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9 mars 2009

‘첫 근대적 항쟁’ 민족 넘어 민중을 발견하다 - 한겨레 / 2009-02-26

3·1운동이 올해로 90돌을 맞았다. 3·1운동에 대해서는 사회·경제적 배경부터 발발 원인, 주도 계층의 성격과 진행과정 등에 대해 풍부한 실증 연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3·1운동을 바라보는 주류적 해석은 그것이 계급과 지역을 초월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와 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가 26일 함께 마련한 3·1운동 9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3·1운동 참여 주체의 경험과 사후적 기억·기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의 지배권력과 민중이 3·1운동을 각각 어떻게 평가하고 상징화했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3·1운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심포지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도심거리서 공권력 맞선 ‘근대적 시위’ 지방으로 확산
“독립으로 계급고통 해결”…노동자·농민 점차 ‘주력화’
이승만·박정희 정권 ‘민족단결’ 초점…기반강화에 이용

“한국의 근대적 시위는 3·1 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그것은 대규모 군중과 무장군경이 도심의 대로에서 대치하는, 한국인들로선 처음 경험한 긴장과 흥분의 스펙터클이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삼일운동에서 드러난 ‘시위 문화’의 새로움에 주목했다. 전통적인 농민봉기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근대적 저항운동의 새 양상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삼일운동이 갖는 ‘거리의 모더니즘’으로서의 면모를 재발견하려는 시도다.

■ 거리서 꽃핀 모더니즘

삼일운동은 서울·평양·의주 등 7개 도시에서 시작돼 인근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됐다는 점에서 “도시민이 시작하고 농민이 적극 호응하면서 전개된 최초의 근대적 전국 항쟁”이라고 김 교수는 규정한다. 특히 서울의 시위는 학생·시민 등 시위대가 도심의 대로에서 군경과 대치하는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저항 방식도 다양했는데 학생은 동맹휴학,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동맹파업으로 식민지 권력에 항거했다. 반면 농촌 시위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주로 벌어졌고, 진압방식의 과격함에 비례해 점차 폭력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항쟁의 지도부가 부재했음에도 시위가 전국·일상화할 수 있었던 동력을 김 교수는 ‘대중의 자발성’에서 찾는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이 투항한 뒤 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과 학생이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만세꾼’이라 불린 전문 시위세력이 등장하는가 하면, 과거 민군을 조직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양반계급이 농민과 함께 항쟁에 동참하는 새로운 모습도 나타난다.

유인물과 격문·신문 등 근대적 인쇄매체도 중요한 몫을 했다. 김 교수는 “인쇄매체를 통해 전국 각지의 시위와 일제의 탄압 소식을 접하는 것은 반일의 기치 아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삼일운동의 새로움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보다 ‘민중의 부상’이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시위 주력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서울에서는 3월 말 전차 종업원과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직공이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절정을 이뤘다. 김 교수는 “노동자와 농민은 계급적 고통에 대한 처방으로 민족독립을 갈구했다”며 “이런 점에서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을 발견하는 과정은 민중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 민족주의, 민중을 발견하다

류시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식민지 시기 민족주의 진영이 삼일운동을 통해 민중을 발견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민중을 우매한 존재이자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지식인들이 삼일운동으로 민중 역량을 ‘발견’하면서 민중을 교화의 대상이 아닌 ‘민족 해방운동을 위한 협력·동반자’로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동아일보> 등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공동전선 구축을 요구하며 계급 차이를 넘어서는 집단 범주로서 민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류 교수는 “계급적 자기의식을 형성하면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민중 세력을 억누르고, 부르주아 세력의 주도성을 이어가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병택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이승만 정권부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3차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삼일운동에 대한 서술의 변화과정을 추적했다. 최 위원은 “3·1 운동을 반제국주의 거사로 기억하던 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이승만·박정희 정권기를 거치며 3·1 운동을 통해 전민족이 단결할 수 있었다는 단결론적 평가만 제시됐다”며 “이런 기억방식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정권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이용됐다”고 분석했다.

■ 좌와 우, ‘경험의 분단’을 넘어라

모든 발표·토론자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종합토론은 첨예한 ‘역사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삼일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지가 주로 논의됐다. 허수 동덕여대 교수는 “진보학계가 3·1 운동 이후 1920년대 사상사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란 틀에서만 보는 것은 1980년대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며 “(근대성이나 문명사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선웅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좌·우 모두의 명절이었던 3·1절이 어떻게 우파에 의해 독점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역사적 경험의 분단’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최병태 위원은 “조선인들은 왜 1919년 3월1일 그토록 격렬하게 일제에 저항했는지에 대해 한층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단순히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였다는 차원을 넘어 ‘근대화·문명화’라는 일제의 통치담론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나 이것이 조선인들에 의해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됐는지 등이 치밀하게 논구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