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8 février 2008

[조선 서민 이야기의 결정판 '이향견문록'] - 매일경제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10년만에 개정판

정조 재위 17년인 계축년(1793년) 여름, 임금이 머리에 부스럼을 앓아 내의원에서 침과 약을 썼지만 효험을 못보고 얼굴과 턱 부위에까지 부스럼이 번졌다.
한여름이라 임금의 고통이 심했지만 모든 내의들이 손을 쓰지 못하자 누군가가 피재길의 이름을 아뢰었다. 천한 신분인 피재길은 임금 앞에서 전전긍긍 땀만 흘렸고 좌우의 의원들이 비웃었다.

하지만 임금이 "두려워 말라. 너의 기능을 다해보아라"라며 용기를 주자 피재길은 "신에게 해볼 만한 처방이 있습니다"라며 물러갔다. 피재길이 웅담에 여러 약재를 섞고 고아서 만든 고약을 붙인 정조는 "약을 붙이고 조금 뒤에 전날의 통증을 깨끗이 잊어버렸다"며 피재길의 노고를 치하한다.

피재길은 나주 감목관(監牧官.지방의 목장을 관리하던 종6품 관직)에 제수됐고 그의 웅담고(熊膽膏)는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정씨 성만 전해지는 '정효자(鄭孝子)'는 부여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가 채소밭에 기름병을 붓고 있는 노모를 돕는 장면을 목격한 손님이 깜짝 놀랐다(...)

조선 후기 작자미상의 문집 '청구야담'과 신광현의 문집 '위항쇄문'에 처음 실렸다가 겸산(兼山) 유재건(劉在建ㆍ1793-1880년)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1862년)에 재수록된 이야기들이다.

이 책들 이외에도 양반이 아닌 중인과 양민, 천민 등 여항인(閭巷人), 즉 서민들의 이야기를 실은 책들은 19세기에 우후죽순처럼 나왔다. 조희룡의 '호산외기', 이경민의 '희조질사', 조수삼의 '추재기이', 정래교의 '완암집', 박영석의 '만취정집', 이상적의 '은송당집' 등이 그런 책들이다(...)

'이향견문록'은 서민층을 소개한 책들 중 가장 방대한 책 가운데 하나다. 여러 문집들에 나온 내용과 자신이 쓴 '겸산필기'의 내용을 중인 출신 지식인 유재건이 10권으로 엮으면서 모두 308명에 달하는 서민들을 덕목 유형별로 나눠 열전형식으로 소개했다.

벽사 이우성 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가 내놓은 '이향견문록'(글항아리 펴냄)은 1997년 민음사를 통해 출간했던 연구회 첫 번역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가다듬은 개정판이다(...)

연구회의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개정판 서문에서 "10년 사이 우리 고전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상당히 늘어났다는 반가운 조짐이 있다"며 "억눌려 지낼 수 밖에 없던 숱한 중인 양민 그리고 천민들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한 308명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21세기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오늘날의 갑남을녀들에게 줄 위로와 희망이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chaehee@yna.co.kr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