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1 mai 2009

[무수리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회한] / 매일경제 / 2009-05-02

장서각, 소령원 산도.비문 자료 정리

"일찍이 임금의 은총 입어 / 순종으로써 공경히 모셨네 / 마음에 성실함 온축하시니 / 궁궐 법도에 부합했네 / 이내 상서로운 복 품으시어 / 우리 성궁(聖躬) 낳으셨네 / 대왕이 될 점괘에 부합하니 / 하늘이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조가 즉위하던 해인 1725년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숙빈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숙빈최씨는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갔다가 숙종의 성은을 입어 영조를 낳았다.

영조는 70세에 도달한 1763년에는 자신의 출생 내력을 기록한 '갑술년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를 열람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승정원일기는 적고 있다.

"아! 칠순이 되는 해 9월에 우연히 호산청일기를 얻어 보고는 감회가 일어나 (육상궁<毓祥宮>으로 가서) 다만 배알(拜謁)만 하고 돌아오니 이 마음 갑절이나 새롭다" 이 육상궁은 숙빈최씨를 봉사(奉祀)하기 위한 사당으로 지금은 청와대 경내의 칠궁(七宮) 중 하나로 남아있다.

워낙 출신이 미천한 까닭에 자세한 가문 내력이나 초반기 생애가 알려지지 않은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년) 11월6일에 태어나 7세에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1692년 우연히 한밤중 왕궁 '순찰'에 나선 숙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고, 아들을 낳아 일약 내명부 최고 품계인 숙빈까지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품계가 높아졌다 해도, 그리고 그 아들이 임금이 되었다고 해도, 숙빈최씨의 신주는 종묘에 갈 수 없었다.

1718년(숙종 44년) 3월, 49세로 생을 마감한 숙빈은 그 해 5월12일, 양주 고령동 웅장리 묘향(卯向) 언덕에 안장됐다.

국왕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고한 신분제 아래서 임금인 아들은 죽은 어머니를 대대적으로 추숭하는 일들을 벌이게 된다.

재위 29년(1753)에는 화경(和敬)이라는 존호를 올린 데 이어 묘(墓)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조선시대 능묘제도에서 원(園)은 왕이나 왕비 무덤에나 붙일 수 있는 능(陵) 다음 칭호였다.

재위 34년(1758), 어머니 묘소를 참배한 영조는 어머니가 죽던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어 "붓을 쥐고 회포를 써 내려가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통곡했다.

이처럼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절절한 회포의 정을 담은 흔적 중에서도 산도(山圖)와 비문만을 정리한 자료집이자 해제집이 최근 이들 자료 소장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도록 형태로 나왔다.

이에는 숙빈최씨의 장지를 물색하고 지관(地官)이 그림 형식으로 올린 산도와 그 지역 풍수론을 정리한 산론(山論), 소릉원 전체와 그 석물(石物) 배치도, 그리고 소릉원 주변 화재 방지선인 화소(火巢) 그림 등이 포함됐다.

나아가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각종 비문 7종의 탁본도 있다.

이번 자료 해제에 관여한 윤진영 장서각 연구원은 이 중에서도 "숙빈최씨의 산도와 산론은 이런 종류의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현존 유일하다"고 말했다.

윤 연구원은 또 "영조는 자기 어머니 관련한 기록은 한장도 버리지 않고 육상궁에 모아뒀다"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 콤플렉스도 느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조의 효심은 극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한중연은 6일 장서각에서 숙빈최씨자료집 출판과 관련, '영조와 숙빈최씨'를 주제로 '제17회 장서각 콜로키엄'을 연다.

정만조 국민대 교수가 '영조와 숙빈 최씨' 을 주제로, 이현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영.정조대 육상국의 조성과 운영'을 주제로 각각 발제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