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3 février 2009

3·1운동, 민족주의 너머 ‘다층적 의미’ 조명한다 / 한겨레 / 2009-02-11

90돌 맞아 다양한 학술행사
‘식민지적 주체’ 탄생 과정과
보편주의·기억과 기념 문제 등
새로운 접근 방식의 연구 선봬

‘민족해방의 단일서사를 넘어라.’

3·1운동에 관한 학계의 담론이 다양해지고 있다. 3·1운동을 ‘억압적 식민통치에 저항한 전 민족적 반일운동’으로 규정하는 관성화된 시각에서 벗어나, 문명·사상사적 의미나 역사적 기억의 전유 방식에 주목하는 새로운 연구가 활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3·1운동 90돌을 맞아 이번주부터 시작되는 여러 학술행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동아시아 근대의 새로운 전개’라는 주제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13~14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는 근대적 주체의 출현과 동시대 서구사상과의 만남 같은 3·1운동의 보편사적 차원으로 시선을 돌린다. 3·1운동이 일차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건의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실체를 파악하려면 ‘민족’이 아닌 다양한 ‘주체들’과 ‘의식’의 복합적 층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유선영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은 ‘3·1만세운동 이후의 근대 주체-리미널 페르소나의 형성’이라는 발표문에서 3·1운동이 가져온 ‘식민지적 주체’의 탄생 과정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3·1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갑오개혁과는 다른 차원의 근대화를 열어젖힌 사건이다. 갑오개혁이 “국가 주도 근대화의 시작”이었다면, 3·1운동은 “개인이 근대화의 필요를 절감하고 스스로 의식·가치·행동·문화의 혁신에 나서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획득된 자아와 개인 역량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은, 독립을 향한 집단적 열망의 좌절이 가져온 결과물이란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개인 차원의 근대화를 욕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자주독립을 미완의 희망으로 남겨두고 식민 지배를 현실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의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는 게 유 위원의 분석이다.

권보드래 동국대 교수는 ‘진화론의 갱생, 인류의 탄생’이란 논문을 통해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경험한 ‘인식론적 전환’을 조명한다. 권 교수가 보기에 19세기 말~20세기 초 지식인의 민족주의를 추동했던 사회진화론적 인식은 국권 상실을 계기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지식인들은 독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새로운 논리를 필요로 했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동시대 서구에서 등장한 진화론 비판과 인류의 공존공영에 대한 보편주의적 호소였다는 게 권 교수의 분석이다. 요컨대 조선 독립을 세계 평화와 인류공영과 연결짓는 3·1독립선언서의 사상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탄을 맞은 사회진화론에 대한 성찰과 ‘세계’와 ‘인류애’의 발견과 같은 새로운 세계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오는 26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공동학술대회 역시 3·1운동에 대한 ‘기억과 기념’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3·1운동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이 자리에선 3·1운동을 통해 역사적 주체로 등장한 민중들은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좌익과 우익은 그것을 어떻게 기념하고 재구성해 왔는지, 3·1운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유관순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지금 같은 독보적 위상을 차지하게 됐고, 일본인과 중국인들은 3·1운동을 또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등을 탐문한 다섯 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한국역사연구회 부회장인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발발 원인이 된 억압적 식민통치에 대한 연구부터,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주도 계층의 성격과 운동의 진행과정, 발생 지역에 대한 사례 연구에 이르기까지, 3·1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풍부한 실증 연구가 진행됐다”며 “주체들의 기억과 타자의 시선으로 관심을 확장함으로써 실증 연구가 갖는 객관주의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