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udi 29 janvier 2009

“한국 민족주의, 흑백논리 숨어있다” - 중앙일보 / 2009-01-21

민족에게 민족주의는 가장 강렬한 ‘자아 인식’인 동시에 처절한 ‘피아(彼我) 인식’이다. 19세기 외세의 위협, 20세기 식민주의와 동족상잔을 겪으며 ‘민족’의 이름으로 적과 동지를 가르는 피의 전선(戰線)이 그어졌다. 신기욱(사진)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식민지 극복과 근대 국가 형성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한 견해와 토론을 제약하고 흑백논리적 역사의식을 가져온 점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파시즘적 민족주의 국가로서 북한은 과거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 국가와 가장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신 교수는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도 맡고 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 주류 학계에 자리 잡은 학자다. 한국 민족주의의 안과 밖을 균형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다. 그의 영문 저서가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창비)란 제목으로 번역돼 나온다. 잠시 한국을 찾은 신 교수를 21일 만났다.

-한국의 강렬한 민족주의가 보수·진보 논쟁의 사상적 결핍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 한국 사회가 근대로 이행할 때 다양한 사상들이 들어왔다. 서구 자유주의 사상도 있었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같은 범아시아주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위협과 식민지를 거치며 뿌리 내리지 못했다. 대신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 사회·역사적 산물이다. 자유주의의 뿌리를 갖고 있는 서구의 진보·보수와 달리 한국의 보수·진보는 민족주의에 과도하게 기대어 그 힘을 발휘했다.”

-어쨌든 ‘민족주의’가 승리한 사상으로서 살아 남은 것 아닌가.

“100 여 년 전 문명 개화론·동양주의·민족주의의 경쟁 구도는 지금의 세계화론, 동북아 공동체론, 민족주의와 유사하다. 역사적 상황이 바뀌면 국가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선 과도한 민족주의가 보수·진보의 사상적 빈곤을 초래했다. 보수는 ‘민족 번영’을 위해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자유주의의 기반이 약해 독재를 지지했다. 진보는 정권과 민족주의 선명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친북·반미주의로 기울기도 했다. 보수·진보 모두 시민적·보편적 자유주의가 결여돼 있다.”

-민족주의는 남북 양 체제에서 역사 연구를 왜곡했다고 했는데.

“ 민족주의 담론은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당위성에서 출발했다. 그 긍정적 역할의 이면에는 다양한 견해를 억압하는 흑백논리가 숨어 있다. 식민주의를 착취와 저항의 이분법적 구도로만 봐선 당시 식민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읽어낼 수 없다. 북한의 경우 민족주의가 주체사상으로 연결돼 교조적 역사 인식에 빠졌다. 북한 체제는 일본 군국주의처럼 ‘천황’의 자리에 ‘김일성’이 놓인 파시즘적 ‘가족국가’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이후로는 아마 김씨 집안을 상징적인 지도자로 남겨두고 군부가 실권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전전(戰前)의 일본과 더 비슷해진다.”

-다문화 사회에서 필요한 ‘민족주의’는 어떤 건가.

“ 혈통 중심의 민족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한국 사회 특유의 역동성을 유지할 국가 전략이 필요하다. 외국인 이주민과 혈통을 떠나 민주국가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적 민족 정체성’이 필요하다.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 논리이기도 하다.”

-APARC 소장으로서 오바마 시대의 한·미 관계는 어떻게 전망하나.

“북한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잊혀지는 것’이다. 경제위기, 중동 사태 등으로 북한 문제는 오바마 정부의 우선 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단기적으로는 북한이 도발을 선택할 우려가 있다. 한·미 양국은 앞으로 4년간 대통령의 임기가 일치한다. FTA 비준 등 첨예한 문제가 있지만 양국 관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배노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