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6 mars 2009

[미륵사 사리장엄구 어떻게 봐야 하나] - 매일경제 / 2009-03-11

불교신앙.유적.유물 각종 논쟁 양산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초석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지난 1월14일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639년) 사리장엄구는 각종 논란을 양산했다. 현장과 유물이 공개된 직후 언론의 관심은 단연 선화공주에 맞춰졌으나 학계가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관심 사항에 따라 실로 다양하다. 두 달가량이 흐른 지금 학계는 발견이라는 흥분을 접고, 이를 차분히 검토하는 자리를 연이어 마련한다.
한국사상사학계가 14일 오후 1시 서강대 다산관에서 이를 주제로 월례발표회를 하며, 신라사학회는 국민대 한국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일주일 뒤인 21일 오전 11시 국민대 경상관에서 미륵사 출토 성과에 초점에 맞춘 정기발표회를 개최한다.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또한 다음 달 24-25일 백제학회와 함께 전북도청에서 발표자만 9명을 내세우는 대규모 미륵사 학술대회를 연다.

이 학술대회들을 통해 미륵사지 창건 주체와 정치ㆍ종교(특히 불교사상)적 배경, 심초석 출토 불교공양품의 성격 등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다만, 이 학술대회들의 발표자 대부분이 미륵사와 관련한 논문을 적어도 1편 이상 발표한 적이 있는 까닭에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학설에 유리하게 이번 발굴성과를 해석하려 하거나, '지역정서'를 배려하는 듯한 경향도 감지된다.

◇미륵사 창건주체

이른바 선화공주 논란과 맞물려 학계가 가장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대목이다. 이번 사리봉안기 발견 이전에는 백제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합작설'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근본이 흔들렸다.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적어도 서탑) 창건 주체를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王后)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는 흔적도 없다.

이런 곤혹스러움에 철석같이 무왕-선화공주 합작설을 주장하던 학계는 여전히 선화공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학계는 '분리설'을 내세운다. 미륵사 창건시기는 물론이고, 창건주체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륵사는 단기간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에 걸쳐 조성됐으며, 서탑이 축조된 639년 시점에는 창건주체가 사택씨인 백제왕후라 해도,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학계는 왕후 또한 분리한다. 즉, 무왕은 재위기간이 40년이나 되므로, 이 기간 내내 사택적덕의 딸이 계속 왕후였다는 보장은 없으며, 초반기 언젠가는 선화공주가 왕후로 활동했으리라 추측한다.

한국사상사학회에서 발표할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 박사는 미륵사가 중원(中院)ㆍ동원(東院)ㆍ서원(西院)의 이른바 3원(三院)을 갖춘 구조임을 들어 "선화공주에 의해 중원이 만들어지고, 사택왕후에 의해 동ㆍ서원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문헌 중심 백제사 연구를 주도하는 노중국 계명대 교수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사리봉안기 발굴이 선화공주를 완전히 내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담긴 발표를 예정하고 있다.

◇미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

이 또한 선화공주 문제만큼이나 충격을 주는 대목이다. 미륵사 창건 내력을 전하는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삼척동자가 봐도 그 사상적 배경은 미륵사상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하고 난 뒤에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나 세상을 교화하게 될 것이라는 미륵사상이 창건 배경이라고 누구나 주장했다. 사찰 이름 자체가 미륵사이니 이를 의심하는 연구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상은 흔적조차 없다. 백제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현세불인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돈독한 신앙심이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불교학계는 '법화경'과 미륵사상의 접목을 내세워 타개하려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번 사리봉안기가 말하는 불교사상은 근본이 법화경에 닿아 있으며, 그런 법화경에 미륵신앙이 나오므로 미륵사를 창건한 불교사상은 여전히 미륵사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경철 박사가 이런 주장을 하며, 같은 불교사상사 전공인 길기태 박사는 이와 상통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식의 해석, 즉 "무왕 시대 초반기에 (백제에서는) 미륵사상이 유행하다가 의자왕이 즉위하던 시점에서는 법화경으로 변모해 간다"는 요지의 발표를 한다.

◇사리공양품의 성격

신라사학회 발표에서 이에 대한 집중 검토가 있을 예정이다. 고대 장신구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은제관식(銀製冠飾)을 특히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이전까지 발견된 백제 은제관식은 모두 12점이며 세부적인 차이가 적지 않다. 또 그 중 어떤 것도 제작시기를 알 수 없었다.

이번 미륵사 서탑 출토 은제관식 2점은 제작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그것이 탑 안에 매납된 시기는 639년임을 확인했다.

종래 은제관식은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 차이를 반영한다는 것이 주류적인 학설이었다.

이에 이 교수는 이번 발표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확실한 은제관식 실물자료를 확보하게 됐으며, 이를 고리로 기존에 알려진 은제관식의 선후 관계를 알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간 세부적인 양식 차이는 신분에 따른 구별이 아니라 "제작 시기가 다른데 따른 현상"임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을 발표한다.

서체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사리봉안기에 적힌 서체가 중국 북조(北朝)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밝히는 한편, 역시 글자가 적힌 공양품인 '금제 소형 금판'이라는 유물은 화폐 기능을 한 '금덩어리'라는 주장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 외에도 사비시대 백제 지배층에서 막강한 위광을 누린 가문인 사택씨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학계가 비중 있게 다룰 것으로 전망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