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6 février 2009

[박정동교수의 ‘세계 경제의 핵 화교’ ⑭] 외국인 배제정책…‘영원한 이방인’ 취급 - 중앙일보 / 2009-02-04

한국, 그리고 한국 화교의 역사 (1)

우리나라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유입이 잦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정적이었다. 동남아시아 많은 국가들과 달리 중세 이후 우리나라는 줄곧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다.

중 국과 교류는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국가가 교류를 통제하고 제한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화상(華商)의 성장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 화교가 성장한 것은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을 때였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한국 화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조선후기. 쇄국정책은 조금씩 무너지고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로 갈라졌다. 청(淸)나라와 일본은 서로 우리나라를 놓고 외교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당시 일본이 청나라보다 먼저 강화도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에 대해 청나라보다 우선권을 얻었다.

물론 청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는 틈을 찾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명성황후가 청에 도움을 요청하자 청은 군란을 진압하고 조선에 머무르던 일본군을 몰아냈다. 또 청나라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비롯한 일련의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통상조약들은 한반도 내에서 화상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잃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다. 나라를 잃은 우리는 언어, 문화 등 정신 문명도 빼앗겼다. 그리고 토지조사제도로 인해 땅 마저 빼앗겼다. 하지만 화교들은 사정이 달랐다.

일본 기업이 국내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 사람 보다 화교를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뿐만 아니라 화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급료를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교에 질투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한•중 관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화에 만족하지 않고 대만, 그리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에 따른 군사•경제적 자원은 우리나라에서 조달했다.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징병했는데 그 수가 80만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화교들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초기 한국 화교들의 유입이 증가한 것은 청나라 내부의 혼란으로 인한 이민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교들이 급속하게 성장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잠시 줄었을 때는 중•일 전쟁으로 화교들이 적국 국민으로 간주되었을 시기뿐이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화교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춘절(春節, 중국의 설날)에는 고향을 방문해 가족, 친지들과 함께 지냈다.

또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잦은 교류를 통해 무역사업 등 경제적 기반도 중국을 원천으로 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의 혼란한 상황으로부터 피난을 온 처지였기 때문에 중국이 안정되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자, 한국 화교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화교의 수가 정체되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한국과 중국 양쪽에 모두 있었다.

1948년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외국인 출입을 규제했다. 국내에 외국인 입국이 금지됐다. 화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9년에는 중국에 마오쩌둥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주 억제책으로 출국자체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일 년에 한 번씩 갈 수 있었던 고향 방문은 물론이고, 화교 무역의 기반이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끊겨 경제적인 힘도 잃었다.

단절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자 남한의 화교들은 더욱 큰 단절을 겪어야 했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북한에 많이 거주했다. 당시 남한에 거주하던 화교는 한반도 전체 화교의 20%도 채 안됐다.

화교들의 생명력은 국경을 초월하는 관시(關係)에 있는데, 그것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한국 화교들의 모습은 마치 무인도에 던져진 로빈슨 크루소와 같았다.

이렇게 고립된 화교들의 인구증가는 전적으로 자연증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화교들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철저하게 외국인을 배제하는 정책을 폈다. 한국 정부는 외국인이 귀화하는 기준에 ‘품행’이나 ‘생계를 유지할 자신’등과 같은 애매한 항목을 두었고 법무부 장관의 허가까지 얻게 했다.

뿐만 아니라 화교 2세도 외국인 취급을 받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다. 한번 외국인은 영원히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도 끊긴 마당에 한국 국적도 얻을 수 없고, 게다가 그 어려움이 후손에게 이어졌다.

차라리 그저 귀화만 못하는 것이었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 배제정책은 경제적인 면에서 더욱 가혹했다.

사실 당시 한국 무역의 약 70%는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화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 한국정부는 한국인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모든 경제정책을 한국인을 우선으로 했다. 그 중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통화개혁이었다.

재산을 주로 현금으로 축적해 두던 화교들은 급작스러운 통화개혁으로 많은 손해를 입어야 했다.

글=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