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6 mars 2009

[19C 제주인 중국에 '위장표류'한 까닭] - 매일경제 / 2009-03-10

류쉬펑 연구원 "보상금 노려 표류 감행"

해양사라는 측면에서 18-19세기는 '표류'(漂流)의 시대였다. 중국인이 한반도에 표류하는가 하면, 조선인이 중국으로 표류하기도 하고, 류큐인(지금의 오키나와), 일본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인으로 중국으로 표류한 사건을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문헌에서 뽑아보면, 1710년 이후 1884년까지 175년간 도합 172건으로 1년 평균 1건씩 발생한 것으로 나온다. 비공식 기록까지 합친다면 이보다 숫자는 더 많아진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대만 중앙연구원 인문사회과학연구센터 류쉬펑(劉序楓) 연구원은 실제 표류가 아닌 데도 표류한 것처럼 가장하는 가짜 표류인 위장표류가 많았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동아시아문화네트워크 사업단(단장 정민)이 오는 13일 이 대학 대학원 7층 화상회의실에서 개최하는 '표류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초청된 류 연구원은 이 '위장표류'의 실태를 점검한다.

주최 측이 미리 배포한 그의 논문은 19세기에 빈발한 위장표류 사건 중에서도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1821-1850)에 무려 네 차례에 걸쳐 중국으로 위장표류한 제주도 사람 고한록(高閑祿)의 행적을 집중 조사했다.

그의 표류 행적은 중국 기록에 풍부하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일성록(日省錄)과 같은 조선시대 문헌에도 더러 남아있다.

이에 의하면 고한록은 도광 7년(1827년) 4월 초이튿날 강소성(江蘇省) 동대현(東臺縣)에 표착한 것을 필두로 6년 뒤인 도광 13년(1833) 6월26일에도 같은 강소성 해주(海州) 경내의 해산항(海山港)으로 표착했다.

이어 3년 뒤인 도광 16년(1836) 8월 초삼일에는 강소성 남회현(南匯縣)에 표착했다가 조선에 돌아간 뒤에는 이듬해(1837) 9월에는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으로 표착한다.

하지만 고한록의 이런 잇따른 행적은 결국 그가 "일부러 중국으로 표류했다"는 소문이 제주지역 사회에 돌기 시작하고, 이를 고리로 제주도 목사가 고한록을 직접 심문한 결과 위장표류였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그에 대한 심문 기록은 일성록 헌종 44년(1838) 7월16일자에 보인다.

조사결과 고행록은 중국기록에 나타난 네 번 외에도 1829년 3월에도 동료와 함께 중국을 향해 위장 표류를 감행했다가 풍랑에 밀려 실패하고 전라도 우수영으로 되돌아온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고한록은 왜 이 같은 중국으로의 위장표류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을까?

제주목사의 심문에서 고한록은 "중국에서 표류민을 후하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구호금을 노리고 범행을 저지른 셈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표류민에게 각종 의식을 제공한 것은 물론, 난파한 배는 값을 지불했다. 1833년 제2차 위장 표류 때는 "이전보다 3배나 (구호 원조금이) 더 많았다"고 고한록을 진술했다.

중국은 중국대로 위장표류인 줄 알면서도 대국(大國) 행세를 하는 차원에서 그다지 엄격하게 이 문제를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위장표류 사건이 빈발하자 조선정부에서는 "잡힌 자에게는 엄한 형벌을 내리고 일정한 장소로 귀양보낸다"는 규정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이를 비롯해 표류를 근세 동아시아 문화 접촉의 통로로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자 하는 참신한 발표들을 마련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