한 성격에 성적이 뛰어난 그를 눈여겨본 정광현 교수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했다. 민법 담당이던 정 교수는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가족법학자였다.

“선생님이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졸업 무렵에 다시 뵈었는데 ‘내 밑에서 공부하라’고 하시더군요. 전쟁으로 서울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시절입니다.”

대 학원을 마친 뒤 경희대 강단에 선 그는 본격적으로 가족법 바로잡기에 나섰다. 57년 발표한 논문 제목은 ‘현행 가족제도의 존속가치―민법 초안의 호주제도를 비판한다’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과 학자들은 호주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58년 국회는 민법 초안을 원안 거의 그대로 통과시켰다.

5·16군사정변 후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호적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62년 꾸려진 ‘호적제도연구위원회’에는 사광욱 대법관, 훗날 대법원장이 된 이영섭 이화여대 교수, 김증한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소장학자 김주수도 위원이 됐다. 이때 그는 ‘민법상의 호주제도가 폐지돼야 할 이유’라는 보고서를 썼다. 하지만 그를 뺀 모든 위원들이 호주제 폐지에 반대해 힘을 못 썼다.

난공불락이던 호주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군사정권이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면서다. 호주제 때문에 남아선호 사상이 더욱 강해지고, 그로 인해 인구 증가가 멈추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 하루는 대한가족계획협회에서 나를 불러 강연회를 요청했어요. 강연이 끝난 뒤 협회 간부들에게 ‘이런 것 100번 해도 소용없다. 가족법이 철저히 남자 중심인데 그걸 두고 딸 아들 구별 말자고 하면 되느냐. 법을 고쳐야 사람들 의식도 바뀐다’고 지적했죠. 그래서 협회가 YWCA와 손잡고 가족법 개정운동에 나선 겁니다. 이태영 변호사를 비롯해 여성계도 적극 참여했죠.”

박 정희 대통령 지시로 77년 민법이 일부 개정됐다. 호주제는 그대로 살아남은 대신 아버지만 행사할 수 있었던 친권을 부모가 공동으로 행사할 길이 열리는 등 여성에 유리한 일부 조항이 추가됐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를 외치고 동성동본 불혼에 반대한 그는 이때부터 유림들의 ‘눈엣가시’가 됐다.

“75년 성관균대로 옮겼는데 나에 대한 유림의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집으로 전화해 협박하고 ‘당신은 매국노다’, ‘지구를 떠나라’ 등 내용의 편지도 보내오고…. 학교 당국에 ‘저런 반유림 인사가 어떻게 성대 교수를 하느냐’고 따졌죠. 현승종 당시 총장이 나 때문에 상당히 난처해졌습니다.”

78년 그는 몇 달간 대만 정치대학에 머물렀다. “잠시 한국을 떠나 있으라”는 학교 측 권유에 따른 것으로 ‘유배’나 다름없었다. 귀국 후엔 한동안 활동을 자제했다. 그러나 신문 인터뷰에서 “동성동본 불혼 규정은 잘못”이라고 말한 게 그만 화근이 됐다. 또다시 유림이 들고 일어나자 성대도 더 이상 감싸줄 수 없었다. 81년 그는 쫓기듯 연세대로 옮겼다.

“내가 성대에 사표를 냈다니까 학생들이 흥분해 학교 측에 항의했어요. 이게 몇몇 신문 사회면에 크게 기사화돼서 학교 측이 당황했죠. 그땐 교수가 학교를 옮기려면 이전 대학에서 ‘전출동의서’를 써줘야 하는데, 성대가 갑자기 사표 수리를 철회한 겁니다. 이미 연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내 사정을 들은 당시 문교부가 ‘김 교수의 경우엔 전출동의서가 필요없다’고 해 겨우 곤경에서 벗어났습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활발히 연구하고 발표했다. 한국가족법학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민주화로 정치적 환경도 많이 좋아졌다.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88년 그는 여당이던 민정당의 김장숙 의원 부탁으로 가족법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 넘겼다. 그의 소신과 연구 성과가 집대성된 ‘결정판’이었다.

해가 바뀌자 국회 법사위원장이던 평민당 조승형 의원이 그를 찾았다. “개정안을 검토했는데 호주제 폐지는 곤란합니다. 대신 호주의 모든 권리·의무를 없애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겨 놓겠습니다. 동성동본 불혼 폐지도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정치인들의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듯했다. 그나마 호주제가 ‘껍데기’만 남는다는 데 위안을 느꼈다.

93년 출범한 김영삼정부는 호주제와 동성동본 불혼 폐지를 공약했다. 법무부 산하에 ‘민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가 설치돼 가족법 개정에 착수했다. 위원장은 김주수가 맡았다. 위원회 활동은 김대중정부로 바뀐 99년까지 이어졌다.

결 국 호주제는 2005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서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성동본 불혼 규정도 97년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효력을 잃었다. 국회는 2005년 3월 민법을 개정하며 두 조항을 삭제했다. 그가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꼭 50년 만이었다.

민법개정위원장 시절 그는 ‘이혼 후 친권’ 문제도 검토했다. “당시 대법원 판례가 ‘이혼 후 미성년 자녀를 혼자 키우던 단독 친권자가 사망하면 생존하는 다른 부모의 친권이 자동 부활한다’는 것이었죠. 난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이의 복리를 위해선 생존하는 다른 부모가 친권을 행사할 적격자인지 아닌지 심사 절차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친권 자동회복에 반대했는데, 법원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법무부는 최근 자격 없는 부모의 친권 회복을 막는 민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지난해 최진실씨 사망이 계기가 됐다. 그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대목이다. 마침 이번 법무부 개정안을 주도한 김상용(46) 중앙대 법대 교수는 그의 아들이다. 부자가 대를 이어 우리 가족법 가다듬기에 뛰어든 셈이다.

“아들은 연대를 다녀 학부와 대학원 때 내가 직접 가르쳤죠. 나와 상관없이 스스로 민법을 택했고, 독일 유학 시절 가족법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노무현정부 들어 또 민법개정위원회가 생겼는데, 나 대신 아들이 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올해 81세지만 정정하다. 93년 정년퇴임 후에도 겸임교수로 지난해까지 경희대 강단에 섰다. 인터넷과 이메일을 자유롭게 쓰고 워드 프로세서로 논문을 작성한다. 날이 좋으면 아내와 수유동 집에서 가까운 4·19국립묘지나 북한산 기슭으로 산책을 다녀온다. 요즘도 독서와 연구로 하루 3∼4시간을 보내는 등 학구열은 끝을 모른다.

“64년 펴낸 ‘친족상속법’ 교과서는 계속 개정판을 찍고 있습니다. 몇해 전부터 아들과 공저로 해서, 새롭게 바뀐 부분은 김상용 교수가 주로 손을 보지만 내가 아직 관여해요. 요새는 책을 오래 보면 눈이 아파 공부가 예전 같지 않아요, 허허.”

글 김태훈 기자, 사진 전신 인턴기자 af103@segye.com

[최선웅의 지도이야기] 고지도 - 조선일보 / 2009-02

역사적 위치 파악· 문화적 복원자료· 회화적 예술가치 지닌 존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표의 상황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각종 개발로 인해 날이 갈수록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한적했던 시골 마을이 어느 샌가 주택단지로 바뀌고,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허리가 잘리면서 도로가 뚫리고, 황량했던 벌판에 대단위 공장지대가 들어서고 있어 개발이 이미 끝난 곳에서는 예전의 토지형태를 떠올리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지금의 장소가 옛날에는 어떠한 곳이었으며, 무엇이 있던 곳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당시의 지도를 보는 것이다. 옛 지도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적 정보가 응축되어 있어 그 시대의 역사나 지리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까지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지도는 그 시점의 역사라고도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지도실 바닥에 깔려 있는 고지도. 이 지도는 18세기에 제작된 동국대전도를 실제 크기의 2.3배로 확대하여 타일로 인쇄한 것으로, 관람객들에게 고지도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지리학자 형기주(邢基柱·1933-) 선생은 논문 ‘古地圖(고지도)에 관한 硏究資料(연구자료)’에서 ‘고지도는 과거 인류들의 지리적 시야나 지리관을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대의 지도는 지리학사의 체계를 세우는 데 있어서 필요불가결의 실증적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고지도 상에 시현된 자연 및 인문경관을 현실과 비교함으로써 역사 지리적 과제인 경관 복원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지도제작 상의 테크니컬 프로세스를 검토함으로써 근대적 지도가 제작되기까지의 체계 있는 과정을 엮을 수 있다’고 고지도를 지리학사와 밀접하게 연관지으며 학문적 필연성을 강조하였다.

또 조선시대 지도 연구의 권위자인 양보경(楊普景) 성신여대 교수는 기고문 ‘전통지리학-연구와 전망’에서 ‘고지도는 역사시대의 공간 형상을 전해주는 귀중한 시각자료이다. 고지도를 통해서 우리는 국토와 지역의 옛 모습을 생생하게 살릴 수 있으며, 제작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과 회화적 분위기, 나아가 우리 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지방에 대한 국가의 행정, 군사적 능력을 알 수 있다. 고지도는 한국학 연구의 기본 자료로서 그리고 영토의 의식과 국경문제의 직접적 증거로서, 또 옛 지명, 산천, 도로, 행정구역, 역사적 위치의 파악과 문화적 복원의 자료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더욱이 화원(畵員)들이 대부분 지도제작을 담당하여 회화적인 예술품으로서도 귀중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고지도의 의의와 그 존재가치의 소중함을 피력하였다.

고지도라 하면 그저 옛날 지도, 또는 오래된 지도라 할 수 있겠으나 명확하게 이것이라고 정의내리기가 어줍다. 지도학용어사전에 따르면 고지도(old map, archaic map, antique map)는 ‘근대적 측량 및 인쇄술 보급 이전에 제작된 지도의 총칭’이라 되어 있으며 ‘유럽에서는 1900년 또는 19세기 중기 이전의 수제(手製) 또는 목판·동판본의 지도를 가리킨다’고 시기와 제작기법에 따른 기준으로 정의하고 있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고지도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도 이전의 모든 지도를 포괄할 수 있겠지만, 시대적으로나 지도제작의 기술적인 면을 기준으로 정함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기준은 오랜 역사의 시간 속에서 본다면 계속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대적 측량기술에 의하지 않은 지도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고지도를 구분하는 시기는 명확치 않다. 우리나라 지도학사의 큰 줄기를 세운 이찬(李燦·1923-2003) 선생은 <韓國(한국)의 古地圖(고지도)> 서문에서 전통적인 지도제작 기술에 의한 옛 지도로서, 현대적인 측량기술에 의하지 않은 지도를 고지도로 규정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고종 34년) 이전에 제작 간행된 지도를 가리키거나, 과학적 측량술이 고안된 이후 우리나라 지도제작의 근대화라 할 수 있는 1876년 개항 시기를 기준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보다 측량술이 일찍 도입되어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지도는 고지도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우 리나라의 고지도는 국내든 외국이든 현전하는 것을 놓고 보면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뿐이고, 그나마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거나 개인에 의해 비장되어 있다. 다행히 1960년대 이후 학자들에 의해 고지도 연구가 진행되면서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대학교 박물관이나 공공도서관, 정부기관, 출판사 등에서 고지도를 책자로 꾸며 펴내고 있다. 그 가운데 출판사가 펴내 일반에 보급되고 있는 것은 이찬 선생의 <한국의 고지도>가 유일본이다.

이 책은 전국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는 고지도 243점을 모아 천하도(天下圖), 관방지도(關防地圖), 조선전도 및 도별도, 도성도(都城圖), 군현도(郡縣圖), 회화지도, 산도(山圖) 등으로 구분하여 꾸민 것이다. 비록 지도는 축소되었지만 원색으로 재현되어 옛 지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고, 우리나라의 고지도 역사의 개관과 더불어 매 지도마다 해설이 덧붙어 우리나라 고지도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 데 이 책만 한 것이 없다.

이밖의 고지도집으로는 한국도서관학연구회에서 펴낸 <韓國古地圖>,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펴낸 <韓國의 옛 地圖>(2책), 서울학연구소에서 펴낸 <서울의 옛 地圖>,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펴낸 <海東地圖>(3책), <朝鮮後期 地方地圖>(6책), <東輿圖>, <朝鮮全圖>(2책) 등이 있고, 부산지리연구소에서 펴낸 <釜山의 古地圖>, 수원시에서 펴낸 <水原의 옛地圖>, 향토문화진흥원에서 펴낸 <全南의 옛地圖> 등이 있으나 시판용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에서 입수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판매하는 상품으로서 고지도의 종류를 구분한다면 우선 옛날에 간행된 지도의 실물인 진품(眞品)이다. 그러나 진품은 희귀할 뿐 아니라 설령 있다 해도 엄청난 고가이기 때문에 일반에서 유통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은 고지도를 원상태 그대로 인쇄하여 제작한 복각판(復刻板)이다. 용지나 잉크가 다른 것을 빼고는 고지도를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大東與地全圖>나 김정호가 제작한 <首善全圖(수선전도)>가 고작이다. 마지막으로는 한마디로 카피본이다. 고지도를 그대로 대형 프린터기로 복사하거나 스캐닝하여 출력한 것으로, 소량 제작의 이점이 있으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유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 지도는 그 자체가 지닌 의의나 기능성뿐 아니라 디자인이나 예술적으로도 아름답기 때문에 일본이나 유럽 각국에서는 고지도를 복각하거나 캘린더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 일반인들도 손쉽게 구입하여 장식용이나 용도에 따라 이용하고 있다. ‘지도는 골동품과 같은 유물이 아니라 과거 세계를 여행하는 일종의 타임머신’이라고 한 오상학 제주대 교수의 말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고지도를 복각하여 일반에게 널리 보급하는 것이 문화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여겨진다.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월간산 472호

6·25 전쟁 직후 우리사회 편린(片鱗)들 - 데일리안

이목우 기자가 경북도 도정월보에 기고한 견문십편(見聞十片)

부제 : ´고뇌하는 관리와 참담한 농민´

´촌철살인´ 같은 핵심 속에 사회 부조리 등 꼬집어
관료사회 비평 글 싣게 한 도백 마음도 넉넉했을 듯

◇ 도정월보를 창간한 신현돈 3대 지사. 55년 2월까지 재임했다. ⓒ 경북도 제공
단기 4285년 서기 1953년 8월 13일 포화의 화염으로 얼룩졌던 한국동란이 다행스럽게도 막을 내린 즈음, 한 기자가 당시 사회의 일부 모습을 경상북도가 발행한 ´도정월보´에 기고했다.

도정월보는 6˙25 동란 당시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던 대구에서 경북도가 1951년 신현돈 3대 경북도지사의 취임 시기에 첫 발행을 시작한 월간 도정지다.

현재 도정지 발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 정성융씨는 "전쟁통에 많은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대구에 내려와 지내게 됐으며, 이런 가운데 박목월, 조지훈, 정비석 등 문학사에 이름을 날린 상당수 사람들이 도정지에 글들을 기고하는 등 발행에 참여했다고 전해 들었다"며 "이와 함께 언론인들의 참여도 일부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목우 씨는 당시 영남일보사 사회부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도정월보에 이글을 기고하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려웠던 당시의 모습과 함께 부조리한 사회상을 꼬집어보려고 한 것 같다.

특히 견문시편은 촌철살인 같이 깔끔하게 집은 핵심 속에 관(官)을 꼬집는 내용도 상당수 담고 있다. 따라서 이를 도청이 발행하는 잡지에 실은 수 있었던 것만으로, 당시 도정을 맡았던 도백(道伯)의 마음 또한 넉넉하지 않았나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목우 부장은 이글의 부제를 ´고뇌하는 관리와 참담한 농민´으로 달았다. 그가 직접 보고 거나 들고 체험한 후 기고한 견문십편(見聞十片)의 글들을 간추려 소개해 본다.

◇ ´레이숀´ 이문(異聞=이상한 소문)

휴전이 이루어 진후 아마도 레이숀을 선물 삼아 배포한 것 같다. 레이숀은 군대의 휴대 식량이나 하나의 작은 자루 등에 넣은 얼마간의 식료품 등이다.

중앙에서는 각 시도, 읍면동까지 이를 철저하게 배포하라고 했건만 농촌에서는 이를 믿지 않은 것 같다. 이에 따라 농부들이 ´우리에게 까지 정말 줄려는가´라고 반문하며, 심지어 ´어림없지 준다고 해도 중도에서 모조리 까먹고, 우리에게 보내주는 미친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에 필자는 물자의 배포에 있어서 사람들이 관청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원인을 횡류(물품을 정당한 경로를 밟지 아니하고 전매(轉賣)함) 등을 일삼은 관의 악습 때문이라며, 관의 신용상실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묻고 있다.

◇ 의용 경찰관

전쟁이 막 끝난 당시는 곳곳에서 공비들이 출몰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청년들이 밤새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을 맡은 것은 의용소방대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위세가 대단했나 보다. 젊은층으로 구성됐지만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금품까지 주며 겁을 내야하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관(官)인지 민(民)인지 그 성격의 명시와 함께 행동의 한계에 대한 규범이 똑똑해 져야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검문소 풍경

당시 검문소는 여객 버스나 화물차 운전수들에게 둘도 없는 어마어마한 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겪는 불편함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승객들의 불편도 극심했었다.

더운 날 오랜 시간 검문을 받다 보면, 초만원인 버스 내에 있는 승객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담은 비오듯이 쏟아 지고, 아이들은 울고 장터를 방불케 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검문소가 그리 딱딱한 것 말고, 어르신이나 연약한 부녀자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예의 없는’ 젊은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계도하는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고 적고 있다.

◇ 관리자가폭로(官吏自家暴露)

예나 지금이나 일을 하다 보면 불평할 때는 항상 있는 법이다. 필자는 당시 한 민간인이 관리와 술을 먹던 도중 한 관리가 자신의 대우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듣고 적은 글이다.

당시 공무원들의 대우가 그리 좋지 못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에 그 관리는 ‘공무원들의 생활은 모두가 기적일세. 답답하고 비굴하고…3년만 근무하면 아편환자처럼 발을 빼지 못한다’고 취중진담을 쏟아 냈던 모양이다.

필자는 이를 듣고 이를 위중에 한 말이니 잊어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공직자로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충고하고 있다. 또 해방이후 8년간 1만여명의 공무원들이 영세한 보수로 가족을 이끌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에 대해 ‘기적인가 기적이 아닌가’ 되묻고 있다.

◇ 회계감사 여담(餘談)

회계담당직원을 만난 필자는 산적한 일에 고생을 하고 있는 그로부터 상사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한 고충을 잘 몰라준다는 하소연을 듣게 된 것 같다. 하기야 일을 하다보면 그 일에서 오는 고충을 누구에게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에 필자는 접대비 같은 것을 지출하도록 상사가 부하직원을 부려 먹는 다면 안 될 것이며, 그이에 회계담당직원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면 상사를 꼬집는 것도 그만두어야 함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 분뇨차 수난

모 읍에서 분뇨차를 모는 늙은 농부의 고생담이다. 한 작은 경찰서 정문에서 분뇨차를 모는늙은 농부가 파출소 양반에게 꾸지람을 듣고, 오랜 시간 도로 청소를 하게 된 모양이다.

이유인 즉 작업시간이 끝난 후 분뇨를 퍼갔다는 것과 파출소 앞 길 위에 분뇨가 일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농부는 겁이 나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순경은 시킬 수 있는 대로 일을 시켰나 보다.

필자는 이를 보고 그 순경이 위생관념에 달(達)한 도시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 시골의 중학

당시 시골에는 학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한 시골에 뜻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세우고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이 그 학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 강의를 맡은 교사가 대구의 모 대학 1년생이고, 교무주임은 전직 초등학교 준교사라 출신으로 수준이 너무 낮아 배울 것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선생님을 하나님 같이 여기는 과거에 비교할 때 통탄할 일이라면서, 그 원죄는 문교정책에 역량부족에 있다고 지적했다.

◇ 신문기자 2(二)파

경북도내 한 지역을 방문한 필자는 자신을 맞는 기자들과 탁주를 나누면서 이곳 기자들은 두 부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 부류는 광고료를 받고 점심을 얻어먹는 것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이비기자요, 다른 한 파는 여하한 연회에는 가지 않는 위신 있는 기자라는 것이다. 이 두 파는 물과 기름사이로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필자가 만났던 기자들도 위신 있는 기자들이었나 보다.

그날도 사이비기자 무리들은 관청의 자동차를 억지로 빌려 타고 해수욕을 떠났다는 것. 이에 필자는 민폐나 관폐가 없기를 요망하는 기자도의 숙원도 이미 오래전부터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 점심대접 난색(難色)

필자가 어느 군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반갑게 맞이하는 군수에게 점심 대접을 받았는데, 군수의 표정이 어두웠다. 알고 보니 지역 유지, 언론인 등 너무나 찾는 이가 많다 보니 나가는 식사 값과 술값이 만만치 않았었나 보았다.

이에 필자는 접대비 때문에 고생하는 빈약한 군 행정에 서글픔을 느끼면서, 점식 대접 받은 걸 후회했다.

그러면서 필자는 여하한 사람이 와도 대접하지 않는 군수와 여하한 곳에 가도 대접을 철저하게 받는 두 종류의 사람 중 누구 이익을 볼 것인가 또한 손해를 볼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이글은 필자의 글을 지면관계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내용의 바꾸지 않으면서 간략하게 서술했음을 밝힙니다.

◇경상북도인터넷신문 ´프라이드 i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news.gyeongbuk.go.kr

이목우(李沐雨)=1952년 1월부터 55년 6월까지 영남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 당시 그가 연재한 단평 시대풍(時代風)은 사회상을 잘 반영해 인기를 끌었다. 54년 8월 육군 76연대 민대대 고유명칭 게재 등 필화사건으로 당시 편집국장이던 이흥로씨가 해임되고, 3개월 감봉처분을 받기도 했다.

[데일리안 대구·경북 류진환 기자]

영웅 중심, 일화 중심 역사쓰기 함정 피하자 - 오마이뉴스 / 2009-02-05

역사를 살필 때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몇몇 영웅이나 천재가 역사를 이끈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몇몇 일화나 사건과, 역사 그 자체를 같은 걸로 여기는 태도다. 하지만 우리는 먼 옛날 역사일수록 이런 생각과 태도로 대한다. 특히 고대사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동양, 서양을 가리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바라보는 고대사는, 몇몇 영웅과 신기한 힘, 기적, 그 밖의 우연으로만 채워져 있다.

유럽은 그래도 역사학자들이 힘쓴 덕분에, 고대와 중세를 신화와 마법 세계가 아니라, 지금과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시대로 되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시아, 특히 한중일 삼국은 어떤가? 역사학자들만 읽는 전문 서적이나 잡지면 모를까, 이른바 ‘대중을 위한’ 역사책 대부분은 영웅과 신화, 일화로만 채워져 있다.

‘이야기 중국사’류의 책은, 양귀비만 없었다면 당 현종은 계속 나라를 잘 다스렸을 거라고 가르친다. 이런 시각에는, 국가의 패망이나 심각한 사회문제는 이미 '태평성대'부터 그 씨앗을 품고 있다는 상식이 빠져 있다. 한국 역사를 다룬 책도 그렇다. 아직도 민중, 문화, 소외자 등 ‘영웅’이 아닌 사람들을 다루는 책은 드물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구조 자체를 다루는 한국 역사책은 더 드물다. 전문 서적은 있겠지만 대중을 위한 책에는 그런 게 거의 없다.

우리는 고대의 여러 사건을 빈약한 근거와 손쉬운 단순논리로 재단해왔다. 그 중 하나가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의 대결이다. 왜 유방은 항우를 꺾을 수 있었을까? 유방이 아랫사람들을 더 잘 이끌어서, 유방이 더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서, 또는 항우가 힘만 믿고 교만해서,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됨됨이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흔한 인물 비교는 결과에 짜맞춘 억지가 아닐까?

역사는 몇몇 영웅이 이끄는 게 아니다. 물론 지도자, 영웅이나 좀 더 뛰어난 수재가 사건의 흐름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를 길게 보면, 결국 흐름을 바꾸는 힘은 그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환경과 사회 구조, 보통 사람들의 행동이 모여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게 역사다. 역사를 바로 보려면 이 모든 요소를 분석해야 한다.

유방이 이긴 것은 많은 제후들이 항우가 아니라 유방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항우의 명분에 문제가 있어서다.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는, 유럽 근대사의 러시아를 떠올리게 한다. ‘완전한 유럽은 아닌’ 러시아가 남쪽으로 내려오려고 할 때마다 유럽 나라들이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뭉쳐서 막아냈다.

마찬가지로 춘추 전국 시대 중원(=정통 중국)의 제후들은, ‘오랑캐’ 초나라가 올라오는 걸 막으려고 '패자'를 중심으로 뭉쳤다. 물론 단순 비교는 무리지만, 초나라가 러시아처럼 독특한 위치를 가진 게 사실이다. 제후들이 유방을 따른 것도, 역사책에서 말하듯이 유방이 ‘인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초나라를 내세운 항우의 움직임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유방도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제후들은 유방을 군주로 모셨다기보다는, 항우에 맞설 명분, 상징, 쉽게 말해 ‘얼굴 마담’으로 내세웠다고 말이다. 유방은 신분이 낮았고 지식이나 무력도 뛰어나지 않았다. 사람을 끄는 힘은 있었으나, 사실 후세 사람들이 찬양하듯 인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신이 찾아오자 그는 ‘바짓가랑이’ 소문만 듣고 무시했다. 항우와 싸울 때는 부하들의 말을 무시하다가 큰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백성에게 따뜻한 정치를 베풀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승상 소하를 비롯한 관료층이 한 일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니, 오히려 꼭두각시로는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친족이나 친구들도 신분과 능력이 별볼일없었다. 군주 옆에서 세력을 이루는 건 힘들었을 것이니 유방에게 별 도움도 못 되었을 것이다. 이런 때는 군주의 심복(장량, 소하)이나 외척(여후 일가), 중앙에 연줄을 가진 지방 제후가 권력을 잡기 쉬워진다.

물론 유방을 꼭두각시였다고 단정하는 건 아직 이르다.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유방이 능력이 있었나 없었나가 아니다. 국가나 정부 또는 한 세력의 움직임을, 지도자의 움직임으로 바꿔 보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나라의 법을 단 3개로 줄인 ‘약법 3장’이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유방 한 사람의 ‘자비로움’이 아니라, 한나라가 지방 제후들에게 던진 훌륭한 ‘거래 조건’이다.

약법 3장은 사실 백성들보다는 제후들이 환영할 만했다. 중앙에서 모든 통치 기준을 정하는 진나라 방식을 없애고, 제후들에게 많은 재량을 주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이 점에서 초나라와 달랐다. 초나라가 다른 제후국을 다루는 걸 보면, 강력한 중앙 집권,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추구했던 것 같다. 제후들에겐 초나라 방식보다 한나라 방식이 더 매력있었을 것이다.

지배층, 기득권층은 냉정하고 계산에 익숙하다. 덕(德)이나 카리스마만으로 그들이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지배층 뿐 아니라 민중도 그렇다. 언제나 지도자의 말 몇 마디에 움직이는 것 같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그들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문제는, 역사를 몇몇 사람과 사건으로 쉽게 정리하려는 유혹 때문이다. 이건 요즘들어 ‘대중을 위한’ 역사책이 많이 나오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이덕일 씨의 책이 그런데, 물론 그의 책은 미덕도 많다. 강단 역사학자들이 지닌 고정관념이 없고, 자주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책은 종종,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드려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역사는 기승전결이 깔끔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복잡한 요인이 있고, 이렇게 시작하면 이렇게 끝난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덕일 씨의 책을 비롯한 이른바 ‘대중을 위한’ 역사책은, 자주 소설책과 비슷해져버린다. 주인공이 있고, 반동 인물이 있고, 기승전결과 자주 감정에 치우친 서술이 있다. 결국 이들 비제도권 역사가들도 주인공 중심 태도, 영웅 중심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책을 강단 역사학의 대안으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 모 대학도서관에 가보니,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 <십팔사략>등을 역사책으로 분류해놓았다. 고우영 화백의 작품은 예술 작품으로 본다면 뛰어나다. 하지만 역사책으로 보면 비판할 구석도 있다. 일화 중심, 영웅 중심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고우영 씨 자신이 역사를 만화로 그린다기보다는, 역사를 소재삼아 현실 풍자와 인간 고찰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화백에게 예를 표하는 뜻에서 잘못된 책 구분을 바꿨으면 한다.

정동원 (jungs21)

[박정동교수의 ‘세계 경제의 핵 화교’ ⑭] 외국인 배제정책…‘영원한 이방인’ 취급 - 중앙일보 / 2009-02-04

한국, 그리고 한국 화교의 역사 (1)

우리나라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유입이 잦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정적이었다. 동남아시아 많은 국가들과 달리 중세 이후 우리나라는 줄곧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다.

중 국과 교류는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국가가 교류를 통제하고 제한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화상(華商)의 성장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 화교가 성장한 것은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을 때였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한국 화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조선후기. 쇄국정책은 조금씩 무너지고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로 갈라졌다. 청(淸)나라와 일본은 서로 우리나라를 놓고 외교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당시 일본이 청나라보다 먼저 강화도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에 대해 청나라보다 우선권을 얻었다.

물론 청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는 틈을 찾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명성황후가 청에 도움을 요청하자 청은 군란을 진압하고 조선에 머무르던 일본군을 몰아냈다. 또 청나라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비롯한 일련의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통상조약들은 한반도 내에서 화상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잃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다. 나라를 잃은 우리는 언어, 문화 등 정신 문명도 빼앗겼다. 그리고 토지조사제도로 인해 땅 마저 빼앗겼다. 하지만 화교들은 사정이 달랐다.

일본 기업이 국내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 사람 보다 화교를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뿐만 아니라 화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급료를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교에 질투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한•중 관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화에 만족하지 않고 대만, 그리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에 따른 군사•경제적 자원은 우리나라에서 조달했다.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징병했는데 그 수가 80만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화교들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초기 한국 화교들의 유입이 증가한 것은 청나라 내부의 혼란으로 인한 이민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교들이 급속하게 성장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잠시 줄었을 때는 중•일 전쟁으로 화교들이 적국 국민으로 간주되었을 시기뿐이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화교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춘절(春節, 중국의 설날)에는 고향을 방문해 가족, 친지들과 함께 지냈다.

또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잦은 교류를 통해 무역사업 등 경제적 기반도 중국을 원천으로 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의 혼란한 상황으로부터 피난을 온 처지였기 때문에 중국이 안정되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자, 한국 화교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화교의 수가 정체되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한국과 중국 양쪽에 모두 있었다.

1948년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외국인 출입을 규제했다. 국내에 외국인 입국이 금지됐다. 화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9년에는 중국에 마오쩌둥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주 억제책으로 출국자체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일 년에 한 번씩 갈 수 있었던 고향 방문은 물론이고, 화교 무역의 기반이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끊겨 경제적인 힘도 잃었다.

단절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자 남한의 화교들은 더욱 큰 단절을 겪어야 했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북한에 많이 거주했다. 당시 남한에 거주하던 화교는 한반도 전체 화교의 20%도 채 안됐다.

화교들의 생명력은 국경을 초월하는 관시(關係)에 있는데, 그것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한국 화교들의 모습은 마치 무인도에 던져진 로빈슨 크루소와 같았다.

이렇게 고립된 화교들의 인구증가는 전적으로 자연증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화교들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철저하게 외국인을 배제하는 정책을 폈다. 한국 정부는 외국인이 귀화하는 기준에 ‘품행’이나 ‘생계를 유지할 자신’등과 같은 애매한 항목을 두었고 법무부 장관의 허가까지 얻게 했다.

뿐만 아니라 화교 2세도 외국인 취급을 받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다. 한번 외국인은 영원히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도 끊긴 마당에 한국 국적도 얻을 수 없고, 게다가 그 어려움이 후손에게 이어졌다.

차라리 그저 귀화만 못하는 것이었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 배제정책은 경제적인 면에서 더욱 가혹했다.

사실 당시 한국 무역의 약 70%는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화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 한국정부는 한국인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모든 경제정책을 한국인을 우선으로 했다. 그 중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통화개혁이었다.

재산을 주로 현금으로 축적해 두던 화교들은 급작스러운 통화개혁으로 많은 손해를 입어야 했다.

글=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아소탄광서 전쟁포로 착취 사과를" - 한국일보 / 2009-02-07

후지타 의원 아소 총리 비판

"아소 총리는 아소 탄광에서 연합군 포로를 데려다 가혹하게 일 시킨 사실을 사죄하고 일본 정부는 포로들에게 적절히 배상해야 합니다."

일본 민주당 후지타 유키히사(藤田幸久ㆍ사진) 중의원이 6일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쟁 포로 노역 책임을 회피하려는 총리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후지타 의원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총리의 집안 기업인 아소 탄광의 한국ㆍ중국인 및 전쟁포로 노역 문제를 끈질기게 추궁해 지난해 말 연합군 전쟁 포로 300여명의 노역 사실을 밝힌 주인공이다.

아소 탄광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열악한 조건 속에서 한국인, 중국인 연행자와 전쟁포로를 채굴 등의 노동에 동원한 것은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 등을 통해 이미 198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특히 아소 총리가 외무장관으로 있던 2006년 뉴욕타임스가 이 문제를 다루자 뉴욕 일본 총영사관이 "증거가 없다"는 반론을 게재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을 정부가 부인한 것이다. 게다가 아소 총리는 지난해 취임 직전 기자회견에서 "전쟁 때 나는 다섯 살이어서 아무 기억이 없다"고 발뺌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 비인권적 행위를 감추고 보자는 아소 총리의 행태에 분노한 후지타 의원은 미국 국립공문서관 자료 등을 내밀며 정부에 사실 조사를 요구했고 결국 지난해 12월 후생노동성이 정부 문서를 보이며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후지타 의원은 당시 노역했던 호주 포로 중 생존자 3명과 최근 통화했다며 "이들은 아소 총리와 일본 정부의 사죄 표명과 당시 노역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외동포 국내서 일하면 영주권 / 서울신문 / 2009-02-06

국내 기업에서 4년6개월 이상 일한 재외동포에게는 영주권이 주어진다. 해외입양아의 정착과 뿌리 찾기를 위한 지원방안도 마련된다.

정부는 5일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새 정부 들어 처음으로 재외동포정책위원회(제9차)를 열고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신정부의 재외동포정책 추진방향’을 논의했다.

정 부는 우선 취업기피 지역 및 업종으로 동포인력을 유도하기 위해 한 기업체에서 4년6개월 이상 일한 사람에게는 영주자격 취득 기회를 주기로 했다. 또한 중국·독립국가연합(CIS) 지역 우수 재외동포를 유치하기 위해 동포기업가 자녀에게도 재외동포 자격을 부여하는 방안을 마련, 시행할 계획이다.

정부는 아울러 해외입양아를 돕기 위해 ▲입양 이후 현지정착 지원(학령기) ▲뿌리찾기 지원(청소년기) ▲국내체류생활 지원(성인기)으로 지원체계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재외동포 네트워크의 글로벌화를 통해 700만 재외동포의 역량을 지식기반경제시대 성장동력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기존 재외동포 네트워크와 국내 관련분야 네트워크를 연계하고 이를 통합 관리하는 ‘온라인 통합 한민족 네트워크(Korean.net)’를 구축하기로 했다.

한편 정부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이 이날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관련 부처간 유기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 제도 운영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기로 했다.

또 과학, 문화 등 특수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우수인력에 대해서는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내용의 국적법개정안도 올 상반기 안에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다시 써야 할 정조 시대 역사 / 중앙일보 / 2009-02-10

200년 만에 열린 블랙박스 … 적대파로 알려진 노론 심환지와 밀서 교환

군왕의 ‘비밀 편지’는 아침 녘에만 세 차례나 전해졌다. 하루에 네 번 보낸 일도 있었다. 서찰은 은밀하게 오갔다. 관복을 입지 않은 승정원 심부름꾼은 자유롭게 궁을 출입했다. 수신자의 관직이 높아지자 남의 눈을 의식해 양반집 노복(奴僕)이 밀서(密書)를 품고 궁을 오갔다. 이렇게 전달된 임금의 편지는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4년간 299통. 임금은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열사흘 뒤 숨을 거뒀다.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면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고위 관료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서간 299건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새롭게 발굴한 ‘정조 어찰첩(御札帖)’의 실물 일부를 공개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역사가 비켜간 ‘블랙박스’=이번에 공개된 정조 어찰은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보낸 것이라 이례적이다. 또 날짜별로 일괄 정리돼 공식 사료와 대조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다량의 서신을 정기적으로 받은 인물이 심환지라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조에게 가장 적대적인 당파로 알려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였다. 이는 왕조의 공식 사료인 『정조실록』 『승정원 일기』와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서신에서 정조는 편지를 태우거나 찢어버리라고 계속 말하지만 심환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서간을 통째로 보관해 뒀다. 심환지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간직한 이 방대한 자료는 200년 뒤 정조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역사의 ‘블랙박스’가 됐다.


◆ 정조의 집요한 ‘서신 정치’=정조는 ‘서신 정치’를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혁파 영수였던 남인의 채제공(1720~1799)에게도 개인 서신을 다수 보냈다. 이런 비밀 편지를 통해 공식 사료에선 알 수 없었던 정치 이면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먼 저 노론 벽파와 심환지에 대한 재평가다. 지금까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최대 적대 세력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정조가 수년에 걸쳐 은밀하게 심환지를 통해 ‘대리인 정치’를 했을 가능성이 이번 서신에서 제기된다. 벽파는 정조가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국정 파트너’였고, 심환지는 정조의 ‘복심’을 펼치는 최측근 신료였을 거란 해석이다. 예컨대 1798년 7월 14일, 정조는 심환지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8월 28일에는 우의정에 임명했다. 우의정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심환지는 궁을 떠나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며 예조판서를 그만두는 사직소를 세 차례나 올린다. 공식 사료에는 이런 인사 발령 사항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서 드러난 사실은 사직소를 올리는 횟수와 시기까지 정조가 지시했다는 것이다. 금강산 유람도 정조의 권유였다. 심환지를 우의정으로 삼아 국정운영을 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종의 정치적 속임수를 쓴 것이다. 공식 사료에는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돼 있는 상소문이 정조가 사전에 편지로 알려 준 문구 그대로 돼 있는 경우도 있다. 국왕이 의지를 직접 펴기 곤란할 때 측근의 신하를 통해 뜻을 펼친 것이다. 이날 토론에 참여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서신만을 놓고 정조를 ‘벽파의 후견인’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곤란하다”며 “정조는 다른 당파에도 비슷한 ‘서신 정치’를 했을 것이며 이것들이 발굴돼야 종합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조 독살설의 진실은?=정조는 1800년 6월 초 등창 때문에 앓기 시작해 20여 일 만에 급서했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현대 사극이나 작가들의 단순한 추리만은 아니다. 정조 사후에 남인 측이 제기하던 의혹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 강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는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 나온 내용을 더듬어볼 때 ‘독살설’은 단순한 ‘음모론’일 가능성이 커졌다. 정조는 수년에 걸쳐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렸다.

“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중략)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1800년 6월 15일)고 호소한다. 국왕의 병세는 국가의 일급기밀에 해당한다. 심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찰을 분석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서찰이 ‘독살설이 잘못됐다’고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환지가 음모에 관여됐다는 의혹은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시대 재해석 필요=이번 서신 공개로 인해 그간 공식적 사료에 의한 정조 시대 해석에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의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된다. 단국대 김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정조의 이면’이나 당시 정치의 ‘뒷모습’을 읽고 충격받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이 발굴을 ‘엄청난 선물이자 동시에 커다란 과제’라는 말로 표현한다. 300편에 이르는 정조 자신의 목소리를 공식 사료와 하나씩 대조해 가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 어찰 299편을 영인·탈초·번역하고 그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을 다음 달 중 발간할 계획이다. 이번 작업에는 한국고전번역원도 함께했다.

정조 어찰첩은 원래 심환지 가문에서 보관돼 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의 소장자는 심씨 가문과 무관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 공개를 꺼리는 이 소장자는 조만간 정조 어찰첩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기탁할 것이라고 전했다.

배노필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mercredi 4 février 2009

Nucléaire: les Etats-Unis et la Corée du Sud déterminés à stopper Pyongyang - AFP / 2009-02-02

Nucléaire: les Etats-Unis et la Corée du Sud déterminés à stopper Pyongyang

WASHINGTON (AFP) — Le président américain Barack Obama s'est entretenu lundi avec son homologue sud-coréen Lee Myung-Bak et ils se sont tous deux engagés à travailler étroitement pour mettre fin au programme d'armement nucléaire de Pyongyang, a annoncé la Maison Blanche.

Ils ont "discuté de la Corée du Nord et sont tombés d'accord pour travailler étroitement en tant qu'alliés et par l'intermédiaire des négociations à Six pour obtenir l'élimination vérifiable des armes et des programmes nucléaires nord-coréens", a déclaré le porte-parole de la Maison Blanche, Robert Gibbs, dans un communiqué.

"Au cours de discussions chaleureuses et substantielles, le président (Obama) a fait part de son engagement profond envers une alliance Etats-Unis/Corée du Sud", poursuit le communiqué.

Dans la capitale sud-coréenne, le porte-parole de la présidence, Lee Dong-Kwan, a indiqué que la conversation téléphonique avait duré environ 15 minutes.

"Concernant la question nucléaire nord-coréenne, le président Obama a dit qu'il était important que les pays renforcent leur coopération dans le cadre des négociations à Six", a-t-il dit au cours d'un point de presse.

"Le président Lee a exprimé ses remerciements à la nouvelle administration américaine pour son attitude résolue concernant la question nucléaire nord-coréenne".

M. Obama a également dit qu'"une série d'événements récents" l'avait amené à se rendre compte que la dénucléarisation de la péninsule coréenne pouvait être réalisée grâce à la coopération des Six, selon le porte-parole sud-coréen.

Les deux dirigeants ont dit attendre des discussions "en profondeur" lorsque la secrétaire d'Etat américaine Hillary Clinton se rendra en Corée du Sud au cours de sa prochaine tournée asiatique prévue ce mois-ci.

L'accord à Six (les deux Corées, les Etats-Unis, le Japon la Chine et la Russie) signé en février 2007 accorde à la Corée du Nord une aide énergétique et la normalisation de ses relations avec Washington et Tokyo ainsi qu'un accord de paix en échange du démantèlement de ses installations, de ses armes et matériels nucléaires.

Mais les discussions sont dans l'impasse en raison de désaccords sur la manière dont ce démantèlement doit être vérifié.

Lundi, l'armée nord-coréenne a promis de conserver son propre arsenal nucléaire tant que la menace nucléaire provenant des Etats-Unis ne disparaîtrait pas. "La Corée du Nord ne démantèlera jamais son armement nucléaire tant que les armes nucléaires en Corée du Sud ne seront pas démantelées pour ôter la menace nucléaire des Etats-Unis", a ainsi déclaré un porte-parole de l'état major nord-coréen, cité par l'agence de presse officielle.

Séoul nie posséder des armes nucléaires.

Par ailleurs, M. Obama et son homologue sud-coréen "ont fait part de leur intention de développer leur coopération dans d'autres domaines", selon le communiqué de la Maison Blanche.

Les deux hommes se sont ainsi notamment entretenus de la crise financière "et se sont mis d'accord pour coopérer pour stabiliser l'économie mondiale, relancer la croissance et rendre les marchés du crédit plus fluides, notamment au sommet du G20 à Londres" en avril.

美 국회도서관 ‘독도·동해’ 삭제 물의 - 쿠키뉴스 / 2009-02-02

[쿠키 사회] 미국 국회도서관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한국 지도를 소개하면서 독도와 울릉도, 동해를 표기하지 않는 대신 일본 지도에서는 독도는 물론 ‘일본해’까지 명시하고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VANK)’는 3일 “미국의 국회도서관이 한국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아예 삭제하고 동해를 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 국회도서관이 제공하는 한국판 지도(www.loc.gov/rr/international/asian/korea/korea.html)에는 서해(yellow sea)만 적혀 있을 뿐 남해나 동해는 표기돼 있지 않다. 특히 울릉도와 독도는 아예 그림조차 그려져 있지 않다.

반면 일본판 지도에는 물론 한국판과 달리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 작은 섬들까지 세밀하게 표시돼 있으며 동해가 일본해(Sea of Japan)로 오기돼 있다. 실제 일본판에는 독도만큼 작은 일본 섬인 ‘오키’가 적혀 있다.

반 크 박기태 단장은 “미 국회도서관 자료는 미국의 일선 학교에서 곧잘 학습자료로 활용되는 만큼 그 파급력이 대단한데 일본 지도에 표기돼 있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지도에서는 누락된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라며 “지도를 보는 학생들은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단장은 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우리 외교당국이 앞장서 잘못된 점이 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반쪽짜리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제 - 제민일보 / 2009-01-29

반쪽짜리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제
남편 등 다문화 교육 프로그램 부족·교육이수도 어려워…진정한 공동체 터전 마련해야

이주여성·노동자에게 한국어와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사회통합을 위해 마련된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제가 '반쪽짜리'로 전락할 우려를 낳고 있다.

이주여성의 남편과 이주노동자의 사업주가 다른나라 문화를 지속적으로 배울 수 있는 현실적인 프로그램이 부족해 자칫 일방적인 '문화 주입'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다문화 가정에게 프로그램 이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은 또 다른 족쇄를 채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지면서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이민자들이 한국사회 적응에 필요한 기본소양 함양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제'를 도입했다.

사 회통합프로그램 이수제는 초·중급 등 모두 4단계로 이뤄진 언어과정과 다문화사회 이해 과정으로 분류되며 희망자에 한해 단계별 시간을 이수해야 하는 제도다. 이수자에게는 귀화필기시험 면제, 국적취득 대기기간 단축 등 각종 인센티브가 부여된다.

법무부는 올해 전국적으로 20개 기관을 선정했으며 도내에는 제주이주민센터가 뽑혀 다음달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이번 프로그램이 이주민과 도민들의 쌍방향적 '사회통합'교육보다 일방적인 '한국 문화 주입'교육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제기돼고 있다.

마 련된 프로그램에는 이주여성의 남편이 자율적으로 타국 언어 및 다문화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포함돼 있지만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남편들이 교육에 시간을 투자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비정규직 또는 농업에 종사, 저녁이나 주말을 활용하는 등의 맞춤형 프로그램이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 이주 여성 및 노동자들이 여건은 감안하지 않은채 이수를 위해 200시간이 넘게 교육을 받아야 하는 등 '다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도내 이주민 상담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사회통합이수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한국에 온 외국인들에게 한국화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은 ´꽃보다 남자´ 어떻게 볼까? - 데일리안 / 2009-01-27

<칼럼>한국·일본과 달리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사회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상류층에 대한 각 문화권의 대중적 시선을 생각토록 한다. 우선 유럽과 미국을 비교해보자. 유럽은 아직도 귀족계층이 잔존한다. 그러나 미국에는 귀족계층이 없다. 특히 미국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돈과 명예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부와 사회적 지위가 주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부여한 운명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상류층에 대한 반감이 덜하며, 기업정서도 반감에 차지 않는다. 누구나 대기업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기업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상류층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덜하다. 그만큼 사회가 이미 상하위층 사이에 역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또한 애써 상류층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도 덜하다. 그럼 동양권은 어떨까?

‘꽃보다 남자’는 일본 만화 원작을 대만과 한국에서 리메이크 했다.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것이다. 상류층 남성들과 서민층 여성이 벌이는 로맨스 판타지다. 로맨스 판타지의 주류흐름이 그렇듯이 여주인공은 상류층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인물은 아니다.

커트 코베인과 같이 상류층 문화에 대해서 일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상류층과 관계 맺기를 염원하지만, 여주인공은 그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여주인공에 상류층 남성이 관심을 갖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다.

남들은 욕망하고 염원하는 상류층에 저항하고, 쿨 해야 그들과 맺어진다는 역설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결국 주인공 스스로 상류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사랑을 맺으면서 대리적인 신분상승을 구가하려 한다.

이들 세 나라는 전통적인 정서가 많이 남아있다. 전통적인 계급사회가 많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부존자원이 없을수록 내부경쟁은 치열하고, 일정한 자원과 부는 한쪽에 쏠리는 것으로 관찰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는 이중적인 심리가 나타나기 쉽다.

상류층에 대한 반감과 선망이다. 자원을 많이 확보한 이들은 그만큼 다른 이들의 위에서 군림하고, 그것은 권력과 힘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통제감을 원하는 심리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선망한다.

‘꽃보다 남자’에서 준표에 대한 시선이 이와 같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그러한 성공한 상류층이 될 수 있는가다. 예컨대, 아메리칸 드림 같은 것이다.

일본은 사회가 정체되고,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상하간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의 경우에도 상하간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에서 상류층은 정당한 대가를 통해 부를 축적한 이들로 생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공통적으로 부자들의 삶이 사치스럽고, 낭비적이라는데 초점을 맞춘다.

현실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물질지향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정신적인 황폐함에 처해있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적 기류가 있다. 이러한 점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파리의 연인’ 같은 작품에서 메시지의 골간이었다. ‘꽃보다 남자’도 그렇듯이 상류층 여성은 모두 속물이고, 서민출신 여주인공은 자신 스스로 주체적이면서도 순수하다.

상하계층의 이동 폐쇄성은 ‘꽃보다 남자’ 같은 콘텐츠를 생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자신이 상류층이 될 수 없는 구조는 두 가지 심리를 파생시킨다. 자신이 상류층이 될 수 없다고 상류층과 관계를 맺어 그들의 반열에 오르려는 심리다. 다른 하나는 일순간에 프리 라이더처럼 상류층이 오르려면 욕구에 대한 비판심리다.

열심히 노력을 한 대가로 상류층이 될 수 없는 사회에서는 겉으로는 상류층에 반감을 드러내게 하지만 속으로는 선망의 심리를 잉태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계층이동성이 떨어지는 사회에서 ‘꽃보다 남자’같은 콘텐츠는 욕하면서도 보는 드라마로 높은 시청률을 보이게 된다.

´꽃보다 남자´에 대한 부가적인 논쟁은 한국사회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영국이나 일본에서 일반인이 왕족이 된 사실에 널리 화제가 되는 것은 상류층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식과 사회의 비유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왕족이 없기 때문에 기업상류층(재벌)들을 등장시킬뿐이다. 만약 이러한 콘텐츠가 미국에서 만들어진다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할 것이다. 자기 개인 스스로 성공해 상류층이 되는 모델을 제시하며 강대국이 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꽃보다 남자´의 F4는 자수성가한 인물들이 아니라 부모 덕에 사치스런 고교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할리우드 환타지 로맨스에서 부유한 인물은 자수성가를 중요시 한다. 어쩌면 ´꽃보다 남자´ 같은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계층 고착성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시장, 통제 불가능한 대중을 낳다 - 문화일보 / 2009-01-30

시장, 통제 불가능한 대중을 낳다
추방과 탈주 / 고병권 지음 / 그린비

최근 용산 재개발지구 철거민 사망사건은 갈등을 조정하는 우리 사회의 기능이 사실상 부재함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양상, 단순히 양극화로 설명될 수 없는 일상화된 구조조정과 영속화된 삶의 불안이라는 우리 저변의 단면 그리고 그들을 주변으로 배제하려는 중심의 의지를 섬뜩하게 드러낸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대표인 저자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추방’과 ‘탈주’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 자본과 노동이라는 단순한 틀은 지금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데 유효하지 못하다.

저자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라는 점에서 정권 교체와 상관 없이 일관된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이제 영속적인 현재진행형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국익’과 ‘전체’를 위한 ‘일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희생이 불가피한 ‘일부’는 셀 수 없이 많아졌고 결과적으로 ‘전체’에 포함되지 못하는 ‘일부’가 한국사회 대다수 ‘대중’의 형상이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권력과 자본의 중심에 의한 대중의 추방현상을 저자는 ‘주변화(marginalization)’라고 부른다.

주변, 한계, 이익, 공백이라는 의미를 갖는 ‘마진(margin)’은 우리 사회 대중의 중층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마진’은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부차화된 곧 ‘주변’의 대중을 나타내며, 대중의 삶이 처한 상황 곧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권력과 자본은 ‘주변화’를 통해 마진, 곧 ‘이익’을 챙긴다. 주변을 생산하고 관리하고 활용한다. 비정규직은 그 대표적 사례다.

한편으로 ‘주변’은 예외적 공간, 치외법권 지대 같은 성격을 갖는다. 국가에 의해 추방된 대중은 권력으로부터, 법으로부터 탈주하려 한다. 저자는 이 같은 대중의 탈주현상을 ‘주변화’에 대비해서 ‘소수화(minoritization)’라고 부른다. 주변인으로서의 대중이 지배적 척도에 의해 인정 받기를 꿈꾼다면, 소수자로서의 대중은 척도로부터 탈주한다. 그런데 최근 국가의 추방이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소수자 대중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에 통제의 편익을 제공했던 ‘주변’으로의 추방은 새로운 통제 불가능성을 낳고 있다.

예컨대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임금과 권익을 빼앗기는 쉽지만 동시에 그들의 저항에 대한 통제수단도 없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보장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지만 거꾸로 합법적인 이주노동자들처럼 작업장 이동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이동성에 대한 권력의 통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권력은 대중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공포와 불안을 통한 지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각 불가능한 지대로 탈주하는 대중에 대한 통제 불가능의 문제가 새롭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추방’이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해준다면, ‘탈주’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저자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해 “공포를 통한 통치가 실패한 곳에서 공포를 잃은 대중에 대한 공포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한국인이 앓는 ‘학벌 출세론’ 내력과 처방 - 한겨레 / 2009-01-30

〈입시전쟁 잔혹사〉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

1960년대 군사정권은 과외수업을 금지시켰지만 과외수업은 계속됐다. 1967년 부산에서는 과외공부를 끝내고 밤늦게 귀가하던 초등학생이 살해되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 서울 덕수초등학생 4명이 가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강준만 교수 ‘대입전쟁’ 역사 짚어
“일제때 벌어진 교육구국운동
개인·가문 번영 도구로 변질”
서울대·연고대 소수정예화 주장도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건강한 사회라면 ‘억울하면 바로잡자’가 되어야 할 텐데,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선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출세’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일제가 친일파 지식인을 적극 육성하던 1920년대 중반부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출세’라는 용어가 수입돼 ‘재가자가 스님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본디 뜻과는 정반대의 뜻, 곧 ‘세속적 성공’이라는 의미가 당시 새롭게 보태졌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이 ‘입신양명’의 ‘양명’ 대신 택한 게 ‘출세’였다. 1924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던 극소수의 조선인 학생들은 식민지 고등관료로 진출하기 위해 고시 열풍에 몸을 던졌다. 해방 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문정관으로 일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일본인들은 공식적으로 고등교육을 확대된 관료기구의 고속도로로 이용했으며 더욱이 자신들이 독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조선인들의 식욕을 돋우는 구실을 했다”고 썼다.

이미 조선시대 초기부터 과거시험의 출세도구화와 아들의 출세를 존재 근거로 삼는 어머니 중심의 ‘자궁 가족’ 기본구조는 사회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 바탕 위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벌어진 교육구국운동은 개인과 가문의 번영을 위한 각개약진 운동으로 변질됐다. 일제강점기와 미군 점령기를 거치면서, 다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교육출세론’은 한국인들의 뼈에 깊이 각인됐다. 전통적 지배세력과 이를 받쳐주던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학력을 갖춘 이들의 계급이 수직상승하는 걸 보면서, 학력과 학벌이 해방 뒤 친일 경력에도 면죄부를 주는 강력한 방패 노릇을 하는 걸 목격하면서, 모아둔 재산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해도 학력만은 온전한 걸 재확인하면서, 1960년대 들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건 사실상의 계급투쟁이자 권력투쟁”이 됐다. 교육정책도 철저히 ‘1류’ 위주로 돌아갔다.

1970년대에는 “학력과 학벌로 기를 죽여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벌어졌다.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며 모멸감을 삼켰던 ‘못 배운’ 노동자들은 탄압을 성토하는 전단을 낼 때도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은 없지만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고…”라며 은연중에 교육받지 못한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1980~90년대를 거치며 입시전쟁은 더욱 잔혹해졌다.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가 등장하는 2000년대에도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전반의 문제해결 의지와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사교육 과잉과 입시전쟁은 정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대중은 정치라는 ‘공적 해결방식’ 대신 각개약진식의 ‘사적 해결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쓴 <입시전쟁 잔혹사>는 이렇듯 한국 사회의 광적인 교육 열풍과 입시문제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짚어가며 “모든 문제의 몸통은 대학이고 입시전쟁과 사교육은 그 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대학입시 전쟁이며, 그 원인은 이른바 ‘스카이’(SKY) 출신들이 사회의 요직을 독점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강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서울대의 나라>를 비롯해 그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러번 주장해왔던 바다. 그는 여기에 보태 자신의 주장이 이제까지 ‘서울대 폐교론’으로 오해됐다고 지적하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의 정원을 단계적으로 대폭 줄여 소수정예주의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각 분야 엘리트의 출신 대학 구성을 다양화하면 대학 서열에 유동성이 생기고, 대입전쟁의 열기를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비판에 그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근본주의적 대응이 오히려 학벌주의 완화를 ‘하향평준화’라 비판하는 전형적 엘리트들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며 현실적인 해결책을 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서울시 인턴 외국인 유학생들이 본 '서울' - 조선일보 / 2009-02-01

피부색은 달라도 웃음은 하나였다. 지난달 30일 낮 청계광장에 모인 젊은이 19명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연방 웃음바다를 이뤘다. 국적도 외모도 각각인 이들의 공통점은 '서울'. 서울시가 겨울방학을 맞아 모집한 '글로벌 인턴'으로 뽑혀 지난달 5일부터 함께 시청에 서 일하고 있어서다.시는 지난해부터 서울지역 대학(원)에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 중 인턴을 선발, 외국인 관련 부서에 배치해 해외 사례 분석이나 외국인 불편 해소 같은 업무를 맡겨 왔다.이들은 오는 9일 인턴십 수료를 앞두고 시가 마련한 '시정(市政) 현장 투어'에 참가해 종로소방서 교통정보센터, 성동구 마장동 청계천문화관, 한강을 하루 동안 돌아봤다. 현장 투어에 동행해 그들이 느낀 서울과 서울 사람 얘기를 들어봤다.

◆외국 사람으로 서울 살기

"서울에 살면서 '빨리빨리'에 반했어요." 지난해 9월 서울에 유학온 중국인 류환(여·21·서울대)씨는 말한다. "인터넷은 금세 연결되고 어지간한 행정 사무도 신청한 자리에서 뚝딱 해결돼요. 서울에 살고부터 인생이 길게 느껴집니다." '빨리빨리'가 한국 사회의 조급증을 비꼬는 뜻으로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편한 점이 많다는 설명이다.몽골인 절버(여·23·서울대)씨는 "다른 나라 대도시들은 밤 늦게 걷기 꺼려지는 곳이 많다는데, 서울에서는 여자들끼리도 늦게까지 다닐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서울이 '치안이 탄탄한 도시'일 뿐 아니라 해외 유명 대학을 나온 교수가 수두룩하고 교육 수준이 높다는 점에도 놀랐다고 했다. 서울살이 4개월째인 카자흐스탄인 달가트(21·연세대)씨는 "지하철이 잘 돼있고 교통요금 같은 물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그리 비싸지 않아 살기 편하다"고 말했다.서울의 고쳐야 할 점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중국인 옌징(여·23·서울시립대)씨는 "중국도 많은 발전을 하고 있는데 자꾸 '못 산다'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어 속상했다"고 했고, 후멍(여·24·성균관대)씨는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역동적인 서울의 매력을 깎아먹는다"고 지적했다.

◆서울시청에서 일해보니…

"4 년 전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몽골어 안내 책자가 없어서 힘들었는데, 시에서 그걸 만들고 게다가 그 작업에 동참하게 돼 기뻤어요." 몽골인 엘벡 바야르(29·한양대)씨는 글로벌 인턴으로 일한 소감을 묻자 그렇게 답했다. 그는 시 생활경제담당관실에 배치돼 전통시장의 쇼핑 용어를 몽골어로 번역해 안내 책자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전통시장에서 쓰는 말을 8개 외국어로 옮긴다니 누구나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려는 노력을 실감하게 됩니다."외국인 유학생 인턴 19명은 서울시 10개 부서에 배치돼 일해 왔다. 짧은 일정이지만 시정 이모저모를 본 셈인데, "외국인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정착할까 생각했다" "업무방식이 체계적이었다"는 긍정적인 감상을 얘기했다.쓴소리도 적진 않았다. 여섯 살에 뉴질랜드 이민을 떠났다는 손준희(24·서울시립대)씨는 감수를 맡은 서울시 영어 안내 책자를 보면서 의아했다고 말했다. "한국 음식인 '떡'을 한국어 발음대로 'dduk'이라고 표기해도 될 텐데 왜 굳이 'rice cake'라고 쓰죠?" 전통 음식이나 고유 명칭을 한글 발음대로 쓰지 않고 의역해 적는 습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스시' 같은 고유어를 그대로 써서 세계화했듯 서울도 전통문화를 있는 그대로 전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조언했다.

◆"깔끔한 청계천, 화려한 명동"

'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글로벌 인턴들은 청계천·명동·신촌 등을 꼽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깨끗한 물줄기와 독특한 다리 모양이 아름답고, 화려한 쇼핑거리와 활기찬 대학가에 가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서울 사람들은 일상으로 느끼지만 그게 사실은 '매력'이란 얘기도 있었다. 중국인 리진지(여·21·광운대)씨는 "길에 서서 떡볶이를 먹는 게 가장 즐겁다"고, 판웬팡(여·26·성균관대)씨는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대학로의 자그마한 극장들이 좋다"고 말했다.미국인 조나스 폴 코프(28·연세대)씨는 '지하철을 타고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보는 한강'과 '봄이면 서울을 뒤덮는 황사'가 매력적인 풍경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멋 아닐까요?"

'얼굴에 소화기 뿌리는 국회', LA타임즈 보도에 또 등장 - 조선일보 / 2009-01-28

'얼굴에 소화기 뿌리는 국회', LA타임즈 보도에 또 등장
조선닷컴

지난해 12월 한미 FTA 비준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벌어졌던 충돌사태가 다시 한번 해외 언론의 기삿거리로 등장했다.

미국의 일간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28일 1면 고정 기획기사란인 ‘칼럼 원(one)’을 통해서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일어난 충돌을 자세히 소개하며 “이 사건이 한국정치에서 왜 폭력이 수반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됐다”고 보도했다. 국회 충돌사태는 이미 지난해 12월 19일자 이 신문에 ‘한국 국회의 난투극’이란 제목으로 실린 적이 있다.

‘ 한국 의원들: 쇠망치를 들고 복도 건너기’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보도된 이 기사에는 얼굴에 대고 소화기를 분사하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충돌 상황은 “성을 빼앗기 위해 몰려드는 공격군과 이를 막기 위해 뜨거운 기름을 퍼붓던 수비군의 21세기형 작은 접전이 끝난 뒤, 마침내 야당은 (여당이 친 장막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는 등 전쟁을 묘사하듯 그려졌다.

이 신문에 따르면 정치학자들은 이러한 한국 국회의 폭력사태에 대해서 ‘약관을 갓 지난 한국민주주의의 성장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황경문 교수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20년에 불과하다”면서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인들은 군사독재에 신음했고 그때는 지식인과 학생들의 거대한 정치투쟁이 있었고 지금의 사태는 권위에 저항했던 그 시대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토론문화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한쪽에서 ‘내 방식이 옳다’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아니다’고 반박하는 등 조정의 문화가 부재하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여당이 국회에서 폭력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하고 있지만 야당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이 자체가 또 다른 난투극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독도 지키기' 학부모들 나섰다 - 미주 한국일보 / 2009-01-30

뉴욕한인학부모협, 내달부터 연중 캠페인
'동해 병기운동'도 병행

뉴욕한인학부모협회(회장 최윤희)가 올 한해를 ‘독도 지키기 운동의 해'로 정하고 2월부터 연중 캠페인을 본격 전개한다.

협 회는 2007년 한 해 동안 미국판 한국 역사 교과서 왜곡 논란을 일으킨 ‘요코 이야기’ 추방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경험을 되살려 올해는 해외 독도 지킴이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대다수 공공기관과 교과서에 ‘일본해’로 표기돼 있는 동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 독
도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동해 병기 표기 운동‘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며 많은 한인학생과 학부모들의 관심과 동참을 당부하고 있다.

최 윤희 회장은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소수계 흑인 출신인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을 차지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로 ‘독도 지키기’와 더불어 ‘동해 병기 표기’를 이슈화해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회는 2월4일 오전 10시 JHS 189 중학교에서 열리는 정기 월례모임에 이를 공식 안건으로 상정하고 각 지역학교 한인학부모들을 주축으로 궁극적으로는 범동포적인 참여를 독려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3월1일로 다가온 삼일절을 시발점으로 삼아 미 주류사회에도 뉴욕한인사회가 불씨를 당긴 ‘독도 지키기 운동’과 ‘동해 표기 병기 운동’을 적극 홍보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더 불어 3월에 열리는 뉴욕시교육청 전체 모임에도 한인학부모들이 단체로 참석해 미국 공립학교에서 잘못 다뤄지거나 미흡한 한국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도 앞장설 예정이다. 협회는 ‘요코 이야기’ 추방운동을 전개하던 2년 전에도 뉴욕시 교육청 모임에 단체로 나가 뉴욕시 교육관계자들을 상대로 릴레이 발언을 하며 한국 역사 왜곡 문제를 따끔히 꼬집어 주목받은 바 있다.

협회는 2월 열리는 정기모임부터 매달 독도 관련 자료와 정보를 제공해 나가는 것은 물론, 관련활동을 펼치는 전문가들을 초청,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무료 특별강연도 마련해 나갈 계획이며 필요하다면 모금운동이나 서명운동도 함께 전개해 나갈 예정이다.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박정동교수의 ‘세계 경제의 핵 화교’ ⑬]진출 200년…화교가 정착 못한 ‘유일한국가’ - 중앙일보 / 2009-01-27

[박정동교수의 ‘세계 경제의 핵 화교’ ⑬]진출 200년…화교가 정착 못한 ‘유일한국가’ [중앙일보]

취직할 때나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의 이력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이력서는 다시 말해 자신의 과거를 소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알면 현재나 미래를 미루어 짐작 할 수있다. 물론 과거를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만큼의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한국 화교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 화교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화교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세계로 뻗어있는 화교 네트워크. 그들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호주, 그리고 유럽에 이르기까지 개발도상국, 선진국을 막론하고 그들의 터전을 꾸렸다. 갖은 고난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지리적으로 가깝고,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동아시아의 역사를 함께해왔던 우리나라에서도 큰 성장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화교들이 성장할 수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일단 미국, 호주, 유럽 등지와는 달리 같은 황인종이라 인종차별의 걱정이 없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중국과의 교류도 원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역사를 공유해 온 동양문화권이라는 큰 장점이 있다. 새해 첫 날을 음력으로 지내고 추석을 쇠는 등, 한국과 중국의 문화에는 공통점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같은 한자문화권이라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의사소통이 용이하다. 또 우리나라에 화교들이 정착할 때에는 일본, 미국 등의 나라와 같이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도 아니었다. 화교들이 투자할 여건도 충분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도 화교들이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화교가 진출하고도 자리 잡지 못한 유일무이한 나라이다. 자리 잡기는커녕 화교들이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한지 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인천에 자그마한 차이나타운이 하나 있을 따름이다. ‘다른 나라에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성장한 화교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성장하지 못했을까?’라고 질문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한국의 화교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인천에 차이나타운 있잖아? 잘 정착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무관심이 화교가 대한민국 땅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가장 큰 증거다.

2005년 서울에서 제8차 세계화상대회가 개최된다고 결정되었을 때, 많은 화교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한국은 화교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의 3대 차이나타운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였다.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인근의 도쿄 디즈니랜드보다도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을 정도로 관광명소다. 일본은 이를 위해 국가에서 화교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반면 우리나라는 화교를 지원하는 정책은 고사하고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화교 사이에 악명이 높았던 것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언제까지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8차 세계화상대회를 통해 화교들은 대한민국 이미지를 개선했다. 또 화교들을 위한 정책도 하나하나씩 추진해 나가고 있어, 화교의 수는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화교는 급증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교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비하다. 화교가 급증하는 것은 마치 불과 같지 않을까? 불은 유용하지만 잘 알고 쓰지 않으면 꺼트릴 수도, 화를 입을 수도 있다. 몰려오는 화교들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되었다. 더 이상 무관심으로만 대할 수는 없다.


최초의 한국 화교는 淸때 입국한 상인 40여명

우 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는 먼 고대에부터 함께해 왔다. 오랜 역사 속에서 중국과 이웃한 우리나라는 서로 적국이 되기도 하고, 우방국이 되기도 하며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 와중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중국의 옛 역사서에서 찾기도 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 중국인이 맨 처음 들어온 기록도 바로 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 따르면 은(殷) 왕조 말엽, 주(周) 왕조 초(BC 1112년), 은의 태자인 기자(箕子)가 5000명의 군중을 데리고 한반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인이 외국에 나간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를 한국화교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고대의 일이기 때문에 화교라고 칭하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또 위만이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망명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이후에도 역사의 각 시기마다 중국인들은 개별 또는 집단으로 우리나라에 이주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주는 산발적이어서 현재의 화교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본격적으로 ‘한국 화교의 시초’라고 부를 수 있는 화교들이 등장한 것은 청나라 때이다. 1882년 8월 조선과 청국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을 계기로 본격적인 이주가 이뤄졌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후 청나라는 군함 3척과 상선 2척을 파견했다. 청국군인 3천명과 군수품 보급을 위해 동행한 상인 40여명의 입국이 본격적인 화교이민의 시작이었다.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화교이민이 촉진됐다. 그 이유는 바로 청나라 내부의 혼란이었다. 먼저 1898년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다. 폭동의 진원지였던 산둥(山東)성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많은 이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으로 피난을 왔다. 그리고 1920년에는 산둥성, 안후이(安徽)성, 장쑤(江蘇)성 등 주요 농업지역을 대홍수가 휩쓸었고, 1940년대 중후반 중국대륙의 정치격변도 화교들의 한국 유입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화교들이 증가해 1940년대에는 약 8만 명의 화교가 우리나라에 거주하게 됐다. 하지만 화교 인구는 곧 1만7000명 정도로 줄었다. 다시 8만 명의 인구를 회복한 것은 21세기 이후다.

글=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 / 이승훈 연구원(www.uics.or.kr)

결혼이민자 5년새 3배… ‘다인종 코리아’ 성큼 - 동아일보 / 2009-02-01

[달라도 다함께/함께 사는법]<1>2009 다문화 현주소-한국

결혼이민자 5년새 3배… ‘다인종 코리아’ 성큼

《동아일보는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에서 최근 10년간의 등록 외국인 통계를 제공받아 지리정보시스템(GIS·통계청 자료 제공)과 컴퓨터활용보도(CAR) 기법으로 다양한 분석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 국내 거주 외국인의 다양한 통계적 특징을 확인했다. 》

출신국가- 中 48만4674명 가장 많아… 美는 2만8853명 5위

인력분포- 단순 기능인력 61%… 유학 - 연수생 10년새 18배

거주지역- 서울-경기 51만… 영등포구 1000명당 86명 밀집

우리나라에는 현재 170여 개국에서 건너온 외국인 85만4007명(91일 이상 거주하는 등록 외국인)이 터전을 꾸리고 있다. 전체 인구의 1.7%.

1998년 등록 외국인 14만7914명에서 10년 사이에 6배로 늘었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통계상으로 한국은 이미 세계인이 모여 있는 다문화 사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를 다문화 사회로 규정하는 데 부정적이다. 특정 국가 출신이 전체 외국인의 절반을 넘고, 대부분은 방문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대로 몸집만 불릴 경우 국제화, 선진화는 요원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적극적인 준비와 대응으로 다문화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시점이다.

○ 57%가 중국 출신

다양한 국가 출신이 한국을 찾고 있지만 그 면면을 보면 다양성이 부족한 실정이다.

출신 국가별로 보면 중국 동포를 포함한 중국인이 48만4674명으로 전체 등록 외국인의 57%를 차지한다.

이어 베트남 7만9848명, 필리핀 3만9372명, 태국 3만51명이고 미국 인도네시아 대만 몽골 일본 등의 순으로 비중이 높다. 출신국 상위 10개국 가운데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시아권 국가다.

또 전체 175개 국적 가운데 30%나 되는 55개국은 출신 외국인이 10명 미만이다. 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 감비아, 키리바시 등 10개국은 각각 출신 외국인이 국내에 단 1명뿐이다.


○ 인력 수급 불균형

단기간 체류하는 단순기능인력에 집중된 구조도 문제로 지적된다.

비자 자격별로 분석한 결과 단순기능인력의 비중은 61%인 데 비해 전문 인력은 3.7%에 불과했다. 각각 43.4%, 6.8%였던 10년 전 상황보다 더 악화됐다. 외국인 근로자는 급증하고 있지만 고급 인력은 유입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유학 및 연수생의 꾸준한 증가는 긍정적 신호다. 1998년 4134명에서 2008년 7만4227명으로 무려 18배로 늘었다. 결혼이민자가 2003년 4만4416명에서 12만2552명으로 증가한 것도 눈에 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특히 유학생의 증가는 한국과 세계를 이어주는 인적 교류를 활성화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며 “다만 양적 팽창에 그치지 말고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적별 특징도 흥미롭다. 중국 동포는 압도적으로 방문 취업자가 많다. 중국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는 결혼 이민자다. 러시아인과 일본인 역시 결혼 이민자가 많고, 미국인은 회화 지도 자격으로 입국한 경우가 많다.

○ 수도권 집중 현상

외국인의 인구 분포는 우리 국민의 인구 분포와 닮은꼴이다. 전체 외국인의 60%나 되는 51만2034명이 서울 경기 지역에 몰려 있다.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 심각한 것.

서울 영등포구가 인구 1000명당 86.8명으로 밀집도가 가장 높다. 이어 경기 안산시 단원구가 83.3명, 서울 금천구 72.5명, 부산 강서구 71.0명, 전남 영암군 68.4명 등이다.

영등포구의 외국인지원팀 관계자는 “취업 비자로 들어온 외국인들은 주로 소규모 공장 지대나 전월세금 등 생활비가 저렴하게 드는 곳으로 몰린다”며 “서울 구로구 구로동이 재개발되면서 그쪽에 있던 외국인이 최근 영등포로 많이 넘어왔다”고 말했다.

또 중국인은 서울 영등포구에 가장 많이 살고, 필리핀인과 베트남인은 경기 화성시, 캐나다인과 일본인은 서울 용산구, 미국인은 서울 강남구, 프랑스인은 서울 서초구에 주로 사는 등 국적별 거주 특성도 나타났다.

○ 편견의 벽 허물어야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편견의 벽이 높다. 이달부터 TV 전파를 타는 ‘다문화 가정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라는 공익광고는 편견과 차별이 많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이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우리는 국적과 혈통, 국민 정체성 등 어느 하나만 결여돼도 국민으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라며 “부정적인 시선도 문제지만 이주민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선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다문화를 바라보는 폐쇄적 시각은 경쟁력 향상에 걸림돌이 된다. 정부가 대통령 직속의 국가브랜드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법무부 외국인정책본부를 운영하는 등 대(對)외국인 정책에 고심하는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해외 인재 유치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을 ‘친한파’ ‘지한파’로 만드는 것도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권혜진 기자 hjkwon@donga.com

서울대 한국학 분야 첫 외국인 교수 - 동아일보 / 2009-02-01

美 히트매넥 씨 국사학과 부교수 임용

서울대가 개교 6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학 분야에서 외국인 교수를 맞이한다.

서울대는 미국 국적의 마일란 히트매넥(57·사진) 현 성균관대 교수를 인문대 국사학과 부교수로 임용키로 했다고 1일 밝혔다.

서울대는 국사학과의 외국인 교수 채용에 지원한 후보 7명을 상대로 서류심사와 면접 등을 실시해 히트매넥 교수를 선정했으며, 최근 단과대학과 대학본부 인사위원회를 거쳐 임용 결정을 내렸다.

미국 스탠퍼드대 출신인 히트매넥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한국사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학과, 펜실베이니아대 역사학과 등에서 조교수를 지내고 지난해 3월부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로 일해왔다.

조선 시대의 서원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구 학자로는 드물게 이 분야의 실증적인 연구를 계속해온 점이 이번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노명호 학과장은 “서구인들이 어떤 관점에서 한국사를 보고 있는지 이해하고 앞으로 국제 사회에 어떻게 한국사를 이해시켜 나갈지 고민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