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7 avril 2009

남자, ‘레이스 장막'에 갇힌 것인가 / 대구일보 / 2009-04-20

남자, ‘레이스 장막’에 갇힌 것인가
문장순(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기 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양성평등을 이야기 하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녀들의 논리의 핵심은 남성들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제 여성들에게 의식을 변화시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분위기와 함께 형성된 우리 사회의 패미니즘 논리나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에 남성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순종했다. 부문적으로 항변한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또 변화하고자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변화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남성들의 의식과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여자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남성이 오히려 차별적 대우를 받는 부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 한국남성협의회 등의 남성단체와 남성연구기관 등과 관련된 이들은 여성들이 주장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여성들은 그동안 남녀간 불평등 부문을 평등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호주제 폐지, 여성할당제, 가정폭력방지법, 남녀평등고용법, 성희롱법, 가족법 개정 등은 그런 것들이다. 최근에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여성들만의 전용주차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동주택 건설방안 등 생활 곳곳에 여성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남성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지 상대방인 남성에 대한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여성에겐 배려를 요구하면서 남성의 잘못엔 매몰차게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이러한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그동안 강조해왔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여성들이 왜 한국 남녀의 수명차이가 왜 세계에서 가장 큰지, 한국 남성의 40-50대에 사망률과 자살률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은지, 한국 남성의 근로시간이 OECD 가운데 가장 많은지, 한국의 남성은 현재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 성역할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성의 기준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은 젠틀맨이고 여성이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못난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저 남자들 본받으라고 지적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 역차별 논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제제기를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도리스 레싱이 2000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레싱은 유럽 패미니즘의 대모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존경받고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놀랍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무분별, 무의식적인 매도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남성은 너무 겁에 질려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이 왜 여성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뿐 아니다. 미국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크리스티나 소머즈도 여성단체의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패미니즘의 파산⌟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은 자신들이 유리한 점은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고 남성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패미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패미니즘은 남녀 간 신체, 관심, 선호도 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교조적인 동등권 주장하고. 여성의 주장을 남성보다 우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적 관점만이 팽배해지면서 남성이 여성에 의해 역차별 당하는 현상을 워렌 패럴은 ‘레이스의 장막’ 이라는 지칭한다. 레이스의 장막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와 연계된다. 여성의 논리나 입장만 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문제는 인간다움의 추구라는 근본명제가 깔려 있다. 그동안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입장만 반영된 사회를 그렇게 비판하든 여성들이 그녀들의 시각에서 그녀들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 여성이 폭력당하고 있는 비율이 높다고 해서 점차 매 맞는 남편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폭력만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해서 안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자신들만 유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존하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지, 상호 전투나 대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드레스의 장막에 갇히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