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10 juin 2009

지도 이면의 세계 / 오마이뉴스 / 2009-06-03


여행기중독자가 자가 정신진단을 해 보건데 작금의 상태는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상태인 것 같다. 좀채로 벗어나기 힘들다. 일종의 정신적 디아스포라(유민) 상태이기도 하다. 앞으로 최소 3년 반은 가해자 그룹의 지배하에 살아야 하고, 그 이후의 미래도 보장된 것은 없다. 아픔을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죽음의 의미가 왜곡될까 하는 걱정에서 모두들 폭력을 자제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는 아직 피딱지는커녕, 채 지혈도 되지 않아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그들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지구인 마냥 그 상처에 이태리타월을 대고 밀어 재낀다. 고통스럽다.

아픔을 견디자니 괴로운 것이 사실이고, '치료'를 하려는 시도조차 왠지 미안스러워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로 지내고 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것도 사치스러운 도피만 같거니와 여유도 없다. 이 정도의 증상이면 정신적 외상이라는 소견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경험상, 이럴 땐 차라리 시야를 좀 더 깊고, 멀리 보내는 것이 정신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책을 집어 든다. 지도가 가득 들어있는 책 한권을 펴놓고 멍하니 바라본다. 지도를 보며 우리는 우짜든둥 이 지구라는 외로운 행성에서 살아가야 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한반도라는 땅덩어리에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도 이면의 세계

대략적으로 정치는 경제의 논리를 따라가고, 여행은 문화의 논리를 따라간다. 정치적 사건사고가 많은 나라들은 일단 '여행 금지국가' 혹은 '여행 주의국가'로 지정되어, 호기심 많은 여행자나 극성맞은 저널리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일단은 돌아가야 한다. 또 '주의국가'가 아니라도 어느 나라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군사지역이나 산업지역 지역은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 서울광장처럼...

해외 여행시 들뜬 마음으로 정신줄 놓고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는 스파이로 과대평가되어 어두운 골방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쉽게, 길 하나 차이로 일어난다. 그 어느 일본 관광객처럼...

정치와 여행이 상극인 이유는 또 있다. 정치 이야기는 여행자들에게 금기에 가깝다. 정치문제는 나라 간에도, 같은 나라 사람들 간에도 수많은 트리우마로 이루어져 있는 지뢰밭이다. 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가는 감정만 상하기 좋고, 길게 이야기 해봐야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딱 좋다.

그런데 문제는 여행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견문을 넓히는데 있고, 그곳의 생활을 지배하는 중요한 논리가 정치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여행을 온 외국인을 생각해 보자. 그저 영어 학원에서 알바 뛰며 홍대 클럽을 전전하는 여행자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다니는 여행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작금의 추모물결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문제일 것이다.

만약 몰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한국은 영어에 환장한 사람들과 놀기 좋아하는 젊은이의 나라로 기억될 것인 바, 그렇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을 깊이 이해할, 나아가서는 극동아시아를 이해할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다른 나라의 정치문제에 대해 주제넘게 따지는 짓은 몰상식한 짓이지만, 그 나라의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는 일은 여행자의 미덕이며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는 원래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한 아르테 TV에서 1990년부터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다큐멘터리 <지도의 이면>을 토대로 기획된 것으로, 2005년에 1권 <이틀라스 세계는 지금>에 이어서 그 후속작으로 펴낸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의 장점은 지도를 따라 정치, 경제, 역사, 종교, 환경 등을 다각도로 접근하여 세계의 내막을 심도 있게 파헤치고 있다는데 있다.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는 50여 개의 주제별로 주요 현안을 다루면서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윤곽을 보여준다.

"여러 영역에서 세계화의 충격을 다룬 1부에서는 급부상하는 신흥강국의 허와 실, 산업시설의 해외이전과 이민 문제, 경제 불평등, 확산 일로의 전염병, 다시 활개 치는 마피아와 해적, 위협받는 생물의 다양성 등을 짚어 본다. 이어 2부에서는 재편되는 역학 관계에 초점을 맞춰 미군의 재배치 문제, 국제동맹을 지향하는 나토의 변화, 에너지 자원을 둘러 싼 긴장국면, 중앙아시아의 지정학, 새로운 강국들이 탐을 내는 아프리카를 집중 조명한다." - 역자 후기 중

모든 주제가 새로울 것이 없게 느껴지다가도 일단 책을 펼치면 각각의 요소에 의해 세계가 얼마나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지도와 분석이 가득하다. 여행자들은 우리가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이 행성은 자원과 이권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앞질러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요충지들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내용은 자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국과 그 외의 강대국들과의 패권구도이다. 이념이 사라진 시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강국들은 어느 나라인가? 그리고 강대국들은 과연 무엇으로 영향력을 유지, 확대하고 있을까?

우선 떠오르는 신흥강국은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모두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각 대륙에서 중심국가로 거듭나고 있다. 중국은 이미 그 규모로 볼 때 강대국의 대열에 진입한지 오래고, 현재는 국제 패권 경쟁에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 러시아, 아프리카, 브라질과 연대를 이루는 외교에 바쁘다.

인도도 많은 사람들의 비관적인 전망을 극복했다. 농업을 발전시켜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하였으며, 인구, 영토, 성장률, 과도한 군사력(30년 전부터 핵무기를 보유했다), 안정된 정치질서, 첨단 과학기술로 '거의' 강국의 반열에 올라있다. 인도의 인구는 2030년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반열에 있는 브라질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다소 생소한데, 그 실상을 알고 나면 매우 놀랍다. 브라질은 엄청난 지하자원과 농업자원의 나라로 남아메리카 경제의 중심이다. 브라질은 미국과의 협정인 전미자유무역지대보다 '메르코수르', 즉 남미공동시장(브라질, 우르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베네수엘라)의 확대에 주력하고 있으며,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와 기술과 정치면에서 협력하여 미국경제에 종속되지 않은 경제대국을 꿈꾸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체 아프리카 GDP의 25%을 차지하고 있고, 생산시설은 전 아프리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다이아몬드가 이곳을 통해 거래되며, 세계에서 금이 가장 많이 매장된 곳도 이 지역이다.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대부분 외국 기업들의 지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변국은 일종의 하청관계가 되어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말 그대로 아프리카 남부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의 반열에 여전히 러시아가 있다. 러시아의 새로운 무기는 석유와 천연가스이다.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가스수송관은 러시아가 이 지역을 여전히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특히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 했다. 이제 이 지역은 "뉴 그레이트 게임의 거대한 체스판"이 되었다. 유럽으로 연결된 가스관이 지나가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절대적인 영향권이다. 몇 년 전, 수송관 수수료를 더 받으려 유럽과 러시아를 저울질하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가스공급을 중단한지 3일 만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든 바 있다.

벨로루시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벨로루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디파이언스>가 생각난다. "왼쪽에는 콧수염 짧은 괴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콧수염이 긴 괴물이 있다." 나치와 러시아군 사이에서 숨어사는 벨로루시 사람이 하던 이 말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한다. 이 비슷한 말이 일제 강점기 우리에게도 있었다. "되놈은 왔다가 되가는데, 왜놈은 왔다가 왜 안 가나." 이 말의 출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강대국 틈바구니에 있는 약소국의 비애가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도 석유자원이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젠은 상황이 다르다. 유럽은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과 중동을 관통하는 수송관을 연결하려하고 있다. 미국은 이 송유관 건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이유는 당연히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이들 중앙아시아의 산유국들은 필요에 따라 유럽연합과 러시아 사이를 오가며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길목에 터키가 있다. 터키는 여러모로 자원의 길을 따라 과거 비잔틴의 지정학적 위상이 되살아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이 '대대로 유럽의 적국이었던 터키를 유럽연합에 편입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안고 유럽이 고민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현대 국제사회는 자원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고 있는 중이고, 그 수송의 길목이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가고 있다. 중앙아시아 외에도 아프리카 기니만은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자원의 통로이다. 때문에 미국은 이 지역의 내정에 직,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일까지도 불사하며 석유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몽골도 새로운 요충지로 꼽힌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가스관을 건설한다면 그것은 몽골을 지나가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에 종속되어 지내 온, 그리고 그 자신이 산유국이기도 한 몽골은 이 기회에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몽골은 이라크전에 파병(130명)을 하였다.

아랍에미레이트와 두바이는 돈이 넘쳐나는 중동지역의 자유도시이다. 석유재벌들의 세금을 줄여주고 전 세계로 투자처를 찾아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젊은이들에게 자본주의적인 환락의 세계를 제공한다. 특히 이란에게 두바이는 미국의 금수조치망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어주고 있다.

또 중동의 호르무즈 해협, 예멘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지중해로 연결되는 통로인 수에즈 운하, 아시아로 가는 해상로에 있는 인도네시아의 말라카 해협은 모두 전통적인 해상 무역로의 요충지이다. 당연히 이곳에는 테러와 해적이 많다. 그리고 이 해상로 곳곳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군, 어디까지 갔나?

미국은 2000년대 초 새로운 시대에 맞춰 미군을 재편하였는데, 9.11 테러 이후 주둔군을 배치하는 새로운 기준을 채택하였다. 이제 문제는 "우리 군대가 어디에 있으며 보유한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당도할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기지를 확보하여 중동과 카프카스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유럽 내에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 미군기지가 있으며, 동유럽 국가 대부분은 러시아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하여 나토에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나토는 유럽사회의 안정을 위해 발칸지역과 같은 내전에 개입하였고, 과거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여러 분쟁에 개입하는 등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나토의 확대는 자연스럽게 미군의 영향력 확대를 동반한다.

중동지역은 말 그대로 포위상태다. 미국은 세계 석유소비량의 1/4을 소비하고 있는 나라로,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에 국가 안정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기술에 비해 석유대체 에너지의 개발이 유난히 더딘 이유가 분명 있을 듯한 생각이 들지만 확증이 없다) 이 지역에는 그루지아와 터키를 비롯하여 이라크와 쿠웨이트 등 아라비아 반도의 거의 모든 나라와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과 접경인 키르키스탄과 타지키스탄까지 미군기지가 있다.

새로운 자원의 보고 아프리카에는 과거 식민지를 거느리던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있다. 미국은 아프리카주변에 여러 함대를 배치하고 있는 한편 나토의 주둔지에 미군을 파견하고, 석유항인 기니만에 새 기지를 건설 중이다. 이 지역에 새로이 뛰어든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주요 석유 수입국인 앙골라, 수단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며, 아프리카 전역에 공격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몽골에 진입했다. 미국은 몽골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2000여명의 미군과 첨단 군사장비, 경제원조와 자원봉사단을 파견하였다. 몽골이 130명을 파병한 대가로 그 보상 규모가 너무 커 보인다. 다른 목적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대개 몽골이나 중앙아시아가 무슨 무주공산이나 되는 것 마냥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큰 착각일 것이다. 이미 미국과 일본이 많은 부분 선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거창하게 허황된 그림만 그릴 것이 아니고 좀 더 세밀한 계획 하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중앙아시아나 몽골과 통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 통행세를 물어야 하는 장애를 안고 있기도 한 것이다.

세계는, 그리고 너네는...

아시아에는 필리핀, 일본, 한국에 미군기지가 있다. 북한을 방어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기지들이다. 세계는 자원을 중심으로 팽팽 돌아가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대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지리의 구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도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리라.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를 읽고 여러 새로운 사실을 접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운 시간이다. 이 책은 정규교육과정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국제정치의 백과사전이며, 현재 진행형의 지구촌을 알 수 있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사회과부도이다. 하지만 이를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여행기중독자가 장황하게 미군의 주둔지를 늘어놓은 이유는 한반도의 전략적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유행어로 물어보자면,

"미국에게 한반도란?"
"석유는 없는 곳"

북한체제는 굴에 갇힌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양이다. 우리는 궁지에 몰린 그들을 참을성을 가지고 살살 달래서 나오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큰 분란 없이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루고 나면, 이곳의 지정학적 의미도 달라질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권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굴속으로 연기를 피우며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고 약을 올리고 있는 격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걱정되는 일은 언젠가 미국에게 한반도가 귀찮아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때가 되면 어쩌면 미국은 이런 긴장관계를 한 번에 털어내려 마음먹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황새가 아니라 뱁새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뱁새가 황새 꽁무니에 올라타고 얼마간 날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뱁새가 스스로 나는 법을 잊어버린다면 사태는 전적으로 황새 맘먹기에 달려있게 된다. 제발 스스로 나는 법을 포기하지 말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여행자이고 싶지 디아스포라가 되고 싶지는 않다.
출처 : 여행자가 모르는 지도 이면의 세계 - 오마이뉴스

“아 처절한 이 광경!…” 6·25 참상 신문기록 책으로 / 동아일보 / 009-0(6é(

본보 등 1950∼1953년 지면 내달 영인본 출간
정진석 교수 “신문용지 피란 짐에 얹어와 인쇄”

“아 처절한 이 광경! 병든 늙은이들까지 지금 지팡이로 동결한 한강 얼음판 위를 두들기며 남으로 향하고 있고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은 아낙네들이 한 손으로 큰 아기를 잡아당기며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서울 최종열차’, 동아일보 1951년 1월 10일자)

6·25전쟁 1·4후퇴 당시 1월 3일까지 서울에 남아 현장을 지키면서 전란의 참상을 기록한 최흥조 기자의 기사다. 이 기사는 6일 뒤 부산에서 속간된 10일자 2면에 실렸다. 이처럼 6·25전쟁 당시 날아드는 총탄에도 펜을 꺾지 않았던 동아일보의 지면(1950년 10월 4일∼1953년 12월 31일자)이 영인본으로 나온다.


이는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70·사진)가 LG상남언론재단의 의뢰를 받아서 정리한 자료다. LG상남언론재단은 2억 원의 예산을 들여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1953년 말까지 발간된 동아일보를 비롯해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을 ‘6·25전쟁 기간 4대신문 영인본’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정 교수는 “동아일보는 1·4후퇴 6일 뒤인 1월 10일 부산에서 신문을 속간했는데 전쟁 초기 갑작스러운 피란으로 3개월간 신문을 내지 못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산의 민주신보사에 미리 인쇄를 부탁해서 가능했던 일”이라며 “신문 용지 수급도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동아일보 사원들이 서울 을지로 창고에 쌓아둔 용지를 피란 짐에 얹어 가져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번 영인본 작업을 위해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각 신문사가 소장한 신문 제본과 마이크로필름을 수집해 대조했으며 지령이 선명하지 않은 일부 지면의 발행일도 검증했다. 신문마다 700쪽 분량의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세 권씩 내며 국공립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 해외 한국학연구소 등에 배포한다. 정 교수는 LG상남언론재단의 의뢰로 광복 직후부터 5년간 발행된 동아일보 등 4개 일간지의 영인본을 2005년 펴내기도 했다.

“신문은 전쟁뿐 아니라 그날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뉴스를 모두 보도합니다. 역사를 복원하는 1차 사료라는 의미가 크죠. 영인본은 통시적으로 사건의 앞뒤 맥락을 살피거나 같은 날짜의 신문들을 비교할 수 있어 연구에 활용하기에도 수월합니다.”

LG상남언론재단은 6월 18일 오후 6시 반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고에 갇혀있는 '조선의 기록정신' / 동아일보 / 2009-05-29


“세계기록유산 등재 ‘의궤’ 한글번역 겨우 3.3%… 현황 파악도 제대로 안돼”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 의궤. ‘조선 기록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의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전체의 3.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궤를 하루빨리 번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실제 수치로 조사된 것은 처음이다.

○ 박소동 교수, 29일 학술대회 논문 발표

박소동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는 26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된 의궤를 파악해 분석한 결과 의궤는 전체 606종이었으며 이 중 한국어로 번역된 의궤는 20종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을 한국고전번역원이 29일 오후 1시 반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여는 ‘조선왕조의궤 번역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박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의궤는 진연(進宴·나라 경사 때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 가례(嘉禮·왕실 혼례 등의 예식), 종묘(宗廟·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영건(營建·궁궐 등의 건축) 등 70여 분야로 분류가 가능하지만 이 중 1종의 의궤라도 번역된 분야는 11분야에 그쳤다.▶표 참조

가례 분야는 22종 중 영조 때의 가례도감의궤 1종(4.5%), 영건은 22종 중 순조 때의 경희궁 재건축 과정을 기록한 서궐영건도감의궤 1종(4.5%), 종묘는 25종 중 숙종 때의 종묘의궤 1종(4%)만 번역됐다. 박 교수는 “모든 분야의 모든 의궤를 다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분야별, 시대별로 흐름과 변화를 알 수 있는 대표성 있는 의궤가 다 번역돼야 왕실 의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번역 여부와 상관없이 영인본(원본을 사진 등으로 복제한 것)으로 제작해 공개된 의궤도 55종(9.1%)에 불과해 의궤 원본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지는 것으로 박 교수는 분석했다.

○ 원본 영인본 제작도 9% 그쳐

번역본에도 오류가 적지 않게 드러났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정조가 경기 화성에 성을 쌓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일을 정리한 화성성역의궤의 경우 ‘큰 사슬 고리 두 짝을 갖춰’를 ‘대사슬원환양배구(大沙瑟圓環兩排具)’로 표기했으나 번역본은 ‘큰사슬원환양배 갖춤’으로 표현해 ‘두 짝’이라는 뜻으로 쓰인 ‘양배’를 물품명처럼 잘못 썼다.

박 교수는 “국가 기록물에 해당하는 의궤를 종합적인 계획 없이 산발적으로 번역한 탓에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가 1997년 번역한 가례도감의궤가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다시 간행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 ‘의궤총서’로 간행 체계적 연구 필요

의궤의 전체 종수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한 실정이다. 박 교수는 의궤 종수를 606종으로 파악했지만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황에는 833종이 올라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한국사)는 “같은 종의 여러 의궤를 하나로 계산하느냐 책 수대로 세느냐에 따라 종수가 달라지고 규장각과 장서각에도 엄밀히 보면 한 종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중복 소장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위원인 신승운 성균관대 교수(서지학)는 “주제와 시대별 분류 체계를 갖춰 ‘한국의궤총서’로 간행해 세계기록유산에 걸맞은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의궤:

조선시대 왕실의 제사, 혼례, 잔치, 사신 접대, 장례 등 의식의 절차와 내용, 필요 물품 목록과 제작 과정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책. 조선시대에는 사고(史庫)에 보관됐으며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도서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돼 있다.

“조선왕조 의궤는 '불교式' 기록” / 문화일보 / 2009-06-02

우리나라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500여년에 걸쳐 제작된 의궤(儀軌)라는 게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등지에 현재 637종 3000여 책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의궤는 인류의 문화를 계승하는 중요 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조선왕조 의궤’란 명칭으로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조선시대 500여년간 제작된 의궤라는 용어나 형식이 원래 불교에서 기원한 것이란 주장이 나왔다. 신승운(문헌정보학) 성균관대 교수는 지난 5월29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조선왕조 의궤 번역의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열린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 정기학술대회에서 “불교, 특히 밀교(密敎)에서 각종 진언(眞言·축문)의 염송과 공양 등의 절차와 방법을 적은 책을 의궤라 불렀다”며 이같이 밝혔다. 반면 유가 문헌에선 도서의 명칭을 의궤로 명명한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날 학술대회에서 ‘조선 의궤의 분류와 정리방안 연구’를 발표한 신 교수의 설명이다.

아울러 조선왕조 의궤 중 화려한 비단 장정과 고급 종이, 채색을 갖춘 도판 등 어람용(御覽用·임금 열람용) 의궤에서 경배 대상에 대한 불교적 장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행사가 예정되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바탕으로 사전에 절차와 방법을 기록한 의주(儀註)를 작성했으며 사후 보고서용으로 의궤를 만들었다. 의궤는 의주에 따라 진행된 행사에 대한 실제적이고 종합적인 기록이다.

의궤는 어람용 외에도 5곳의 사고(史庫)와 예조 등 담당기관 비치용으로 5~10여부가 만들어졌다. 의궤는 편찬 목적에 따라 ▲행사형 의궤(국장도감의궤 등)와 ▲해당 부서의 전례(典禮) 지침을 수록한 서지형(署志形) 의궤(사직서의궤 등) ▲기록형 의궤(실록청의궤 등) ▲의주(儀註)에 대한 사항만을 기록한 의주형 의궤 등으로 구분된다.

이번 발표에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오례(五禮) 분류 체계를 바탕으로 조선왕조 의궤에 대해 보다 상세한 분류를 시도한 신 교수는 중복된 것을 제외한 조선시대 의궤 622종 941책(12만5444장)을 집대성한 ‘한국의궤집성’(영인본 150책)의 편찬을 제안했다. 또 이 중 중요한 것(영인본 100책 정도)을 골라 번역하면 300책 정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제국주의 비판 관점서 '동해 표기' 홍보해야” / 동아일보 / 2009-06-02

■ 도르멜스 오스트리아 빈대학 한국학과 교수

“1720∼1800년경 대다수의 서양 고지도가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했습니다. ‘일본해’가 확산된 건 1800년 이후입니다. 당시 조선에 비해 개방적이었던 일본을 먼저 접촉한 서양인들의 편의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대한해(大韓海)나 조선해(朝鮮海)였던 바다를 ‘일본 내륙해’로 강요했습니다.”

4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동해 표기와 일본 식민주의의 관계’를 주제로 특강하는 라이너 도르멜스 오스트리아 빈대학 동아시아학연구소 한국학과 교수(52)는 동해 표기 문제는 단순히 서양 고지도에 나타나는 통계를 볼 게 아니라 시기별로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을 받아 3월부터 동해 표기 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서양 고지도에 나타난 동해 표기를 △1720∼1800년 ‘한국해’란 명칭이 대부분을 차지한 기간과 △1800년∼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 직전까지 ‘일본해’가 확산된 기간으로 나눴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한국해가 주류였던 기간은 제외하고, 19세기 초 이후에는 서양 고지도에서 일본 식민주의와는 무관하게 일본해라는 명칭이 압도적으로 사용됐다는 점만 강조한다”고 말했다.

이 시기 일본해란 명칭이 확산된 데에는 서구 중심주의나 편의주의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해를 탐험한 뒤 이를 일본해로 기록한 러시아 해군제독 크루젠스테른의 책(1815년)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면서 유럽인들이 일본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역사적인 맥락을 살피지 않고) 편의에 따라 사용한 셈입니다.”

일본해라는 명칭이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에 대해 그는 “당시 일본은 동해를 ‘일본 내륙해’로 만들려고 했으며 현재 한국인이 일본해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발이 아니라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며 “이런 측면이 국제사회에는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국제수로기구(IHO)가 발간하는 국제표준원칙인 ‘리미츠 오브 오션스 앤드 시즈’에는 현재 동해가 일본해로 단독 표기되어 있다. IHO는 2012년 정례회의를 열어 한국이 요구하는 ‘동해(East Sea)’를 일본해와 병기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도르멜스 교수는 “이 회의를 앞두고 명칭을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동해는 동쪽 바다라는 의미인데 ‘한국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이 ‘한국해’로만 표기하는 데 결사 반대할 테니 일본 사이에 놓인 바다’라는 의미에서 ‘한일 바다(Sea of Korea/Japan)’ 등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요.”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