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6 février 2009

6·25 전쟁 직후 우리사회 편린(片鱗)들 - 데일리안

이목우 기자가 경북도 도정월보에 기고한 견문십편(見聞十片)

부제 : ´고뇌하는 관리와 참담한 농민´

´촌철살인´ 같은 핵심 속에 사회 부조리 등 꼬집어
관료사회 비평 글 싣게 한 도백 마음도 넉넉했을 듯

◇ 도정월보를 창간한 신현돈 3대 지사. 55년 2월까지 재임했다. ⓒ 경북도 제공
단기 4285년 서기 1953년 8월 13일 포화의 화염으로 얼룩졌던 한국동란이 다행스럽게도 막을 내린 즈음, 한 기자가 당시 사회의 일부 모습을 경상북도가 발행한 ´도정월보´에 기고했다.

도정월보는 6˙25 동란 당시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던 대구에서 경북도가 1951년 신현돈 3대 경북도지사의 취임 시기에 첫 발행을 시작한 월간 도정지다.

현재 도정지 발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 정성융씨는 "전쟁통에 많은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대구에 내려와 지내게 됐으며, 이런 가운데 박목월, 조지훈, 정비석 등 문학사에 이름을 날린 상당수 사람들이 도정지에 글들을 기고하는 등 발행에 참여했다고 전해 들었다"며 "이와 함께 언론인들의 참여도 일부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목우 씨는 당시 영남일보사 사회부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도정월보에 이글을 기고하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려웠던 당시의 모습과 함께 부조리한 사회상을 꼬집어보려고 한 것 같다.

특히 견문시편은 촌철살인 같이 깔끔하게 집은 핵심 속에 관(官)을 꼬집는 내용도 상당수 담고 있다. 따라서 이를 도청이 발행하는 잡지에 실은 수 있었던 것만으로, 당시 도정을 맡았던 도백(道伯)의 마음 또한 넉넉하지 않았나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목우 부장은 이글의 부제를 ´고뇌하는 관리와 참담한 농민´으로 달았다. 그가 직접 보고 거나 들고 체험한 후 기고한 견문십편(見聞十片)의 글들을 간추려 소개해 본다.

◇ ´레이숀´ 이문(異聞=이상한 소문)

휴전이 이루어 진후 아마도 레이숀을 선물 삼아 배포한 것 같다. 레이숀은 군대의 휴대 식량이나 하나의 작은 자루 등에 넣은 얼마간의 식료품 등이다.

중앙에서는 각 시도, 읍면동까지 이를 철저하게 배포하라고 했건만 농촌에서는 이를 믿지 않은 것 같다. 이에 따라 농부들이 ´우리에게 까지 정말 줄려는가´라고 반문하며, 심지어 ´어림없지 준다고 해도 중도에서 모조리 까먹고, 우리에게 보내주는 미친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에 필자는 물자의 배포에 있어서 사람들이 관청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원인을 횡류(물품을 정당한 경로를 밟지 아니하고 전매(轉賣)함) 등을 일삼은 관의 악습 때문이라며, 관의 신용상실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묻고 있다.

◇ 의용 경찰관

전쟁이 막 끝난 당시는 곳곳에서 공비들이 출몰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청년들이 밤새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을 맡은 것은 의용소방대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위세가 대단했나 보다. 젊은층으로 구성됐지만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금품까지 주며 겁을 내야하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관(官)인지 민(民)인지 그 성격의 명시와 함께 행동의 한계에 대한 규범이 똑똑해 져야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검문소 풍경

당시 검문소는 여객 버스나 화물차 운전수들에게 둘도 없는 어마어마한 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겪는 불편함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승객들의 불편도 극심했었다.

더운 날 오랜 시간 검문을 받다 보면, 초만원인 버스 내에 있는 승객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담은 비오듯이 쏟아 지고, 아이들은 울고 장터를 방불케 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검문소가 그리 딱딱한 것 말고, 어르신이나 연약한 부녀자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예의 없는’ 젊은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계도하는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고 적고 있다.

◇ 관리자가폭로(官吏自家暴露)

예나 지금이나 일을 하다 보면 불평할 때는 항상 있는 법이다. 필자는 당시 한 민간인이 관리와 술을 먹던 도중 한 관리가 자신의 대우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듣고 적은 글이다.

당시 공무원들의 대우가 그리 좋지 못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에 그 관리는 ‘공무원들의 생활은 모두가 기적일세. 답답하고 비굴하고…3년만 근무하면 아편환자처럼 발을 빼지 못한다’고 취중진담을 쏟아 냈던 모양이다.

필자는 이를 듣고 이를 위중에 한 말이니 잊어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공직자로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충고하고 있다. 또 해방이후 8년간 1만여명의 공무원들이 영세한 보수로 가족을 이끌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에 대해 ‘기적인가 기적이 아닌가’ 되묻고 있다.

◇ 회계감사 여담(餘談)

회계담당직원을 만난 필자는 산적한 일에 고생을 하고 있는 그로부터 상사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한 고충을 잘 몰라준다는 하소연을 듣게 된 것 같다. 하기야 일을 하다보면 그 일에서 오는 고충을 누구에게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에 필자는 접대비 같은 것을 지출하도록 상사가 부하직원을 부려 먹는 다면 안 될 것이며, 그이에 회계담당직원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면 상사를 꼬집는 것도 그만두어야 함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 분뇨차 수난

모 읍에서 분뇨차를 모는 늙은 농부의 고생담이다. 한 작은 경찰서 정문에서 분뇨차를 모는늙은 농부가 파출소 양반에게 꾸지람을 듣고, 오랜 시간 도로 청소를 하게 된 모양이다.

이유인 즉 작업시간이 끝난 후 분뇨를 퍼갔다는 것과 파출소 앞 길 위에 분뇨가 일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농부는 겁이 나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순경은 시킬 수 있는 대로 일을 시켰나 보다.

필자는 이를 보고 그 순경이 위생관념에 달(達)한 도시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 시골의 중학

당시 시골에는 학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한 시골에 뜻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세우고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이 그 학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 강의를 맡은 교사가 대구의 모 대학 1년생이고, 교무주임은 전직 초등학교 준교사라 출신으로 수준이 너무 낮아 배울 것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선생님을 하나님 같이 여기는 과거에 비교할 때 통탄할 일이라면서, 그 원죄는 문교정책에 역량부족에 있다고 지적했다.

◇ 신문기자 2(二)파

경북도내 한 지역을 방문한 필자는 자신을 맞는 기자들과 탁주를 나누면서 이곳 기자들은 두 부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 부류는 광고료를 받고 점심을 얻어먹는 것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이비기자요, 다른 한 파는 여하한 연회에는 가지 않는 위신 있는 기자라는 것이다. 이 두 파는 물과 기름사이로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필자가 만났던 기자들도 위신 있는 기자들이었나 보다.

그날도 사이비기자 무리들은 관청의 자동차를 억지로 빌려 타고 해수욕을 떠났다는 것. 이에 필자는 민폐나 관폐가 없기를 요망하는 기자도의 숙원도 이미 오래전부터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 점심대접 난색(難色)

필자가 어느 군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반갑게 맞이하는 군수에게 점심 대접을 받았는데, 군수의 표정이 어두웠다. 알고 보니 지역 유지, 언론인 등 너무나 찾는 이가 많다 보니 나가는 식사 값과 술값이 만만치 않았었나 보았다.

이에 필자는 접대비 때문에 고생하는 빈약한 군 행정에 서글픔을 느끼면서, 점식 대접 받은 걸 후회했다.

그러면서 필자는 여하한 사람이 와도 대접하지 않는 군수와 여하한 곳에 가도 대접을 철저하게 받는 두 종류의 사람 중 누구 이익을 볼 것인가 또한 손해를 볼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이글은 필자의 글을 지면관계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내용의 바꾸지 않으면서 간략하게 서술했음을 밝힙니다.

◇경상북도인터넷신문 ´프라이드 i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news.gyeongbuk.go.kr

이목우(李沐雨)=1952년 1월부터 55년 6월까지 영남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 당시 그가 연재한 단평 시대풍(時代風)은 사회상을 잘 반영해 인기를 끌었다. 54년 8월 육군 76연대 민대대 고유명칭 게재 등 필화사건으로 당시 편집국장이던 이흥로씨가 해임되고, 3개월 감봉처분을 받기도 했다.

[데일리안 대구·경북 류진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