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udi 29 janvier 2009

우리나라 첫 백과사전의 산실, 초간정 - 중앙일보 / 2009-01-12

경북 예천군 용문면 개울가에 자리한 초간정이란 작은 정자가 지난해 12월 26일 국가 명승지(51호)로 지정됐다. 초간정은 국내 여행에 어지간한 조예가 있는 마니아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자료를 뒤져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해’를 집필한 권문해가 세운 정자’ 정도의 설명이 전부다.

이 책은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역사·인문·지리 등을 총망라, 총 20권 20책으로 구성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제878호)로 지정됐다. 조선 선조 때 만들었으니 400년을 넘겼다. 이 역작의 주인공인 권문해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이 정자를 왜 지었을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초간정을 이해하려면 이를 세웠던 권문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선조 때 별시문과 병과에 합격, 관찰사·좌부승지 등을 지낸 학자다.

권 씨의 본은 안동과 예천 두 개 뿐이다. 권문해는 조선시대 세도를 과시했던 안동 권씨가 아니다. 안동 권씨에 비해 세가 훨씬 적었던 예천 권씨다. 이 때문에 퇴계 이황에 사사했고, 8년 후배 서애 유성룡 등과 교분이 깊었을 만큼 인품과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나 소위 ‘연줄’이 없어 입신출세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성룡이 판서를 지내며 ‘잘 나갈 때’ 자신은 좌부승지에 그쳤으니 오죽했을까.

이를 절감한 그는 고향 예천으로 낙향을 결심한다. 이 때 찾은 곳이 종가가 있는 용문면 죽림리. 이곳에서 그는 1334년 중국의 음시부가 지은 백과사전 ‘운부군옥’을 읽고 또 읽었다.

여 기서 힌트를 얻은 그는 한국의 백과사전 편찬을 결심한다. 그리고 역사·인문·지리 외에 국명·성씨·인명·효자·열녀·수령·신선·나무·금수 등으로 나눠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을 완성했다. 낙향 10년 만이다. 필생의 역작을 탈고한 권문해는 기력이 다한 탓인지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향년 58세였다.
 
초 간은 권문해의 호다. 풀(草)과 산골의 물(澗)이란 뜻이다. 초간정은 권문해가 낙향 3년 후 지은 정자다. 예천 권씨 종택에서 10리도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곳이다.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정자처럼 높은 곳에 ‘군림’하고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곳도 아니다. 오직 정자 바로 아래 개울만 시야에 들어올 뿐이다.

지금은 바로 옆에 도로가 뚫려 소음이 심하지만 당시에는 물소리·새소리 외엔 달리 들을 만한 소음은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작품을 집필하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주 차장에서 내려다보면 위치가 절묘하다. 금곡천이라 불리는 작은 개울이 큰 바위를 만나 ‘ㄱ’자로 휘돌아가는 모퉁이 작은 절벽 위에 아담하게 서 있는 것이다. 절벽 위에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는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숲과 어울려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초간정의 원래 이름은 초간정사. 초간이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는 집이란 의미다. 깊은 뜻을 가진 건물은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한다.

임 진왜란 때 경복궁에서 발견된 대동운부군옥을 불사른 왜군은 초간정마저 불태웠던 것이다. 광해군 때 다시 세웠으나 인조 14년(1636년) 또다시 화마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의 건물은 초간의 8대손이 1870년 중창한 것이다.

매 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주말. 정자에 앉아 안빈낙도는 아니더라도 초간의 세계를 좇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절벽을 기어오를 수 없으니 사주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데 굳게 잠겨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멋진 자태 만으로도 초간에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듯했다.

예천=글·사진 박상언 기자 [se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