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6 février 2009

다시 써야 할 정조 시대 역사 / 중앙일보 / 2009-02-10

200년 만에 열린 블랙박스 … 적대파로 알려진 노론 심환지와 밀서 교환

군왕의 ‘비밀 편지’는 아침 녘에만 세 차례나 전해졌다. 하루에 네 번 보낸 일도 있었다. 서찰은 은밀하게 오갔다. 관복을 입지 않은 승정원 심부름꾼은 자유롭게 궁을 출입했다. 수신자의 관직이 높아지자 남의 눈을 의식해 양반집 노복(奴僕)이 밀서(密書)를 품고 궁을 오갔다. 이렇게 전달된 임금의 편지는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4년간 299통. 임금은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열사흘 뒤 숨을 거뒀다.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면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고위 관료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서간 299건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새롭게 발굴한 ‘정조 어찰첩(御札帖)’의 실물 일부를 공개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역사가 비켜간 ‘블랙박스’=이번에 공개된 정조 어찰은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보낸 것이라 이례적이다. 또 날짜별로 일괄 정리돼 공식 사료와 대조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다량의 서신을 정기적으로 받은 인물이 심환지라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조에게 가장 적대적인 당파로 알려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였다. 이는 왕조의 공식 사료인 『정조실록』 『승정원 일기』와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서신에서 정조는 편지를 태우거나 찢어버리라고 계속 말하지만 심환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서간을 통째로 보관해 뒀다. 심환지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간직한 이 방대한 자료는 200년 뒤 정조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역사의 ‘블랙박스’가 됐다.


◆ 정조의 집요한 ‘서신 정치’=정조는 ‘서신 정치’를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혁파 영수였던 남인의 채제공(1720~1799)에게도 개인 서신을 다수 보냈다. 이런 비밀 편지를 통해 공식 사료에선 알 수 없었던 정치 이면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먼 저 노론 벽파와 심환지에 대한 재평가다. 지금까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최대 적대 세력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정조가 수년에 걸쳐 은밀하게 심환지를 통해 ‘대리인 정치’를 했을 가능성이 이번 서신에서 제기된다. 벽파는 정조가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국정 파트너’였고, 심환지는 정조의 ‘복심’을 펼치는 최측근 신료였을 거란 해석이다. 예컨대 1798년 7월 14일, 정조는 심환지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8월 28일에는 우의정에 임명했다. 우의정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심환지는 궁을 떠나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며 예조판서를 그만두는 사직소를 세 차례나 올린다. 공식 사료에는 이런 인사 발령 사항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서 드러난 사실은 사직소를 올리는 횟수와 시기까지 정조가 지시했다는 것이다. 금강산 유람도 정조의 권유였다. 심환지를 우의정으로 삼아 국정운영을 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종의 정치적 속임수를 쓴 것이다. 공식 사료에는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돼 있는 상소문이 정조가 사전에 편지로 알려 준 문구 그대로 돼 있는 경우도 있다. 국왕이 의지를 직접 펴기 곤란할 때 측근의 신하를 통해 뜻을 펼친 것이다. 이날 토론에 참여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서신만을 놓고 정조를 ‘벽파의 후견인’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곤란하다”며 “정조는 다른 당파에도 비슷한 ‘서신 정치’를 했을 것이며 이것들이 발굴돼야 종합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조 독살설의 진실은?=정조는 1800년 6월 초 등창 때문에 앓기 시작해 20여 일 만에 급서했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현대 사극이나 작가들의 단순한 추리만은 아니다. 정조 사후에 남인 측이 제기하던 의혹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 강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는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 나온 내용을 더듬어볼 때 ‘독살설’은 단순한 ‘음모론’일 가능성이 커졌다. 정조는 수년에 걸쳐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렸다.

“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중략)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1800년 6월 15일)고 호소한다. 국왕의 병세는 국가의 일급기밀에 해당한다. 심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찰을 분석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서찰이 ‘독살설이 잘못됐다’고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환지가 음모에 관여됐다는 의혹은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시대 재해석 필요=이번 서신 공개로 인해 그간 공식적 사료에 의한 정조 시대 해석에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의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된다. 단국대 김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정조의 이면’이나 당시 정치의 ‘뒷모습’을 읽고 충격받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이 발굴을 ‘엄청난 선물이자 동시에 커다란 과제’라는 말로 표현한다. 300편에 이르는 정조 자신의 목소리를 공식 사료와 하나씩 대조해 가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 어찰 299편을 영인·탈초·번역하고 그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을 다음 달 중 발간할 계획이다. 이번 작업에는 한국고전번역원도 함께했다.

정조 어찰첩은 원래 심환지 가문에서 보관돼 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의 소장자는 심씨 가문과 무관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 공개를 꺼리는 이 소장자는 조만간 정조 어찰첩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기탁할 것이라고 전했다.

배노필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