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4 mai 2009

‘100권의 책’ 한·중·일 사상의 담장 허문다 / 중앙일보 / 2009-04-22

중국 윈난성 ‘동아시아출판인회의’서 프로젝트 구체화
한국 26권 포함 ‘20세기의 책’ 함께 뽑아 번역 출판
6월 도서 목록 결정 … “예일대 100권 모두 출간 뜻”

“21세기 동아시아의 문명 선언.” “만한전석(滿漢全席)과도 같은 한·중·일의 지적 만찬.”

15일부터 나흘간 중국 윈난(雲南)성 리장(麗江)시에서 열린 ‘동아시아출판인회의’ 8차 대회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 대회는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의 복원’을 목표로 하는 한·중·일 출판인들이 ‘동아시아 100권의 책’ 출간 계획을 구체화하는 자리였다.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에서 출판인 30여 명이 모였다. ‘100권의 책’ 프로젝트는 동아시아에서 각국을 대표하고 상호 이해를 도울 20세기의 인문학술서적 100권을 뽑아 각국에서 동시에 번역 출판하자는 계획이다. 지난해 4월 ▶한국 26권 ▶일본 26권과 ▶중국·대만·홍콩 48권을 합쳐 총 100권의 책을 선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번 대회에선 구체적 일정이 합의됐다. 다음달 말까지 국가별로 도서 목록을 확정한 뒤, 6월20일 서울에서 소위원회를 열어 ‘100권의 책’ 리스트를 최종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 국가의 도서 목록을 ‘상호 체크’하기로 했다. 해당 국가에선 의미 있는 저작이겠지만, 다른 문화권에 번역됐을 때 그 지역 독자들에게도 과연 의미 있을지를 따지자는 것이다. 강맑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사무총장은 “6월에 최종 확정될 ‘동아시아 100권의 책’ 목록은 5개 지역 공동편집을 거쳐 가이드북으로 만들어 내년 중에 동시 출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00권의 책’ 가이드북에는 개별 서적 설명뿐 아니라 ▶저서의 문화·학술사적 의미 ▶저작자 인터뷰(혹은 짧은 평전) 등도 담길 예정이다. 단순한 서지사항 소개가 아니라 그 자체로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사상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일종의 ‘문명 지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넘는 ‘문명사적 이벤트’=‘100권의 책’은 동아시아를 넘어 서구 지식사회에서도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류사와 다케시(龍澤武) 전 헤이본샤(平凡社) 편집국장은 “미국 예일대 출판부에서도 큰 관심을 드러내며 향후 100권 책 전부를 영역, 출간할 뜻을 보였다”고 소개했다. 중국은 정부 차원의 대대적 지원 가능성을 내비쳤다. 왕자밍(汪家明) 중국 싼롄(三聯)서점 부총경리는 이번 대회에서 “정부 차원에서 ‘중국문화저서 번역출판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학술·문화 도서가 해외 번역될 때 재정적 지원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21세기 동북아 문명 공동체를 부활시키는 ‘100권의 책’에 한국 저서가 4분의 1 넘게 포함된다는 것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서구 세계에서도 한국학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중추였던 한반도의 지적 저력을 21세기에 재현하는 ‘문명사적 이벤트’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출판까지 ‘산 넘어 산’=‘100권의 책’을 선정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실제 이 책들을 서로 번역 출판하기까지 현실적 난관이 많다. 선정 도서들이 나라마다 ‘대표성’을 갖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그 책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읽혀질 만한 ‘보편성’을 갖췄느냐도 문제다. 각기 흩어져 있는 저작권·판권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100권의 책’ 중 몇 권이나 실제 출간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이는 출판의 양적인 문제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 질적인 문제도 있다. 각국의 문화·역사·사상을 집약한 저술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얼마나 수준 높게 번역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다.

도서 선정 확정에서 실제 출판까지 ‘산 넘어 산’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는’ 수고 없이 문명 교류가 한 단계 도약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의 발걸음에 각국의 지식사회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윈난성 리장시(중국)=배노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