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8 février 2008

대목장 - 문화일보

<오후여담> 대목장
김영호기자 yahokim@munhwa.com

과거 한국 역사가 기술과 장인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집을 짓는 목수만은 다소 예외였던 것 같다. 궁궐과 사찰이 목조건물이다 보니 목조 건축 기술의 발달과 함께 목수에게는 상당한 벼슬이 주어졌다. 대목 일에 능한 장인, 즉 목수 중의 목수로 불리는 대목장(大木匠)은 정승감이어야 한다는 속담 그대로 신라·고려·조선시대 공히 높은 관직을 받았다.

조선 세종시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왕조는 60명의 목장을 선공감에 두었고 대목장은 정 5품의 벼슬을 받았다. 우변목수와 좌변목수도 종 7품의 직위를 받았으며 1497년 숭례문 개축공사 때는 대목장이 정 3품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의 관직에도 ‘목척(木尺)이 70인’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고려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목장은 목조 건물 건축에서 집 지을 나무를 선별하고 이를 마름질하는 것은 물론 설계·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를 지칭한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인간문화재 대목장은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전흥수(71)씨, 궁궐 건축의 대부로 알려진 신응수(67)씨, 막내뻘인 최기영(64)씨 등 3명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이들 ‘최고의 장인’이 버티고 있는 것은 서양의 석조 건물과는 달리 국내 목조건물은 내구성이 약해 끊임없이 보수·보강을 해야 하는 특성 때문이다.

선조들의 600년 혼을 되살려낼 숭례문 복원이 이들 3인의 장인정신과 손끝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 중 다행은 이들 중 신 대목장이 1961년 20세의 나이에 숭례문 해체·복원공사에 참여한 귀중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복원사업을 총 지휘한 조원재 대목장 밑에서 직접 숭례문 서까래 하나 하나를 뜯어냈고 기와를 깔기 위해 적심목을 깔았다고 한다. 인간문화재의 의미를 새삼 곱씹게 한다. 또한 당시 숭례문의 목재·기와·돌을 ㎜ 단위로 쟀을 정도의 정밀한 ‘숭례문 정밀 실측 조사보고서’까지 준비돼 있다. 다소나마 죄스러움을 덜 수 있게 됐다.

숭례문을 놓고 복원이냐 재현이냐, 국보 제1호의 가치가 있느냐 등의 논란이 일고 있다. 47년 전 해체·복원 경험을 가진 대목장의 장인정신에 지금과 같은 온국민의 관심과 정성이 보태진다면 그 자체가 국보 제1호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동력일 듯싶다.

김영호 논설위원
기사 게재 일자 2008-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