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 décembre 2008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한겨레 21, 2008.11.21 제736호

[출판] 강준만의 <지방은 식민지다>, 대한민국 ‘내부식민지’는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와도 통하네

“지방이 지방주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울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발상을 포기한 만큼 그 걱정도 지방이 해야 한다. 수도권의 고민도 헤아려가면서 좀더 정교한 대안을 제시하고 추진해나가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을 지방이 책임지자.”

우리 시대의 논객 강준만 교수가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펴냄)에서 던지는 제안이다. 그가 이번에 한국 사회 변혁을 위한 화두로 삼은 것은 ‘지역 모순’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얘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대개 모른 체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하는 문제, 곧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모순이 문제다. 그는 아예 ‘내부식민지’란 말까지 꺼내들었다. 대한민국은 식민주의 국가란 말인가?

독일의 중국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펴냄, 2006)를 참조하면 억지스런 주장만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먼저, 하나의 사회 전체가 자체의 역사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타인에 의해 조종되며, 식민자의 경제적인 필요와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을 말한다. 말을 바꾸어, 지방이 자체의 발전 기회를 박탈당하고 중앙(서울)에 의해 조종되며 수도권 부유층의 이해관계에 종속된다면 바로 ‘식민주의’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할 텐가? 하지만 유의할 것은 ‘서울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는 점.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보다 중요하다.”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되라는 뜻이겠다.

오스터함멜은 또 근대 식민주의는 무엇보다 ‘주변’ 사회를 ‘중심’의 필요에 종속시키려는 의지와 관련되며 역사적으로 유럽의 근대 식민주의자들은 종속민들에게 유럽의 가치와 관습을 이식하려고만 했지 그들의 문화에 적응·동화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중심’과 ‘주변’이란 말 대신에 ‘서울’과 ‘지방’을 대입해보면 바로 한국 사회 아닌가? 지방의 ‘서울 따라하기’는 있어도 서울의 ‘지방 따라하기’는 없다는 점도 말하자면 식민주의의 징후다.

거기에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이라고 부를 만한 특정한 의식이나 태도도 덧붙일 수 있다. 가령 16세기 이래 이베리아 국가들과 영국의 식민지 이론가들은 유럽의 팽창 과정을 보편적인 사명의 달성으로 표현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전제로 하여 이교도 전도, 야만인·미개인의 문명화, 특권을 수반한 ‘백인의 부담’ 등을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내세웠다. 서울이 잘돼야 지방도 잘된다는 논리는 그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므로, 비록 내부식민지론이 1970년대 남미의 국가 간 종속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이론이라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지역 간 불평등과 경제적 격차에 적용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영국의 경우 잉글랜드와 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관계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런 내부식민지의 사례로 거론될 수 있다). 사실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은 얼마나 자주 상식적 판단을 빗나가게 만드는가. 그 ‘특수한’ 현실은 강 교수가 반복해서 제시하는 간단한 인구통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7년 10월 말 현재 주민등록상 인구 4919만4085명 중 서울·인천·경기 세 곳의 인구는 2390만3785명으로 48.6%를 점하고 있다. 국토 면적 11.8%인 수도권의 인구 비중은 1960년 20.8%에서 1980년 38.4%, 2000년 46.3%, 2002년 47.2%, 2004년 48.0%, 2007년 48.6%로 증가했다.”

그렇게 수도권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감소하는 것이 비수도권 인구다. 강 교수가 거주하는 전북의 경우엔 사정이 심각해 매일 60명꼴로 감소하고 있다 한다. 대부분은 전북에서 먹고살 길이 없거나 희망이 없어서 떠나는 것이며 이런 현실은 정도의 문제일 뿐 다른 지방들도 예외가 아니다. 과연 이러한 추세가 역전될 수 있을까?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강 교수는 진정한 지방분권과 자치를 위해서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는 ‘발상의 대전환’, 그리고 지방 내부의 개혁과 함께 한국 사회의 아킬레스건인 교육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방신문과 지방방송, 지방문화 육성을 위한 관심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내부식민지’의 토대가 되는 것은 역시나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의 과잉 집중을 억제하고 지역 간 균형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즉 ‘내부적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 분산’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대학의 지방분산론’이다. 혹은 차별적인 지원정책으로 명문대학을 수십 개로 늘려 ‘경쟁의 병목현상’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란 의구심이 바로 들 만큼 현실적으론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난관들인가? 먼저 기존 명문대의 반발을 극복해야 한다. 정책결정자들의 다수가 명문대 출신이란 점도 장애물이다. 게다가 단기간에 효과를 낼 수 없다는 점도 대안으로서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학자들이나 시민단체들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명문대 입학을 위한 사교육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가고 해마다 대입제도 개선안이 발표돼도 학생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탓에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해서다. 강 교수는 이런 점에서는 “이명박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이나 전교조나 모두 다 한통속”이라고까지 질타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 멀리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 다산 정약용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이라 한다. 정조시대에 서울 인구는 전국 인구의 2.55%에 불과했지만, 서울이 문과 급제자의 43%를 차지했다고 하니 서울 중심의 집중화와 출세를 위한 교육의 연계는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제 우리의 과제는 그 ‘뿌리’를 뽑는 것이다. 지방을 볼모로 한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일에 서울 시민도 동참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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