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0 avril 2009

"광복군 등 해방직전 투쟁 중심… 위상 재평가 필요" / 조선일보 / 2009-04-12

'충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학술회의

"충칭(重慶)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동안 상하이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40년부터 해방까지 5년간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좌우합작 통일정부를 이끌어내는 등 독립운동 중심기구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였다."

대 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11일 중국 충칭 진위안(金源)호텔에서 열린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국제학술회의는 1940년 9월부터 1945년 11월 환국(還國) 때까지 임정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충칭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자리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조선일보가 공동 주최한 이 학술대회에서 기조발제에 나선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충칭 시기 임시정부를 언급하면서도 '상하이 임시정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어색하다"며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17사단 구한 광복군

박 민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940년 충칭에서 출범한 광복군이 연합국 일원으로 대일(對日) 항전에 참가한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사례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으로 임정 산하 광복군 9명이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돼 해방 직후까지 활약했다는 것이다. 대장 한지성(韓志成)을 비롯한 이들 공작원은 선무 방송, 포로 심문, 문서 번역 등에 종사했다. 특히 영국군 17사단이 1944년 미얀마에서 일본군 에 포위돼 위기에 빠졌을 때, 일본군 노획문서를 해독해 사단장에게 제공함으로써 사단 병력이 전원 무사히 철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박 연구원은 "인면전구공작대는 임시정부가 연합국 일원으로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편성한 광복군의 소임을 최일선에서 구현한 부대였다"고 평가했다.

◆김구, 7년간 6차례 장제스와 회견

푸더민(傅德岷) 충칭공상대 교수는 "충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인민과 더불어 항일전쟁과 독립투쟁에서 절정을 이룬 시기"라며 한·중 우호의 역사를 짚어냈다. 김구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국민당 최고지도자 장제스(蔣介石)와 여섯 차례 만나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도 1942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당신들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실현하길 바란다"고 연설했다. 푸 교수는 "충칭 임시정부가 환국할 때까지, 중국 공산당 기관지 《신화일보(新華日報)》는 뉴스·단평·논설 등 100여건이 넘는 한국 독립운동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고 소개했다.

◆"임정이 승인 못 받은 것은 연합국 입장 차이 때문"

고정휴 포항공대 교수는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한 충칭 임시정부의 외교가 좌절한 첫 번째 요인은 임정이 지닌 한계 때문이 아니라 전후(戰後) 한국문제 처리를 둘러싼 연합국 열강들의 서로 다른 입장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전후 임정을 매개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기에 임정 승인에 가장 호의적이었지만, 이는 다른 연합국 열강에 중국의 저의를 의심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임정 승인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전후 한국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길 원했기에 친중(親中)·친미(親美)적인 충칭 임정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이런 소련과의 협력을 우선시했기에 임정 승인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는 또 김희곤 안동대 교수가 〈충칭 시기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를,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이 〈충칭 시기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을 발표했고, 쑨커즈(孫科志) 상하이 푸단대 교수, 진젠런(金健人) 저장(浙江)대 교수 등 중국 연구자들이 토론에 참가했다. 회의장에는 임향란 쓰촨(四川)외국어대 한국학과 교수와 학생 등 70여 명이 자리를 지켰다.

충칭〓글·사진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