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5 décembre 2008

‘삼강행실도’ 지배층의 백성훈육 교과서 / 한겨레 2008-11-28

고금변증설 /

국가라는 권력기구를 작동시키는 것은 사회의 지배세력이다.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영속화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층의 대뇌에 설치하려고 한다. 뉴라이트가 국사 교과서를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은, 스스로를 한국 사회의 지배자라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1432년 6월9일 집현전은 <삼강행실도>를 엮어 세종에게 올린다. 한 해 전 충·효·열을 실천한 신하와 자식, 아내의 사례를 뽑아 책으로 엮으라는 세종의 명을 따른 것이다. 세종은 책을 서울과 각 지방에 나누어 주어 우부우부(愚夫愚婦)들이 책에 실린 행위를 본받게 하라고 다시 명한다. 이 책은 2년 뒤인 1434년 11월24일 인쇄되어 여러 지방에 보급된다. 하지만 한문으로 쓰인 책이라 백성들은 읽을 수 없었다. 이 책에 그림이 붙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세종은 지방관과 지방의 지식층이 문맹의 백성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 주라고 명했던 것이다. 한데 지방관과 지식층은 열심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다. 세종은 1443년에 백성을 가르치는 문자, 곧 한글을 만든다. <삼강행실도>는 한글 창제 이후인 성종 때 원본을 3분의 1로 축약한 국문번역본이 나오면서부터 백성들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삼강행실도>는 조악한 느낌이 들 정도로 볼품이 없어 보이지만, 이 책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또 조선 사람들의 위계적 윤리의 실천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즉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은 한국 역사상 이 책이 최초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양반 체제는 한글로 된 책을 다양하게 인쇄해 백성들에게 공급하거나, 원하는 백성이면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양반들은 되도록이면 백성을 무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통치에 필요한 만큼 적은 지식만을 주입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교육 내용을 어디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백성에게 묻지 않았다. 백성들 역시 일방적 교육에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낼 길이 없었다.

모든 국민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된 것은 1948년 이후의 일이다.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게 된 것을 사회 발전의 명백한 증거로 보기도 한다. 모든 국민에게 교육기회의 균등을 보장한다는 의무교육은, 외견상 선량한 의도를 띠고 있지만, 그 이면은 여간 복잡하지 않다. 무엇보다 교육하는 주체인 국가와 교육을 받는 국민의 관계가 권력적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교에 다니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의무교육 기간은 물론이고, 고등학교와 대학의 경우도 다니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학벌을 따지는 사회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에서 도태되기를 자원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교육이 권력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한층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과목의 구성과 평가다. 즉 피교육자인 학생은 교과목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항의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영에 능한 신체조건을 갖춘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에게 수영이란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부여하고 평가한다고 상상해 보자. 수영은 후자에게 꼴찌를 담보하는 과목이 될 뿐이다. 결코 공평하지 않다. 교과목의 구성은 바로 이 수영처럼 일방적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비판하거나 항의할 수 없다.

이런 예에서 보듯 근대국가의 교육제도가 갖는 일방적인 과목 구성과 평가는, 피교육자에게는 저항과 비판이 불가능한 일방적 권력 행사가 된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하에 일방적 권력 행사를 통해, 개인의 대뇌를 열고,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강제적으로 설치한다. 조선조의 교육과 근대교육은 이런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즉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들은 백성들을 교육에서 소외시키고, 자신의 지배에 꼭 필요한 만큼의 프로그램을 백성들의 대뇌에 설치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다면, 현대 국가는 국민 전체에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한다는 구실로, 자신에게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국민의 대뇌에 설치하려고 하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 교과서 역시 이 점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 세력은 왜 자신들의 역사관을 일반 출판이 아니라 굳이 교과서를 통해 펼치려고 하는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국가 교육의 권력이 갖는 일방적인 강제력 때문이다. 이 강제력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의식을 학생들의 대뇌에 일방적으로 설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른 교과서가 아닌, 국사 교과서에 집중하는 것인가.

국사는 수학처럼 부동의 진리를 가르치는 과목도, 인간 행위의 준칙에 대해 숙고하는 윤리를 가르치는 과목도 아니다. 국사는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행사되는 공간 안의 모든 개인을 세뇌하는 기본 도구다. 개인이 근원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을 동일하게 경험했다고 세뇌하거나, 일부 경험하였을 경우 그 경험의 의미를 단일한 것으로 확정하여 세뇌하는 것이다. 그 세뇌를 통해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는 인간 개체, 곧 국민이 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국민은, 현실 속에서 차별받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잊고, 자신이 다른 인간 개체들과 동등한 국민이라고 신념하게 된다. 차별성을 은폐하고 동일한 국민으로서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국사의 목적이다.

국가라는 권력기구를 작동시키는 것은 사회의 지배세력이다.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영속화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층의 대뇌에 설치하려고 한다. 뉴라이트가 국사 교과서를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은, 바로 스스로를 한국 사회의 지배자라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방 저 옛날 <삼강행실도>를 엮고 뿌렸던 양반들이 부활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