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 décembre 2008

실학은 과거회귀적 학문이었나? / 조선일보, 2008-11-26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을 지낸 ‘미국의 한국학 대부(代父)’ 제임스 팔레(Palais·1934~2006) 전 워싱턴대 명예교수의 대표 저서인 《유교적 경세론(經世論)과 조선의 제도들(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전2권·산처럼 刊)이 24일 완역 출간됐다.

1996년 원서가 발간됐던 이 책은 “11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고려·조선 700년은 노비의 비중이 30%를 넘어섰던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해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팔레 교수는 이 맥락에서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발전이 한국의 근대화와 연결됐다는 ‘내재적 발전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버드대에서 대원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카터 에커트, 존 던컨, 브루스 커밍스 등 미국의 대표적 한국학자들을 길러 낸 인물이었기에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번역본 분량만 1500쪽이 넘는 이 ‘문제의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범(金範) 박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그런 관점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팔레 교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제도개혁을 다룬 보기 드문 저서였던 실학자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사회를 포괄적으로 분석한 책이라는 것이다.

김 박사는 “팔레 교수의 시각은, 기존 한국 학계의 생각처럼 실학(實學)이 근대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사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과거회귀적이고 퇴영적인 사상에 가깝다고 봤다”고 말했다. 팔레 교수는 반계가 대중은 물론 조정의 관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관념적인 학자였지만, 자신이 살던 제도들과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획기적인 연구를 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토지 국유화와 재분배 직업군인제도 시행 공립학교 부흥과 도덕적 관원 양성 소액 동전만 발행하는 화폐제도 등이 반계가 제시한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반계의 개혁안은 군사·화폐제도 등 그 뒤로 전개된 조정에서의 실제 정책보다 오히려 뒤쳐진 면을 보이고 있었다고 팔레 교수는 지적했다. 반계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경세사상은 정전제(井田制) 등 중국 고전에 서술된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으며, 농업 생산의 주요한 원천을 장악한 양반 권력을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도 끝내 상업과 산업경제는 중농적(重農的) 농업경제를 크게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팔레 교수의 책은 방대한 사료를 철저하게 분석한 매우 중요한 연구지만, 지나치게 엄격하고 경직된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부정적인 해석을 낳았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