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8 mai 2009

[공간+너머] 3부 新남촌,강남―성장의 속도 ⑦ 대한민국 발전소,대치동 학원가 / 쿠키뉴스 / 2009-05-11

맹모삼천의 고단한 전리품… 상생으로 대치(代置)는 꿈인가

대한민국은 교육의 공화국이다. 교육감도 선거로 뽑고 기러기 아빠와 같은 교육 디아스포라가 일상화한, 그리고 논술을 위해서라면 수독오거서(須讀五車書) 정도는 '깜'도 안 되는 교육의 교육에 의한 교육을 위한 나라. 이쯤 하면 우리나라를 왜 교육공화국이 불러야 하는지 더 이상의 논증은 불필요하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을 찾았다. 이번엔 조금 늦은 심야 시간을 택했다. 그래서였을까? 지하철 3호선 대치역은 한산했고, 공기도 제법 신선했다. 아마 대치역 인근에 자리한 한티근린공원 때문일 것이다. 작은 공원인데도 퍽 단정했다. 무성한 신록들로 나무들이 휘어질 듯하다. 가벼운 차림의 시민과 어르신 몇 분이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계절은 어김이 없어 올해도 이렇게 푸른 향연을 펼친다. 그러나 이런 여유로움은 꼭 여기까지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은마사거리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는 이른바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 주변을 분주하게 오가는 승합차와 도로변에 주차된 버스들 그리고 육중한 승용차들로 은마사거리의 풍경은 낯선 활기로 넘친다. 대치동의 러시아워가 시작된 것이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늘 이래요. 방학 때는 지방에서도 와요."

"오면 뭐해. 목동에서도 공부 좀 한다는 남학생도 여기 와서 논술 특강을 듣다가 따라가지 못해 중도에 그만뒀다던데. 온다고 다 효과 보나."

"여기 A아파트는 서울대와 연·고대가 목표고, 저기 B아파트는 하버드에 보내려는 데니까, 수준이 다르지요."

다소의 과장이 없지 않겠지만, 학원가 주변의 상인들과 나눈 이 몇 마디가 대치동의 상황과 분위기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이 뜨거운 교육열이 어디 대치동뿐이랴. 내남없이 대한민국 전역이 입시 준비로 몸살을 앓고, 교육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관심사가 아니던가. 모든 것이 성적과 졸업장으로 환원되는, 또 학교 공부가 입시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집중된 교육의 공화국. 어쩌면 우리 교육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의 교육열이 다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터이다. 이 열정과 에너지가 있었기에 국민의 교육 수준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국이 단시간에 압축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신흥경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교육은 수출과 함께 이미 한국(사회)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치동을 키운 것은 8할이 우리의 교육열과 학원이었다. 그로 인해 대치동이란 이름에는 어떤 선망과 질시가, 동경과 환멸이 착종돼 있다. 명문대학과 기득권층을 향해 뻗어 있는 익스프레스 웨이. 그러나 실제로는 공교육의 붕괴와 교육 양극화의 상징이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원 웨이 스트리트'가 바로 우리의 교육현실 또는 대치동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하도 공부가 치열한 곳이어서 그랬는지 어감이 강해서 그랬는지 대치동이란 말에서는 언제나 '대치(對峙)'란 말부터 떠올랐다. 그러나 대치동은 큰 대(大), 산 우뚝할 치(峙) 곧 큰 고개를 뜻하는 '한티'란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평범한 이름이다.

지금처럼 대치동은 자녀의 성적과 입시 일정에 맞춰 옮겨 다니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원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으레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마련이다. 이 한티마을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쪽박산'과 '은행나무'에 관한 전설이다.

강남 일대가 그렇듯 한티마을 역시 경기도 광주군에 속한 궁벽한 농촌이었다. 주변에 양재천과 탄천이 있어 큰물이 날 때마다 범람했고, 갈대가 무성하여 농사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한다. 쪽박산이란 어의 그대로 이곳 한티재는 가난한 고을이었고, 쪽박산이 없어지는 날 이곳이 부자가 된다는 풍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과연 그 전설대로 강남 개발로 쪽박산이 없어지면서 이곳은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쪽박산과 함께 대치동을 대표하는 명물로 수령이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꼽을 수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의 은행나무는 용문산 은행나무의 가지라고 한다. 대치역에서 은마사거리까지 와서 우회전한 다음 영동대로 방향으로 100m쯤 직진하다 다시 골목길로 50m쯤 들어서면 1968년 7월 3일 보호수로 지정된 한티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인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을의 전설과 대치동의 유일한 쉼표인 보호수는 그저 이곳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며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대치동을 만들고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육열과 학원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일종의 계급이다. 그리고 이는 맹모삼천을 능가하는 열성과 치열한 경쟁을 뚫었을 때 주어지는 고단한 전리품이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밀렸을 때 긴 인생의 운용에 있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벌써 알아챈 걸까? 창백한, 또는 결연해 보이는 얼굴로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하게 아롱진다. 획하고 나타났다, 획하고 사라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왠지 꿈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소음과 함께 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꽃다운 우리 아이들을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역에서 느닷없이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의 절창 '지하철역에서'(1916)가 떠올랐다.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얼굴들
젖은,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넘 기 힘든 큰 고개란 뜻에서 유래한 대치. 모쪼록 우리의 이 어린 꽃잎들 모두가 입시경쟁이라는 인생의 큰 고개를 무탈하게 잘 넘어주길 조용히 기도해본다. 아울러 이 대치(大峙)가 나만 잘되고 보자는 대치(大痴)가 아니라 참교육과 상생의 윤리가 실현되는 대치(大治)로 대치(代置)되었으면 하는 장난 같은 바람을 가져본다.

대치동 30년… ‘학원 타운’의 탄생

대치·도곡동에 아파트가 집중적으로 들어선 것은 1978년 전후다. 서울 도심에서 12㎞ 떨어진 이곳에 당시 민간에서 6000가구, 주공이 1500가구를 지었다. 청화기업이 지금의 단대부고 남쪽에 1090가구의 청실아파트를, 한보주택이 민간으로 최대 규모인 4368가구의 은마아파트를 공급했다. 청실아파트 서쪽에 지었던 주공아파트는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loan)차관'으로 건설됐으나 지금은 공원으로 변했다.

당시 이 동네 주도로는 너비 40m의 남부순환도로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곽순환도로인 셈인데 그 무렵만 하더라도 이 아파트단지에서 잠실 방향으로는 비포장도로였다. 숙명여고, 단대부고 등 강북의 학교들도 발 빠르게 이곳으로 옮겨와 명문학교로 거듭나게 된다.

조성면(인하대 강의전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