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AFP) — Le négociateur en chef américain sur le dossier nucléaire nord-coréen, Christopher Hill, va prolonger sa visite en Corée du Nord destinée sauver les négociations sur le processus de dénucléarisation, a indiqué jeudi l'ambassade américaine à Séoul.
Un porte-parole de la représentation américaine a confirmé que le secrétaire d'Etat adjoint aux affaires asiatique ne rentrerait pas jeudi après-midi tout en affirmant ne pas disposer d'éléments sur sa date de retour.
L'émissaire américain, arrivé mercredi en Corée du Nord à l'invitation des autorités communistes, devait initialement rentrer jeudi en Corée du Sud avant de s'envoler vendredi pour la Chine.
"Les Etats-Unis nous ont informés que le secrétaire d'Etat adjoint Hill ne serait pas de retour à Séoul aujourd'hui (jeudi)" a déclaré un responsable du ministère sud-coréen des Affaires étrangères cité par Yonhap sous le couvert de l'anonymat.
Ce changement de calendrier survient alors de M. Hill tente de sauver un accord de dénucléarisation du régime communiste signé en 2007 mais dont la mise en oeuvre semble aujourd'hui compromise.
Puissance nucléaire militaire depuis octobre 2006, la Corée du Nord négocie depuis 2003 l'abandon de son programme atomique en échange d'une aide énergétique et de garanties en matière diplomatique et de sécurité. Elle a fermé son principal réacteur nucléaire et commencé à le démanteler dans le cadre de l'accord à six pays (Chine, Corée du Nord, Corée du Sud, Etats-Unis, Japon, Russie) conclu en octobre 2007.
Mais les discussions achoppent sur les modalités de vérification....
vendredi 3 octobre 2008
女權으로 본 60년 /MBC뉴스 - 2008년 8월 27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60년.
오늘은 그동안 가장 많이 개선됐으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여전히 개선돼야 할 여지가 가장 많은 부문, 우리 사회 여성의 위치와 권리를 짚어보겠습니다.
신기원 기자입니다.
...
오늘은 그동안 가장 많이 개선됐으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여전히 개선돼야 할 여지가 가장 많은 부문, 우리 사회 여성의 위치와 권리를 짚어보겠습니다.
신기원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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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 한글본 발굴 /한국일보 - 2008년 9월 25일
조선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던 일을 정리한'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내용을 한글로 기록한 문헌이 발굴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5일 프랑스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한글본'뎡늬의궤(整理儀軌)'를 연구원 옥영정 교수가 발굴했다고 밝혔다.
발굴된 의궤는 12권 12책 분량이며 정조의 현륭원 원행(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참배)과 화성 축성등에 관한 내용을 방대하게 수록하고 있다.
이 의궤는 또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한글의 궤로 알려진'자경뎐진쟉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보다 앞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발굴로'화성성역의궤'에서 한자로 표기된 물품명, 지명, 각종 용어 등이 당시 한글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게 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뎡늬의궤'의 서지학적분석을 토대로 화성 성역의 구체적 내용 파악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주요 행사를 정리한 기록이다.'화성성역의궤'는화성 축조 당시 임금의 명령부터 구체적인 예산까지를 상세히 기록하고있으며,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5일 프랑스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한글본'뎡늬의궤(整理儀軌)'를 연구원 옥영정 교수가 발굴했다고 밝혔다.
발굴된 의궤는 12권 12책 분량이며 정조의 현륭원 원행(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참배)과 화성 축성등에 관한 내용을 방대하게 수록하고 있다.
이 의궤는 또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한글의 궤로 알려진'자경뎐진쟉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보다 앞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발굴로'화성성역의궤'에서 한자로 표기된 물품명, 지명, 각종 용어 등이 당시 한글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게 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뎡늬의궤'의 서지학적분석을 토대로 화성 성역의 구체적 내용 파악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주요 행사를 정리한 기록이다.'화성성역의궤'는화성 축조 당시 임금의 명령부터 구체적인 예산까지를 상세히 기록하고있으며,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 유학에서 21세기 삶의 길 찾는다 /서울신문 - 2008년 10월 1일
“실학은 근대적 지향을 핵심 가치로 삼았으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유교의 원론, 주자학적 사고와 지향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현대인들을 소외시키는 지금 시대에 유교적 자원은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줄 수 있다.”
20세기 근세사에서 조선 유학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짓밟혔다. 식민과 해방, 전쟁, 군사 독재와 민주화정권 교체 등 격변의 세월을 관통하며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근대화의 발목을 붙잡는 낡은 시대의 유물로 낙인찍혔다.
유 학은, 어쩌면 억울할지 모른다. 아무리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고 해도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 유학에 가해진 그 숱한 비판의 칼날은 모두 엄정한 것이었을까.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최근 동시에 펴낸 ‘왜 조선 유학인가’와 ‘조선 유학의 거장들’(이상 문학동네)은 조선 유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뛰어넘어 21세기에 걸맞은 조선 유학의 가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근대화에 매진하던 20세기는 기술과 과학, 개혁을 내세운 실학의 시각으로 주자학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근대화에 성공한 지금은 다른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시점입니다.”
‘왜 조선 유학인가’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한 교수가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자문자답한 결과다. 그는 조선 유학이 성취하고자 했던 가치들에 새삼 주목한다.“실학은 근대적 지향을 핵심 가치로 삼았으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유교의 원론, 구체적으로 주자학적 사고와 지향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현대인들을 소외시키는 지금 시대에 유교적 자원은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줄 수 있다.”
20세기 근세사에서 조선 유학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짓밟혔다. 식민과 해방, 전쟁, 군사 독재와 민주화정권 교체 등 격변의 세월을 관통하며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근대화의 발목을 붙잡는 낡은 시대의 유물로 낙인찍혔다.
유 학은, 어쩌면 억울할지 모른다. 아무리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고 해도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 유학에 가해진 그 숱한 비판의 칼날은 모두 엄정한 것이었을까.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최근 동시에 펴낸 ‘왜 조선 유학인가’와 ‘조선 유학의 거장들’(이상 문학동네)은 조선 유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뛰어넘어 21세기에 걸맞은 조선 유학의 가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근대화에 매진하던 20세기는 기술과 과학, 개혁을 내세운 실학의 시각으로 주자학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근대화에 성공한 지금은 다른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시점입니다.”
‘왜 조선 유학인가’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한 교수가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자문자답한 결과다. 그는 조선 유학이 성취하고자 했던 가치들에 새삼 주목한다.“실학은 근대적 지향을 핵심 가치로 삼았으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유교의 원론, 구체적으로 주자학적 사고와 지향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설/9월 22일] 교과서 수정요구 지나치면 안 된다/ 한국일보
요즘 중ㆍ고교생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유신헌법을 만든 독재자로만 생각한다. 경제 발전과 민족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으니 양 쪽을 다 봐야 한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고,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 역시 '박정희의 독재정치와 인권탄압 사례'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지금의 역사 교과서들이 근ㆍ현대사에 대해 지나치게 한 쪽만 부각시키거나 왜곡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국방부에 이어 통일부와 상공회의소까지 교육과학기술부에 역사교과서 수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0년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근ㆍ현대사에 대한 시각과 서술도 많이 바뀌었다. '반란' '폭동'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새롭게 규정되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과거 군사독재 정권 때처럼, 그것들 역시 두 정권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 축소되거나 '또 다른 사실과 평가'는 무시된 점이다.
그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역사관을 형성해가는 청소년들에게 역사를 보는 다양한 눈과 객관적 태도를 길러 주기 위해서라도 '외눈 교과서'는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틀이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에 관한 한 지극히 겸손하고 신중해야 한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승자(지배자)의 일방적 기록만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 10년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근ㆍ현대사에 대한 시각과 서술도 많이 바뀌었다. '반란' '폭동'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새롭게 규정되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과거 군사독재 정권 때처럼, 그것들 역시 두 정권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 축소되거나 '또 다른 사실과 평가'는 무시된 점이다.
그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역사관을 형성해가는 청소년들에게 역사를 보는 다양한 눈과 객관적 태도를 길러 주기 위해서라도 '외눈 교과서'는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틀이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에 관한 한 지극히 겸손하고 신중해야 한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승자(지배자)의 일방적 기록만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푸른 눈에 비친 백의 민족’ 전시 /뉴스앤조이 - 2008년 9월 21일
‘김만중의 <구운몽>을 원작인 한문 소설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청년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 언더우드 1세의 동료였던 게일(J. Gale) 선교사가 한문소설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했다. 제목은 (1924).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 가면 위의 책을 비롯해 교회사·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도서 100여 권을 볼 수 있다. ‘푸른 눈에 비친 백의 민족’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는 도서는 크게 네 종류다. 조선후기와 한말, 일제시대에 한국을 방문한 사업가나 외교관의 책과 역사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저술서, 한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 간 역사와 정치, 종교와 문화, 교회와 선교에 관련된 책, 그리고 한국인이 저술한 외국어 출판물 등이다....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 가면 위의 책을 비롯해 교회사·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도서 100여 권을 볼 수 있다. ‘푸른 눈에 비친 백의 민족’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는 도서는 크게 네 종류다. 조선후기와 한말, 일제시대에 한국을 방문한 사업가나 외교관의 책과 역사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저술서, 한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 간 역사와 정치, 종교와 문화, 교회와 선교에 관련된 책, 그리고 한국인이 저술한 외국어 출판물 등이다....
대한상의, 교과서 수정요구에 역사학계 “경제적 편향” 발끈 /서울신문 - 2008년 10월 1일
“사실은 없고 의견만 제시하는 교과서 수정 요구는 한국 역사학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역사학자들은 1일 “교과서의 편향성을 논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시각이 편향돼 있지 않은지 돌아보라.”고 입을 모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3월 초·중·고교 교과서에 시장경제와 기업활동, 세계화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많다며 교육과학기술부에 모두 337건의 수정을 요구했다. 특히 역사교과, 국사 국정교과서에 25건, 근현대사 5종 교과서에 140건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대표집필자인 상명대 사학과 주진오 교수는 “2년 동안 준비해서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들, 전문가 등이 사료와 기존 연구성과 등을 놓고 밤을 새워 토론해 만들어낸 결과물이 근현대사 교과서”라면서 “역사학은 종합학문으로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고 시대 전체를 바라보는 것인데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이 ‘사회과학자라고 역사를 못 다룰 이유는 없다.’며 1차 자료도 제대로 보지 않고 역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학문적 교만”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대한상의의 교과서 수정 검토에 참여한 학자들 가운데 역사학자는 없었으며 대부분이 경제·경영학 교수들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이에 대해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대표집필자인 상명대 사학과 주진오 교수는 “2년 동안 준비해서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들, 전문가 등이 사료와 기존 연구성과 등을 놓고 밤을 새워 토론해 만들어낸 결과물이 근현대사 교과서”라면서 “역사학은 종합학문으로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고 시대 전체를 바라보는 것인데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이 ‘사회과학자라고 역사를 못 다룰 이유는 없다.’며 1차 자료도 제대로 보지 않고 역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학문적 교만”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대한상의의 교과서 수정 검토에 참여한 학자들 가운데 역사학자는 없었으며 대부분이 경제·경영학 교수들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김우창, 최장집, 도정일 등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6명을 총출동시킨 문고판이 출간됐습니다.
생각의 나무가 펴낸 문 라이브러리 첫 6권은, 도정일 교수의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처럼 현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날카로운 시각을 담았습니다.
출판사는 이 문고본 시리즈로 지식과 성찰의 대중화를 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7천 원도 안되는 저렴한 책 값에 깊이와 재미를 겸비했지만, 새글이 아니라 저자들이 이미 발표된 글들을 모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서브프라임 크라이시스' 는 현재 세계 경제 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의 전모를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책입니다.
지은이들은 이번 금융 위기의 근원은 '쉽게 벌고 쉽게 쓰기' 즉, 가치의 훼손과 신뢰의 붕괴라고 말합니다.
'1%의 대한민국' 이라는 책에서 1%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 책은 한홍구, 윤구병 씨를 비롯한 역사, 인권, 노동, 철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하는 양극화 극복, 삶의 질 개선에 관한 교양서적입니다....
생각의 나무가 펴낸 문 라이브러리 첫 6권은, 도정일 교수의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처럼 현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날카로운 시각을 담았습니다.
출판사는 이 문고본 시리즈로 지식과 성찰의 대중화를 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7천 원도 안되는 저렴한 책 값에 깊이와 재미를 겸비했지만, 새글이 아니라 저자들이 이미 발표된 글들을 모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서브프라임 크라이시스' 는 현재 세계 경제 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의 전모를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책입니다.
지은이들은 이번 금융 위기의 근원은 '쉽게 벌고 쉽게 쓰기' 즉, 가치의 훼손과 신뢰의 붕괴라고 말합니다.
'1%의 대한민국' 이라는 책에서 1%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 책은 한홍구, 윤구병 씨를 비롯한 역사, 인권, 노동, 철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하는 양극화 극복, 삶의 질 개선에 관한 교양서적입니다....
4인의 석학, 한국사회 좌표 모색 / 한국일보 - 2008년 9월 12일
사회주의 몰락 이후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체제. 이 질주는 인간에 대한 배려 없는 경쟁의 극대화, 발전과 성장의 이름으로 포장된 과학과 기술의 자기확장, 시장가치의 전면적 확산과 사회공동체 해체라는 부정적 현상들을 낳았다. 2008년 오늘의 대한민국에도 고스란히 드리워진 이 먹구름을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까.
<전환의 모색>은 위기 타개를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등 4명의 석학이 진단한 현실좌표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조언을 담은 책이다. 후배 학자들과의 대담 형식인데, 질문에 대답하고 반론하며 덧붙이는 과정을 통해 걸러진 이들의 인문학적 담론은 각각 '온생명사상'(장회익)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 '문화적 민주화'(도정일) '심미적 국가'(김우창) 라는 키워드로 분광돼 빛을 발한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졌으나 역설적으로 경제적 민주화,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확대에 실패한 한국사회를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는 오목거울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그의 생각은 노무현 정부 들어 확대된 빈부격차, 고용 감소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등 이른바 심화된 '민주화의 역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는 동시에 '경제적 가치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의 유지가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임을 웅변한다....
<전환의 모색>은 위기 타개를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등 4명의 석학이 진단한 현실좌표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조언을 담은 책이다. 후배 학자들과의 대담 형식인데, 질문에 대답하고 반론하며 덧붙이는 과정을 통해 걸러진 이들의 인문학적 담론은 각각 '온생명사상'(장회익)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 '문화적 민주화'(도정일) '심미적 국가'(김우창) 라는 키워드로 분광돼 빛을 발한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졌으나 역설적으로 경제적 민주화,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확대에 실패한 한국사회를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는 오목거울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그의 생각은 노무현 정부 들어 확대된 빈부격차, 고용 감소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등 이른바 심화된 '민주화의 역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는 동시에 '경제적 가치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의 유지가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임을 웅변한다....
"소득 높을수록 아파트 선호, 한국적 특징" 조선일보 - 2008년 9월 4일
한국사회학회는 4일 영남대학교에서 건국 60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을 열었다. 지난 5월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날 행사의 주제는 '한국인 의 삶과 생활의 변화'.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이 심포지엄은 11월쯤 세 번째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홍두승 사회학회장은 인사말에서 "앞으로 맞이할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건국 이후 한국사회 변화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고유의 아파트 문화 확산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도시화와 아파트 주거문화'란 발표문에서 "건국 6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모습은 아파트 사회로의 돌진"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아파트 시대의 원년(元年)은 서울 중구에 처음 아파트가 들어선 1956년인데 약 40년 만인 2005년에 아파트는 전국 주거공간의 과반수(52.7%)를 차지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고소득층은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저소득층은 절반 이상이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면서 "단독주택 중심의 상류계급 주거문화를 발전시켜온 서구와 매우 대조적"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의 아파트 선호현상은 경제적 이익이나 합리성의 관점에서만 파악할 수 없고 부(富)와 결합된 신분과 지위의 실천이란 특징이 있다"며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현대 한국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일종의 내시경(內視鏡)"이라고 했다. 그는 "양성 평등이란 시대적 대세와 함께 여성의 경제적 결정권 강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말로, 아파트 확대의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아파트 전성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며 "인구감소, 고령화, 저성장 등은 주택시장을 도심 아파트로 쏠리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
◆한국 고유의 아파트 문화 확산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도시화와 아파트 주거문화'란 발표문에서 "건국 6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모습은 아파트 사회로의 돌진"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아파트 시대의 원년(元年)은 서울 중구에 처음 아파트가 들어선 1956년인데 약 40년 만인 2005년에 아파트는 전국 주거공간의 과반수(52.7%)를 차지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고소득층은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저소득층은 절반 이상이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면서 "단독주택 중심의 상류계급 주거문화를 발전시켜온 서구와 매우 대조적"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의 아파트 선호현상은 경제적 이익이나 합리성의 관점에서만 파악할 수 없고 부(富)와 결합된 신분과 지위의 실천이란 특징이 있다"며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현대 한국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일종의 내시경(內視鏡)"이라고 했다. 그는 "양성 평등이란 시대적 대세와 함께 여성의 경제적 결정권 강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말로, 아파트 확대의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아파트 전성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며 "인구감소, 고령화, 저성장 등은 주택시장을 도심 아파트로 쏠리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
mercredi 6 août 2008
113년의 국어교과서가 한 자리에…650여점 최초 공개 / 쿠키뉴스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113년간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 사용된 국어교과서 650여점이 처음으로 한 곳에 모였다.
서울 정독도서관은 건국 60주년을 기념해 6일부터 서울교육사료관에서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라는 제목으로 국어교과서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국어교과서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회다.
한국 최초의 국어교과서는 1895년 8월 현재 교육과학기술부에 해당하는 조선 정부의 학부가 개발한 초등학생용 국민소학독본이다. 이 책은 국내외 지리와 역사, 기술, 상업, 과학, 윤리 등 모두 41개 분야를 아우르는 일종의 통합교재로 우리나라 개화기의 물꼬를 텄다.
1896년 발행된 신정심상소학에는 한국 국어교과서 사상 처음으로 그림이 실렸다. 이 책에는 ‘똘똘한 학생’ 김지학과 ’바른생활 사나이’ 박정복이라는 두 학생이 등장해 개화기의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철수와 영이의 선배격인 이들은 그러나 한일합방과 함께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국어교과서는 일제강점기에 암흑기를 맞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보급한 조선어독본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한국인상을 그렸다. 국어교과서가 한국인에게 열등감을 부추겨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38년부터는 교과서에 한국어 사용이 금지됐다.
8·15 광복 직후 교과서 중에서 국어교과서가 가장 먼저 부활했다. 36년간 일제 식민지 생활로 우리말 보급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가 미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45년 9월 펴낸 ‘한글 첫 걸음’은 한글 문맹 퇴치의 선봉장이었다.
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 역시 초등 국어교과서인 ‘바둑이와 철수’부터 서둘러 편찬했다.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친숙한 교과서의 주인공 철수와 영이, 바둑이가 이 때부터 등장했다. 이 교과서는 주인공들이 학교와 집을 오가며 여러 가지 상황을 경험하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국어교과서는 55년 1차 교육과정 이후 7차례 개정을 거쳤다.
정독도서관 유왕준 관장은 “이번 전시회가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과 가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내년 2월 21일까지 계속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서울 정독도서관은 건국 60주년을 기념해 6일부터 서울교육사료관에서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라는 제목으로 국어교과서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국어교과서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회다.
한국 최초의 국어교과서는 1895년 8월 현재 교육과학기술부에 해당하는 조선 정부의 학부가 개발한 초등학생용 국민소학독본이다. 이 책은 국내외 지리와 역사, 기술, 상업, 과학, 윤리 등 모두 41개 분야를 아우르는 일종의 통합교재로 우리나라 개화기의 물꼬를 텄다.
1896년 발행된 신정심상소학에는 한국 국어교과서 사상 처음으로 그림이 실렸다. 이 책에는 ‘똘똘한 학생’ 김지학과 ’바른생활 사나이’ 박정복이라는 두 학생이 등장해 개화기의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철수와 영이의 선배격인 이들은 그러나 한일합방과 함께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국어교과서는 일제강점기에 암흑기를 맞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보급한 조선어독본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한국인상을 그렸다. 국어교과서가 한국인에게 열등감을 부추겨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38년부터는 교과서에 한국어 사용이 금지됐다.
8·15 광복 직후 교과서 중에서 국어교과서가 가장 먼저 부활했다. 36년간 일제 식민지 생활로 우리말 보급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가 미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45년 9월 펴낸 ‘한글 첫 걸음’은 한글 문맹 퇴치의 선봉장이었다.
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 역시 초등 국어교과서인 ‘바둑이와 철수’부터 서둘러 편찬했다.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친숙한 교과서의 주인공 철수와 영이, 바둑이가 이 때부터 등장했다. 이 교과서는 주인공들이 학교와 집을 오가며 여러 가지 상황을 경험하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국어교과서는 55년 1차 교육과정 이후 7차례 개정을 거쳤다.
정독도서관 유왕준 관장은 “이번 전시회가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과 가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내년 2월 21일까지 계속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lundi 4 août 2008
Pyongyang s'apprête à expulser des Sud-Coréens / La Presse Canadienne - 2008.8.4
SEOUL, Corée du Sud — La Corée du Nord a annoncé dimanche qu'elle allait expulser des Sud-Coréens travaillant dans une station de montagne de ce pays communiste, un nouveau signe du refroidissement des relations entre les deux nations.
Il y a un mois, un touriste sud-coréen a été tué par balles par un soldat nord-coréen dans cette station de montagne, ce qui a suscité des protestations de Séoul.
Dans un communiqué diffusé par l'agence officielle KCNA, l'unité militaire nord-coréenne de cette station a annoncé qu'elle expulserait tous les Sud-Coréens que "nous estimons non nécessaires" de la station "Montagne de diamant".
La Corée du Sud a suspendu les voyages touristiques dans cette station -qui était pourtant un des rares sites touristiques ouverts aux étrangers-après la mort du touriste, mais plus de 260 Sud-Coréens y travaillent encore.
Il y a un mois, un touriste sud-coréen a été tué par balles par un soldat nord-coréen dans cette station de montagne, ce qui a suscité des protestations de Séoul.
Dans un communiqué diffusé par l'agence officielle KCNA, l'unité militaire nord-coréenne de cette station a annoncé qu'elle expulserait tous les Sud-Coréens que "nous estimons non nécessaires" de la station "Montagne de diamant".
La Corée du Sud a suspendu les voyages touristiques dans cette station -qui était pourtant un des rares sites touristiques ouverts aux étrangers-après la mort du touriste, mais plus de 260 Sud-Coréens y travaillent encore.
Cinema coréen : entretien avec Antoine Coppola / Il était une fois le cinéma - 2008년 7월 30일
Cinema coréen : entretien avec Antoine Coppola
Article de Samir Ardjoum & Sidy Sakho
A l'occasion de la découverte estivale des deux derniers films de Hong Sang-soo, ainsi que du 100 ème opus d'Im Kwon-taek, rencontre avec Antoine Coppola, cinéaste, historien, observateur référentiel du cinéma coréen.
S'il est une cinématographie asiatique dont l'histoire est encore trop méconnue en dehors de ses frontières, c'est bien la coréenne. En quoi le cinéma du nord se distingue-t-il de celui du sud ? Quelle portée esthétique et thématique a eu et a toujours l'influence de l'Etat et du gouvernement de Kim Jong-il ? Hong Sangsoo est-il réellement, comme on a tendance à le dire, un disciple de Rohmer ? Une nouvelle génération d'auteurs se profile-t-elle déja ? Voici quelques réponses.
1. Comment vous est venue cette envie de vous fondre dans cette géographie cinématographique ?
Il existe encore des territoires que les historiens du cinéma n’ont pas explorés. Luttant contre l’ethnocentrisme de la plupart des études sur le cinéma (voir en particulier nos livres français sur le cinéma), j’ai voulu explorer le cinéma en Corée et en Asie à une époque où, en dehors des auteurs célèbres japonais et de travaux très orientés politiquement sur la Chine, très peu de choses avaient été écrites. Et ceci, tout en faisant contrepoint à la multiplication d’études anglo-saxonnes beaucoup trop faibles culturellement et esthétiquement parlant à mon goût. Le cinéma en Corée, le plus dynamique depuis toujours avec celui du Japon, était alors en pleine ébullition, car il se mettait au diapason du mouvement démocratique qui allait renverser la dictature militaire (fin des années 80). Des rencontres avec des réalisateurs (citons Yu Yun-mok, Park Kwang-su, Jang Sun-woo – alias Chang Sun-woo – Lee Myung-see, Bae Chang-ho, E.J Young, Lee Chang-dong, Kim Ki-duk et quelques autres) ont fini de m’initier à ce cinéma. A Taiwan, Tsai Ming-liang et à Hong-kong, John Woo et Wong Kar-wai m’ont servi de fil rouge ; au Japon ce furent Imamura et Oshima.
2. Quelle est la véritable différence entre les cinémas nord-coréen et sud-coréen ?
C’est une grande question à laquelle je réponds en détail dans un livre qui paraîtra bientôt en France. Il faut rappeler que le cinéma coréen existait bien avant la séparation des deux Corées. Il y a donc des similitudes fortes comme la dominante mélodramatique et l’objectif éducatif des films. La séparation de 1953, après la guerre de Corée, a placé le cinéma nord-coréen sous la tutelle des cinémas socialistes chinois et surtout russe. Le réalisme socialiste était la norme depuis 1934 en URSS, et depuis 1945 en Chine. Pour faire court, disons qu’il s’agissait de manière totalement idéaliste de faire un cinéma « pour le peuple », « par le peuple ». En fait, les institutions étatiques intervenaient sans cesse dans l’élaboration des films. Alors que ce système s’est effondré en URSS et bat de l’aile en Chine, la Corée du Nord y reste attachée. Le Sud, lui, a été après 1953 colonisé par les films américains. Ces derniers ont eu une forte influence esthétique et thématique, mais ils ont surtout réduit pendant longtemps le cinéma coréen à des séries B. Malgré la libre économie du cinéma sud-coréen, la censure de la dictature militaire y a été féroce et des monopoles financiers y sont toujours présents. La grande différence est donc – il faut le rappeler de nos jours, où beaucoup pensent que la mondialisation a supprimé toutes les différences idéologiques – qu’au Nord le cinéma est fait dans le cadre d’un régime dit communiste, et au sud dans le cadre d’un régime capitaliste.
3. Pour quelles raisons le cinéma du nord rencontre-t-il des difficultés d'exportation ?
Avant la dissolution de l’URSS, les films nord-coréens circulaient très bien dans ce qu’on nommait « le bloc socialiste » (pays de l’Est, Chine, Vietnam, Libye, Mozambique, Cuba etc.) Les festivals les y accueillaient et le commerce des films se faisait dans ce cadre. Hong Kil-dong, un film d’arts martiaux nord-coréen, a été l’un des grands succès commerciaux des pays socialistes dans les années 70. Les Nord-coréens se souciaient peu de diffuser leurs films dans le bloc impérialiste (Moscou et Pékin avaient stabilisé leur empire, et Pyongyang n’a jamais eu de volonté d’étendre la révolution coréenne à l’étranger) . Et les cinémas impérialistes ne songeaient pas à mettre sur leurs écrans ce qu’ils jugeaient être de la propagande communiste. Après la fin de l’URSS, les choses se sont compliquées. D’une part, le réseau socialiste est entré en crise ; d’autre part, les Occidentaux ont commencé à bien vouloir voir ce qui paraît comme de vieux films kitsch, « exotiques », donc. Enfin, un boycott sévère a été pratiqué par les gouvernements Bush et ses alliés à ce petit pays de « l’axe du mal ». Tout ce qui sort et entre en Corée du Nord est filtré, catalogué, rationné. La monnaie nord-coréenne, comme longtemps la monnaie chinoise, s’échange sur des critères totalement aléatoires. Toutefois, il faut noter que dans les années 50 et 60, les historiens et critiques européens ont porté attention au cinéma nordiste sans permettre vraiment d’établir un échange des films (il faut se souvenir que les films soviétiques russes ont longtemps été introduits en France de manière illégale, passant outre l’interdiction officielle).
4. Quelles sont les principales caractéristiques du cinéma nord-coréen ?
Je réponds à cette question en détail dans mon livre à paraître. Des contributions de chercheurs sud-coréens apporteront aussi un éclairage local très intéressant. Pour aller à l’essentiel, disons qu’ils sont fidèles à l’esthétique du réalisme socialiste, avec quelques particularités coréennes : les thèmes sont liés à la vie quotidienne ou aux héros de la guerre contre les impérialistes et les nobles. Les récits sont romancés, mélodramatiques, mais transforment le destin en pression des impérialistes, et la grâce divine en action du grand chef de la nation et des vertus du communisme national. Le style de montage est classique, s’indexant sur les dialogues. Mais la composition des images relève de la peinture socialiste (inspirée de l’Union Soviétique) : plan d’ensemble de catégories sociales, de foules, de soldats, de paysans, d’enfants, d’ouvriers, etc. Le jeu est naturaliste mais les images introduisent toute une symbolique qui dépasse l’idéologie socialiste pour rejoindre, parfois, des traditions nationales coréennes ou des philosophies asiatiques encore plus profondes (la relation de l’homme à la nature, la structure collective de l’organisation humaine etc.). Le récit recherche le moment de dépassement, l’emphase extatique à la gloire du peuple et des héros anonymes ou célèbres du pays. Le cinéma nord-coréen touche à presque tous les genres, du film d’arts martiaux à la comédie sentimentale. On note cependant l’absence de films érotiques et de comédies grotesques (un genre prisée au Sud). Il faut noter que des acteurs et actrices sont de vraies légendes vivantes au Nord et certains réalisateurs élevés aux plus hauts rangs de la hiérarchie sociale. Cet aspect proprement coréen, vient du fait de la passion bien connue pour le cinéma de Kim Jong-il, le grand chef du pays. Scénariste, réalisateur, théoricien du cinéma, il est omniprésent dans l’histoire du cinéma de ce pays. Il a plusieurs fois mis en avant le cinéma comme l’art populaire central de la nation.
5. Comment se définissent les moyens de financement dans ces deux pays ?
Le financement au Nord est totalement sous la tutelle de l’Etat. Les studios et le matériel appartiennent à l’Etat. Les techniciens, acteurs et réalisateurs sont formés par l’Etat. Rien ne se fait sans les institutions étatiques. Le budget consacré au cinéma est décidé annuellement. Il décroît sans cesse, du fait de la crise économique qui touche le pays. Il n’a plus rien à voir avec l’âge d’or des années 50-60
Au Sud, le financement est en grande majorité privé. Les aides de l’Etat se multiplient mais demeurent faibles. Une foule de producteurs animent le marché, mais ce sont des monopoles de gros distributeurs qui le contrôlent. Cette situation est un retour à la situation des années 60-70 en Corée du Sud, après une période de démantèlement des monopoles et d’afflux de nouveaux producteurs (années 80-90). Un grand tournant s’est produit avec la fin du système de quotas, qui permettait de freiner l’importation de films américains (la nouvelle vague coréenne des années 80 a pu exister grâce à ce système). Aujourd’hui, seuls les monopoles peuvent aligner un budget marketing concurrentiel par rapport aux Américains. La situation est donc critique pour les films faits en dehors des grands groupes. Les aides de l’Etat pourraient aussi baisser avec le nouveau gouvernement libéral. Des alternatives sont en cours d’élaboration : l’exportation vers l’Asie, d’abord, puis l’Occident ; la création d’un vrai marché vidéo en lutte contre le piratage massif ; la constitution d’un réseau de diffusion des films indépendants ; un rapprochement télévision-cinéma ; etc. Toutefois, des blockbusters sud-coréens remportent des sommes faramineuses ( The King and the Clown ou The Host , de Bong Joon-ho avec près de 13 millions d’entrées), qui renforcent le système des grands groupes. Et d’un autre côté, Jeon Soo-il, Hong Sang-soo ou Kim Ki-duk obtiennent des succès critiques mondiaux avec des films tournés grâce à des budgets de courts métrages sponsorisés par les régions en France…
6. Concernant le cinéma nord-coréen, vous dites souvent qu'il est « fondé sur le réalisme socialiste soviétique", mais que "son histoire montre une évolution des thématiques ». Quelle est cette évolution ?
Je traite particulièrement de cet aspect dans mon livre. Les premiers thèmes (les mots d’ordre à illustrer au cinéma comme en littérature ou en peinture), valorisaient les héros de la révolution et de la guerre contre les impérialistes japonais, américains et les nobles coréens. C’était le modèle russe. Puis, sous l’impulsion de Kim Jong-il, la vie quotidienne et les sentiments sont apparus comme thèmes. Les commissaires du peuple aux prises avec les difficultés d’un village sont devenus des héros ; les paysans, les leaders ouvriers, sont devenus des modèles de personnages pour les films. Les problèmes du pays apparaissent clairement : inondations, clivages entre soldats et civils; entre citadins et paysans etc.(manque, évidemment, le thème de la répression politique). Enfin, une sorte de socialisme autonome s’est constitué (dans les années 90), où les gens quelconques se débrouillent pour survivre (contre la nature hostile et manipulée par les impérialiste, par exemple). L’intervention des autorités se fait moindre. Les lourdes reconstitutions historiques sur le modèle russe, laissent place à un sentimentalisme exacerbé, typique du cinéma coréen traditionnel, ainsi qu’à des films presque intimistes autour d’une maison de village ou d’un pâté de maisons. Enfin, une certaine ironie critique provoque une double lecture des films comme dans Le journal d’une jeune nord-coréenne, sorti récemment en France. Certains clins d’œil font référence plus ou moins directement à la situation du Sud ou des pays impérialistes (situation toujours décrite comme catastrophique – chômage, misère, exploitation, aliénation, inégalités etc.) par les films du Nord.
7. Pouvons-nous dire que l'âge d'or du cinéma sud-coréen, celui des années 50, influença la nouvelle génération de cinéastes d'aujourd'hui ?
Les années 50 du cinéma coréen sont assez mal connues d’un point de vue esthétique, du fait de la disparition de nombreux films. Cela va mieux pour les années 60. L’histoire du cinéma coréen est très cohérente, et les cinéastes font preuve d’une grande cohésion entre eux. Comme je l’explique dans mes deux livres ( Le cinéma sud-coréen et Le cinéma asiatique ), on pourrait parler, comme en Chine, de « générations de cinéastes » en Corée. Les jeunes respectant leurs aînés et ainsi de suite. Cela implique une filiation automatique des styles. Toutefois, il faut rappeler que le cinéma coréen des années 50 était sous influence américaine et japonaise. L’un des courants profonds du cinéma coréen était de trouver sa propre originalité, de puiser aussi en Europe, en Amérique du sud , en URSS et en Chine d’autres influences. Un réalisateur comme Yu Hyun-mok (voir son interview fleuve dans le numéro de « Cinemaction » consacré aux cinémas d’Asie orientale), le parrain du réalisme en Corée, a tout simplement inventé le néo-réalisme coréen dans son film Obaltan en 1961, pendant la révolution étudiante. L’histoire du cinéma coréen est parsemée de films «ovnis » qui sont des balises servant de repères aux cinéastes actuels. Yu Hyun-mok est probablement celui qui, comme Abel Gance en France, a montré comment on peut bouleverser le cinéma commercial de l’intérieur et secouer la censure (voir aussi son film expérimental Empty Dream de 1965). C’est aussi grâce à quelqu’un comme lui que le cinéma est devenu digne d’intérêt pour les intellectuels en Corée. D’un point de vue esthétique, le cinéma des années 50-60 en Corée était l’équivalent de notre période de « qualité française ». On en retrouve des traces dans le cinéma des grandes compagnies qui dominent le marché actuellement. L’attention aux décors et l’argent qui se voit sur l’écran en est une ; le star system écrasant en est une autre ; les scénarios dominant l’art de l’image en sont aussi une trace. Comme en France, on n'y lisait que peu la situation – socialement dramatique – du pays, qui allait aboutir à la révolution étudiante et au coup d’état militaire de 1961. C’est peut-être aussi le cas aujourd’hui. Après le réalisme social et politique des années 80-90, voici venu le temps des grandes fresques nationales, aux idées bien plus abstraites.
8. Concernant le cinéma sud-coréen, on sait que le film *Fantasmes*(Gojitmal), de Chang Sun-Woo, distribué en France en 2000, a fait l'objet d'une certaine censure en son temps. Où se situe aujourd'hui cette société par rapport à la représentation de la sexualité ?
Le film Gotjitmal (traduisez « mensonge ») a marqué un sommet dans l’hypocrisie de la censure. Ce que n’a pas supporté la censure était, en fait, la dénonciation de la fausse morale imposée par la société et le choix d’une vie libre par les deux protagonistes (une jeune lycéenne choisit un peintre marginal bien plus âgé pour faire son éducation sexuelle). Le titre français « Fantasmes » est extrêmement réducteur (le « mensonge » correspond bien à l’enjeu social du film). Il faut savoir que le cinéma coréen, même s’il s’en défend par honte, a une tradition du film érotique « soft ». Histoires de prostituées au grand cœur et de perversions de filles de la campagne par la ville. Le tout est de bien voir que le moralisme est toujours dominant dans ces films, qu’ils cherchent un certain réalisme (ceux d’Im Kwaont’aek), ou une certaine fantaisie psychédélique. Gotjimal (et quelques autres comme Teenager Hooker became a killing machine in Daehakro, de Nam Ki-woon) ont essayé de faire du sexe une arme de libération sociale à l’image d’un Imamura ou d’un Oshima au Japon, et d’un Bunuel en Europe. Depuis la fin des années 90, avec l’essor des sectes protestantes et la reprise des contacts avec la Chine, le puritanisme a repris place, l’auto-censure a remplacé la censure directe, mais on se demande si c’en est la peine puisque peu de réalisateurs aspirent à la contestation sociale aujourd’hui. Au contraire, sous le couvert de comédies, de films d’horreur et de films de gangsters, on voit reparaître les films éducatifs pour la jeunesse, un ancien genre très en vogue partout en Asie. Bref, seuls quelques cinéastes «courageux » (je crois que c’est désormais le vrai qualificatif des auteurs de cinéma) osent aborder une sexualité dont les pratiques ne doivent pas accéder à la conscience collective : Hong Sang-soo (pour le réalisme), Kim Ki-duk (pour le surréalisme et le symbolique). A noter cependant qu’un film coréen comme Too young to die de Park Jin-Pyo était l’un des rares au monde à parler et montrer la sexualité d’un vieux couple. Mais les exceptions ne font que confirmer la règle.
9. Toujours dans le cinéma sud-coréen, ont aujourd'hui acquis une réelle renommée extra-territoriale trois cinéastes aux styles et aspirations bien distinctes. Kim Ki Duk, le prolifique, se dirigeant vers des fictions à la fois triviales et empreintes de « fantastique ». Park Chan Wok, auteur de films de série B ultra-conceptuels et violents. Hong Sang-soo, que l'on pourrait davantage qualifier d' « auteur », héritier d'une culture cinéphilique très large, voisin par certains aspects d'Eric Rohmer. D'autres « valeurs sûres » sont-elles à attendre ?
La situation est actuellement intéressante mais critique. Pour avoir participé à plusieurs débats sur le sujet du cinéma indépendant en Corée, je peux dire que l’enjeu est l’avènement d’un véritable cinéma indépendant des grosses compagnies (distribution-production). De ce nouveau mouvement naissent déjà de nombreux nouveaux cinéastes. Leurs films – souvent en numérique – sont encore peu connus car privés de distribution par les grandes compagnies qui détiennent des monopoles dans le domaine. Leur problème consiste en ce que deux clans s’affrontent de manière invisible : celui des indépendants en attente d’accès au cinéma « mainstream » (à la façon des américains) ; celui des vrais indépendants qui souhaitent poursuivre la création d’une œuvre personnelle en défiant les lois du commerce tout puissant. Pour ces indépendants, citons leur chef de file spirituel : Jeon Soo-il, auteur du minimaliste The Girl From Black Soil , qui peut se targuer d’avoir détourné l’acteur star Choi Min-sik ( Old Boy ) du cinéma commercial pour son dernier film tourné sur l’Himalaya. Notons, enfin, que les femmes cinéastes, d’abord documentaristes, mais aussi de fiction, se battent pour prendre place dans un cinéma qu’elles affectionnent particulièrement. Leur chef de file et marraine est Im Soo-rye qui, après quatre films, a fini par obtenir un succès commercial retentissant en 2007.
10. Parlons un peu de Hong Sang-soo. Il n'a pas eu besoin d'attendre de tourner un film hors de son pays pour « parler » à un public international. Quel est son regard sur l'accueil extérieur de ses films ?
Hong Sang-soo a jailli sur la scène internationale avec son chef-d’œuvre : La vierge mise à nue par ses prétendants (« Oh ! Soojong ! » en coréen). Le problème (comme pour Kim Ki-duk) est que le public coréen ne se presse pas dans les salles pour voir ses films. Les producteurs français, dont la recherche de projets exotiques est bien connue, lui ont proposé de financer ses films tournés en Corée. Ce qu’il a fait brillamment, mais avec un affaiblissement de sa vision, probablement à cause de la volonté de toucher un public plus international. L’épisode de production française passé, voici venu le temps du tournage en France. Il n’est pas le premier coréen à le faire ni le dernier. Cette étape devient de plus en plus de rigueur pour des cinéastes prisés par les critiques et les festivals internationaux, mais dépourvus de public et d’appuis financiers en Corée. Sans prétendre parler à la place de Hong Sang-soo, s’il voulait peu se soucier de la réception de ses films dans le monde et rester coréano-coréen, il ne le pourrait économiquement pas. Ce décalage entre le grand public coréen et un nombre de plus en plus grand de cinéastes talentueux dans ce pays, perdure et devient inquiétant. Il est urgent de créer un réseau réel de salles indépendantes, ou des réseaux de diffusion télévisée.
11. Pensez-vous que *Night and Day*, dernier film en date de Hong Sang-soo, marque un tournant, une évolution dans son cinéma ? Son style y semble moins « affirmé », plus ouvert à la perte de contrôle. Cela peut séduire ou laisser sceptique. Quel serait votre positionnement ?
Night and Day confirme une évolution en cours dans les 3 derniers films de Hong Sang-soo. Les critiques ont un peu trop exagéré l’influence du cinéma français (Rohmer) sur Hong Sang-soo. Ce dernier n’a jamais étudié en France mais aux USA. Un film comme La vierge mise à nue… montre une influence venant de Luis Bunuel. Surtout, il ne faut pas oublier un autre grand cinéaste asiatique de la réalité quotidienne la plus banale : Tsai Ming Liang. Hong Sang-soo parle surtout d’une influence littéraire française, observatrice de la petite bourgeoisie comme pouvait le faire les romans de Flaubert, et une autre, moins déclarée, qui est celle de la présence de scènes de sexe à l’écran. ( Je verrais aussi une influence thématique (les loisirs) et stylistique (les compositions naturalistes) de la peinture impressionniste française du 19e siècle). Notons trois évolutions jusqu’à ce dernier film « parisien » : l’un des points clefs du cinéma de Hong était l’expression banale mais très directe de la sexualité (voir les longues scènes d’un érotisme froid de ses premiers films). Les derniers films de Hong sont moins marqués par le sexe. Hong faisait à ses débuts une sorte d’éloge négatif de la nouvelle liberté sexuelle de la bourgeoisie coréenne. Depuis quelques temps, avec le retour d’un certain puritanisme dans le cinéma coréen (et aussi asiatique), Hong est privé d’un de ses points forts.
Deuxième évolution, positive celle-la, Hong applique son sens aigü de l’observation des situations absurdement banales du quotidien moderne à la France. Bien qu’il fasse un portrait bien trop positif de la vie des Coréens à Paris, il capte les lieux à ras du sol, les espaces-temps dans leur dense vacuité, comme jamais un réalisateur français n’est parvenu à le faire depuis les films de la Nouvelle Vague. Ce regard de Hong qui se tourne vers d’autres modernités artificielles pourrait compenser la troisième tendance de ces films récents, qui est la condensation de ses thèmes (l’inadéquation de l’homme (le vrai) avec la société moderne, la folie érotique des femmes, la déshumanisation des espaces de vie urbains etc.) autour d’histoires de plus en plus ténues, simplifiées, ne tenant debout que par la dérision du regard cynique de Hong sur ces vies en demi-teintes, pleines de petites lâchetés et de si peu d’héroïsme. Notons, enfin, que l’humour noir, la dérision subtile, si pesamment absents de la grande majorité des films coréens, est la marque toujours présente de l’art d’Hong Sang-soo.
12. Pouvez-vous nous parler du sujet de votre dernier film, que vous tournez actuellement ?
Ce n’est pas la première fois que je tourne en Corée : j’ai réalisé un documentaire sur Kim Ki-Duk, Kim Ki-Duk, cinéaste de la beauté convulsive, en 2006, un autre sur « Cheong-gye-chon » en 2005 et un docu-fiction, Nights and Days, en 2002. Cette fois, une équipe franco-coréenne et deux actrices coréennes assez connues (Yoo Ji-hyun et Kim Ginie) m’ont aidé à mettre en scène une série de poèmes que j’avais écrits lorsque j’habitais le centre de Séoul. Shim Hyun-jung, la compositrice de l’envoûtante musique du film Old Boy, de Park Chang-wook, a composé une musique originale sur toute la longueur du film. Il s’agit d’un « non-action movie », comme je m’amuse à le qualifier. Pourtant, on y voit des jeunes femmes mystérieusement appelées à rejoindre des endroits aux ambiances étonnantes dans la Séoul contemporaine, pleine de contrastes aussi saisissants qu’éphémères. Une voix semble les guider… Si les réalisateurs coréens ont déjà filmé Séoul de manière surréaliste ou loufoque ou violente ou mélodramatique, mon film est à ce jour probablement le film le plus mélancolique jamais tourné en Corée.
Propos recueillis par Samir Ardjoum et Sidy Sakho, le 22 juillet 2008.
Article de Samir Ardjoum & Sidy Sakho
A l'occasion de la découverte estivale des deux derniers films de Hong Sang-soo, ainsi que du 100 ème opus d'Im Kwon-taek, rencontre avec Antoine Coppola, cinéaste, historien, observateur référentiel du cinéma coréen.
S'il est une cinématographie asiatique dont l'histoire est encore trop méconnue en dehors de ses frontières, c'est bien la coréenne. En quoi le cinéma du nord se distingue-t-il de celui du sud ? Quelle portée esthétique et thématique a eu et a toujours l'influence de l'Etat et du gouvernement de Kim Jong-il ? Hong Sangsoo est-il réellement, comme on a tendance à le dire, un disciple de Rohmer ? Une nouvelle génération d'auteurs se profile-t-elle déja ? Voici quelques réponses.
1. Comment vous est venue cette envie de vous fondre dans cette géographie cinématographique ?
Il existe encore des territoires que les historiens du cinéma n’ont pas explorés. Luttant contre l’ethnocentrisme de la plupart des études sur le cinéma (voir en particulier nos livres français sur le cinéma), j’ai voulu explorer le cinéma en Corée et en Asie à une époque où, en dehors des auteurs célèbres japonais et de travaux très orientés politiquement sur la Chine, très peu de choses avaient été écrites. Et ceci, tout en faisant contrepoint à la multiplication d’études anglo-saxonnes beaucoup trop faibles culturellement et esthétiquement parlant à mon goût. Le cinéma en Corée, le plus dynamique depuis toujours avec celui du Japon, était alors en pleine ébullition, car il se mettait au diapason du mouvement démocratique qui allait renverser la dictature militaire (fin des années 80). Des rencontres avec des réalisateurs (citons Yu Yun-mok, Park Kwang-su, Jang Sun-woo – alias Chang Sun-woo – Lee Myung-see, Bae Chang-ho, E.J Young, Lee Chang-dong, Kim Ki-duk et quelques autres) ont fini de m’initier à ce cinéma. A Taiwan, Tsai Ming-liang et à Hong-kong, John Woo et Wong Kar-wai m’ont servi de fil rouge ; au Japon ce furent Imamura et Oshima.
2. Quelle est la véritable différence entre les cinémas nord-coréen et sud-coréen ?
C’est une grande question à laquelle je réponds en détail dans un livre qui paraîtra bientôt en France. Il faut rappeler que le cinéma coréen existait bien avant la séparation des deux Corées. Il y a donc des similitudes fortes comme la dominante mélodramatique et l’objectif éducatif des films. La séparation de 1953, après la guerre de Corée, a placé le cinéma nord-coréen sous la tutelle des cinémas socialistes chinois et surtout russe. Le réalisme socialiste était la norme depuis 1934 en URSS, et depuis 1945 en Chine. Pour faire court, disons qu’il s’agissait de manière totalement idéaliste de faire un cinéma « pour le peuple », « par le peuple ». En fait, les institutions étatiques intervenaient sans cesse dans l’élaboration des films. Alors que ce système s’est effondré en URSS et bat de l’aile en Chine, la Corée du Nord y reste attachée. Le Sud, lui, a été après 1953 colonisé par les films américains. Ces derniers ont eu une forte influence esthétique et thématique, mais ils ont surtout réduit pendant longtemps le cinéma coréen à des séries B. Malgré la libre économie du cinéma sud-coréen, la censure de la dictature militaire y a été féroce et des monopoles financiers y sont toujours présents. La grande différence est donc – il faut le rappeler de nos jours, où beaucoup pensent que la mondialisation a supprimé toutes les différences idéologiques – qu’au Nord le cinéma est fait dans le cadre d’un régime dit communiste, et au sud dans le cadre d’un régime capitaliste.
3. Pour quelles raisons le cinéma du nord rencontre-t-il des difficultés d'exportation ?
Avant la dissolution de l’URSS, les films nord-coréens circulaient très bien dans ce qu’on nommait « le bloc socialiste » (pays de l’Est, Chine, Vietnam, Libye, Mozambique, Cuba etc.) Les festivals les y accueillaient et le commerce des films se faisait dans ce cadre. Hong Kil-dong, un film d’arts martiaux nord-coréen, a été l’un des grands succès commerciaux des pays socialistes dans les années 70. Les Nord-coréens se souciaient peu de diffuser leurs films dans le bloc impérialiste (Moscou et Pékin avaient stabilisé leur empire, et Pyongyang n’a jamais eu de volonté d’étendre la révolution coréenne à l’étranger) . Et les cinémas impérialistes ne songeaient pas à mettre sur leurs écrans ce qu’ils jugeaient être de la propagande communiste. Après la fin de l’URSS, les choses se sont compliquées. D’une part, le réseau socialiste est entré en crise ; d’autre part, les Occidentaux ont commencé à bien vouloir voir ce qui paraît comme de vieux films kitsch, « exotiques », donc. Enfin, un boycott sévère a été pratiqué par les gouvernements Bush et ses alliés à ce petit pays de « l’axe du mal ». Tout ce qui sort et entre en Corée du Nord est filtré, catalogué, rationné. La monnaie nord-coréenne, comme longtemps la monnaie chinoise, s’échange sur des critères totalement aléatoires. Toutefois, il faut noter que dans les années 50 et 60, les historiens et critiques européens ont porté attention au cinéma nordiste sans permettre vraiment d’établir un échange des films (il faut se souvenir que les films soviétiques russes ont longtemps été introduits en France de manière illégale, passant outre l’interdiction officielle).
4. Quelles sont les principales caractéristiques du cinéma nord-coréen ?
Je réponds à cette question en détail dans mon livre à paraître. Des contributions de chercheurs sud-coréens apporteront aussi un éclairage local très intéressant. Pour aller à l’essentiel, disons qu’ils sont fidèles à l’esthétique du réalisme socialiste, avec quelques particularités coréennes : les thèmes sont liés à la vie quotidienne ou aux héros de la guerre contre les impérialistes et les nobles. Les récits sont romancés, mélodramatiques, mais transforment le destin en pression des impérialistes, et la grâce divine en action du grand chef de la nation et des vertus du communisme national. Le style de montage est classique, s’indexant sur les dialogues. Mais la composition des images relève de la peinture socialiste (inspirée de l’Union Soviétique) : plan d’ensemble de catégories sociales, de foules, de soldats, de paysans, d’enfants, d’ouvriers, etc. Le jeu est naturaliste mais les images introduisent toute une symbolique qui dépasse l’idéologie socialiste pour rejoindre, parfois, des traditions nationales coréennes ou des philosophies asiatiques encore plus profondes (la relation de l’homme à la nature, la structure collective de l’organisation humaine etc.). Le récit recherche le moment de dépassement, l’emphase extatique à la gloire du peuple et des héros anonymes ou célèbres du pays. Le cinéma nord-coréen touche à presque tous les genres, du film d’arts martiaux à la comédie sentimentale. On note cependant l’absence de films érotiques et de comédies grotesques (un genre prisée au Sud). Il faut noter que des acteurs et actrices sont de vraies légendes vivantes au Nord et certains réalisateurs élevés aux plus hauts rangs de la hiérarchie sociale. Cet aspect proprement coréen, vient du fait de la passion bien connue pour le cinéma de Kim Jong-il, le grand chef du pays. Scénariste, réalisateur, théoricien du cinéma, il est omniprésent dans l’histoire du cinéma de ce pays. Il a plusieurs fois mis en avant le cinéma comme l’art populaire central de la nation.
5. Comment se définissent les moyens de financement dans ces deux pays ?
Le financement au Nord est totalement sous la tutelle de l’Etat. Les studios et le matériel appartiennent à l’Etat. Les techniciens, acteurs et réalisateurs sont formés par l’Etat. Rien ne se fait sans les institutions étatiques. Le budget consacré au cinéma est décidé annuellement. Il décroît sans cesse, du fait de la crise économique qui touche le pays. Il n’a plus rien à voir avec l’âge d’or des années 50-60
Au Sud, le financement est en grande majorité privé. Les aides de l’Etat se multiplient mais demeurent faibles. Une foule de producteurs animent le marché, mais ce sont des monopoles de gros distributeurs qui le contrôlent. Cette situation est un retour à la situation des années 60-70 en Corée du Sud, après une période de démantèlement des monopoles et d’afflux de nouveaux producteurs (années 80-90). Un grand tournant s’est produit avec la fin du système de quotas, qui permettait de freiner l’importation de films américains (la nouvelle vague coréenne des années 80 a pu exister grâce à ce système). Aujourd’hui, seuls les monopoles peuvent aligner un budget marketing concurrentiel par rapport aux Américains. La situation est donc critique pour les films faits en dehors des grands groupes. Les aides de l’Etat pourraient aussi baisser avec le nouveau gouvernement libéral. Des alternatives sont en cours d’élaboration : l’exportation vers l’Asie, d’abord, puis l’Occident ; la création d’un vrai marché vidéo en lutte contre le piratage massif ; la constitution d’un réseau de diffusion des films indépendants ; un rapprochement télévision-cinéma ; etc. Toutefois, des blockbusters sud-coréens remportent des sommes faramineuses ( The King and the Clown ou The Host , de Bong Joon-ho avec près de 13 millions d’entrées), qui renforcent le système des grands groupes. Et d’un autre côté, Jeon Soo-il, Hong Sang-soo ou Kim Ki-duk obtiennent des succès critiques mondiaux avec des films tournés grâce à des budgets de courts métrages sponsorisés par les régions en France…
6. Concernant le cinéma nord-coréen, vous dites souvent qu'il est « fondé sur le réalisme socialiste soviétique", mais que "son histoire montre une évolution des thématiques ». Quelle est cette évolution ?
Je traite particulièrement de cet aspect dans mon livre. Les premiers thèmes (les mots d’ordre à illustrer au cinéma comme en littérature ou en peinture), valorisaient les héros de la révolution et de la guerre contre les impérialistes japonais, américains et les nobles coréens. C’était le modèle russe. Puis, sous l’impulsion de Kim Jong-il, la vie quotidienne et les sentiments sont apparus comme thèmes. Les commissaires du peuple aux prises avec les difficultés d’un village sont devenus des héros ; les paysans, les leaders ouvriers, sont devenus des modèles de personnages pour les films. Les problèmes du pays apparaissent clairement : inondations, clivages entre soldats et civils; entre citadins et paysans etc.(manque, évidemment, le thème de la répression politique). Enfin, une sorte de socialisme autonome s’est constitué (dans les années 90), où les gens quelconques se débrouillent pour survivre (contre la nature hostile et manipulée par les impérialiste, par exemple). L’intervention des autorités se fait moindre. Les lourdes reconstitutions historiques sur le modèle russe, laissent place à un sentimentalisme exacerbé, typique du cinéma coréen traditionnel, ainsi qu’à des films presque intimistes autour d’une maison de village ou d’un pâté de maisons. Enfin, une certaine ironie critique provoque une double lecture des films comme dans Le journal d’une jeune nord-coréenne, sorti récemment en France. Certains clins d’œil font référence plus ou moins directement à la situation du Sud ou des pays impérialistes (situation toujours décrite comme catastrophique – chômage, misère, exploitation, aliénation, inégalités etc.) par les films du Nord.
7. Pouvons-nous dire que l'âge d'or du cinéma sud-coréen, celui des années 50, influença la nouvelle génération de cinéastes d'aujourd'hui ?
Les années 50 du cinéma coréen sont assez mal connues d’un point de vue esthétique, du fait de la disparition de nombreux films. Cela va mieux pour les années 60. L’histoire du cinéma coréen est très cohérente, et les cinéastes font preuve d’une grande cohésion entre eux. Comme je l’explique dans mes deux livres ( Le cinéma sud-coréen et Le cinéma asiatique ), on pourrait parler, comme en Chine, de « générations de cinéastes » en Corée. Les jeunes respectant leurs aînés et ainsi de suite. Cela implique une filiation automatique des styles. Toutefois, il faut rappeler que le cinéma coréen des années 50 était sous influence américaine et japonaise. L’un des courants profonds du cinéma coréen était de trouver sa propre originalité, de puiser aussi en Europe, en Amérique du sud , en URSS et en Chine d’autres influences. Un réalisateur comme Yu Hyun-mok (voir son interview fleuve dans le numéro de « Cinemaction » consacré aux cinémas d’Asie orientale), le parrain du réalisme en Corée, a tout simplement inventé le néo-réalisme coréen dans son film Obaltan en 1961, pendant la révolution étudiante. L’histoire du cinéma coréen est parsemée de films «ovnis » qui sont des balises servant de repères aux cinéastes actuels. Yu Hyun-mok est probablement celui qui, comme Abel Gance en France, a montré comment on peut bouleverser le cinéma commercial de l’intérieur et secouer la censure (voir aussi son film expérimental Empty Dream de 1965). C’est aussi grâce à quelqu’un comme lui que le cinéma est devenu digne d’intérêt pour les intellectuels en Corée. D’un point de vue esthétique, le cinéma des années 50-60 en Corée était l’équivalent de notre période de « qualité française ». On en retrouve des traces dans le cinéma des grandes compagnies qui dominent le marché actuellement. L’attention aux décors et l’argent qui se voit sur l’écran en est une ; le star system écrasant en est une autre ; les scénarios dominant l’art de l’image en sont aussi une trace. Comme en France, on n'y lisait que peu la situation – socialement dramatique – du pays, qui allait aboutir à la révolution étudiante et au coup d’état militaire de 1961. C’est peut-être aussi le cas aujourd’hui. Après le réalisme social et politique des années 80-90, voici venu le temps des grandes fresques nationales, aux idées bien plus abstraites.
8. Concernant le cinéma sud-coréen, on sait que le film *Fantasmes*(Gojitmal), de Chang Sun-Woo, distribué en France en 2000, a fait l'objet d'une certaine censure en son temps. Où se situe aujourd'hui cette société par rapport à la représentation de la sexualité ?
Le film Gotjitmal (traduisez « mensonge ») a marqué un sommet dans l’hypocrisie de la censure. Ce que n’a pas supporté la censure était, en fait, la dénonciation de la fausse morale imposée par la société et le choix d’une vie libre par les deux protagonistes (une jeune lycéenne choisit un peintre marginal bien plus âgé pour faire son éducation sexuelle). Le titre français « Fantasmes » est extrêmement réducteur (le « mensonge » correspond bien à l’enjeu social du film). Il faut savoir que le cinéma coréen, même s’il s’en défend par honte, a une tradition du film érotique « soft ». Histoires de prostituées au grand cœur et de perversions de filles de la campagne par la ville. Le tout est de bien voir que le moralisme est toujours dominant dans ces films, qu’ils cherchent un certain réalisme (ceux d’Im Kwaont’aek), ou une certaine fantaisie psychédélique. Gotjimal (et quelques autres comme Teenager Hooker became a killing machine in Daehakro, de Nam Ki-woon) ont essayé de faire du sexe une arme de libération sociale à l’image d’un Imamura ou d’un Oshima au Japon, et d’un Bunuel en Europe. Depuis la fin des années 90, avec l’essor des sectes protestantes et la reprise des contacts avec la Chine, le puritanisme a repris place, l’auto-censure a remplacé la censure directe, mais on se demande si c’en est la peine puisque peu de réalisateurs aspirent à la contestation sociale aujourd’hui. Au contraire, sous le couvert de comédies, de films d’horreur et de films de gangsters, on voit reparaître les films éducatifs pour la jeunesse, un ancien genre très en vogue partout en Asie. Bref, seuls quelques cinéastes «courageux » (je crois que c’est désormais le vrai qualificatif des auteurs de cinéma) osent aborder une sexualité dont les pratiques ne doivent pas accéder à la conscience collective : Hong Sang-soo (pour le réalisme), Kim Ki-duk (pour le surréalisme et le symbolique). A noter cependant qu’un film coréen comme Too young to die de Park Jin-Pyo était l’un des rares au monde à parler et montrer la sexualité d’un vieux couple. Mais les exceptions ne font que confirmer la règle.
9. Toujours dans le cinéma sud-coréen, ont aujourd'hui acquis une réelle renommée extra-territoriale trois cinéastes aux styles et aspirations bien distinctes. Kim Ki Duk, le prolifique, se dirigeant vers des fictions à la fois triviales et empreintes de « fantastique ». Park Chan Wok, auteur de films de série B ultra-conceptuels et violents. Hong Sang-soo, que l'on pourrait davantage qualifier d' « auteur », héritier d'une culture cinéphilique très large, voisin par certains aspects d'Eric Rohmer. D'autres « valeurs sûres » sont-elles à attendre ?
La situation est actuellement intéressante mais critique. Pour avoir participé à plusieurs débats sur le sujet du cinéma indépendant en Corée, je peux dire que l’enjeu est l’avènement d’un véritable cinéma indépendant des grosses compagnies (distribution-production). De ce nouveau mouvement naissent déjà de nombreux nouveaux cinéastes. Leurs films – souvent en numérique – sont encore peu connus car privés de distribution par les grandes compagnies qui détiennent des monopoles dans le domaine. Leur problème consiste en ce que deux clans s’affrontent de manière invisible : celui des indépendants en attente d’accès au cinéma « mainstream » (à la façon des américains) ; celui des vrais indépendants qui souhaitent poursuivre la création d’une œuvre personnelle en défiant les lois du commerce tout puissant. Pour ces indépendants, citons leur chef de file spirituel : Jeon Soo-il, auteur du minimaliste The Girl From Black Soil , qui peut se targuer d’avoir détourné l’acteur star Choi Min-sik ( Old Boy ) du cinéma commercial pour son dernier film tourné sur l’Himalaya. Notons, enfin, que les femmes cinéastes, d’abord documentaristes, mais aussi de fiction, se battent pour prendre place dans un cinéma qu’elles affectionnent particulièrement. Leur chef de file et marraine est Im Soo-rye qui, après quatre films, a fini par obtenir un succès commercial retentissant en 2007.
10. Parlons un peu de Hong Sang-soo. Il n'a pas eu besoin d'attendre de tourner un film hors de son pays pour « parler » à un public international. Quel est son regard sur l'accueil extérieur de ses films ?
Hong Sang-soo a jailli sur la scène internationale avec son chef-d’œuvre : La vierge mise à nue par ses prétendants (« Oh ! Soojong ! » en coréen). Le problème (comme pour Kim Ki-duk) est que le public coréen ne se presse pas dans les salles pour voir ses films. Les producteurs français, dont la recherche de projets exotiques est bien connue, lui ont proposé de financer ses films tournés en Corée. Ce qu’il a fait brillamment, mais avec un affaiblissement de sa vision, probablement à cause de la volonté de toucher un public plus international. L’épisode de production française passé, voici venu le temps du tournage en France. Il n’est pas le premier coréen à le faire ni le dernier. Cette étape devient de plus en plus de rigueur pour des cinéastes prisés par les critiques et les festivals internationaux, mais dépourvus de public et d’appuis financiers en Corée. Sans prétendre parler à la place de Hong Sang-soo, s’il voulait peu se soucier de la réception de ses films dans le monde et rester coréano-coréen, il ne le pourrait économiquement pas. Ce décalage entre le grand public coréen et un nombre de plus en plus grand de cinéastes talentueux dans ce pays, perdure et devient inquiétant. Il est urgent de créer un réseau réel de salles indépendantes, ou des réseaux de diffusion télévisée.
11. Pensez-vous que *Night and Day*, dernier film en date de Hong Sang-soo, marque un tournant, une évolution dans son cinéma ? Son style y semble moins « affirmé », plus ouvert à la perte de contrôle. Cela peut séduire ou laisser sceptique. Quel serait votre positionnement ?
Night and Day confirme une évolution en cours dans les 3 derniers films de Hong Sang-soo. Les critiques ont un peu trop exagéré l’influence du cinéma français (Rohmer) sur Hong Sang-soo. Ce dernier n’a jamais étudié en France mais aux USA. Un film comme La vierge mise à nue… montre une influence venant de Luis Bunuel. Surtout, il ne faut pas oublier un autre grand cinéaste asiatique de la réalité quotidienne la plus banale : Tsai Ming Liang. Hong Sang-soo parle surtout d’une influence littéraire française, observatrice de la petite bourgeoisie comme pouvait le faire les romans de Flaubert, et une autre, moins déclarée, qui est celle de la présence de scènes de sexe à l’écran. ( Je verrais aussi une influence thématique (les loisirs) et stylistique (les compositions naturalistes) de la peinture impressionniste française du 19e siècle). Notons trois évolutions jusqu’à ce dernier film « parisien » : l’un des points clefs du cinéma de Hong était l’expression banale mais très directe de la sexualité (voir les longues scènes d’un érotisme froid de ses premiers films). Les derniers films de Hong sont moins marqués par le sexe. Hong faisait à ses débuts une sorte d’éloge négatif de la nouvelle liberté sexuelle de la bourgeoisie coréenne. Depuis quelques temps, avec le retour d’un certain puritanisme dans le cinéma coréen (et aussi asiatique), Hong est privé d’un de ses points forts.
Deuxième évolution, positive celle-la, Hong applique son sens aigü de l’observation des situations absurdement banales du quotidien moderne à la France. Bien qu’il fasse un portrait bien trop positif de la vie des Coréens à Paris, il capte les lieux à ras du sol, les espaces-temps dans leur dense vacuité, comme jamais un réalisateur français n’est parvenu à le faire depuis les films de la Nouvelle Vague. Ce regard de Hong qui se tourne vers d’autres modernités artificielles pourrait compenser la troisième tendance de ces films récents, qui est la condensation de ses thèmes (l’inadéquation de l’homme (le vrai) avec la société moderne, la folie érotique des femmes, la déshumanisation des espaces de vie urbains etc.) autour d’histoires de plus en plus ténues, simplifiées, ne tenant debout que par la dérision du regard cynique de Hong sur ces vies en demi-teintes, pleines de petites lâchetés et de si peu d’héroïsme. Notons, enfin, que l’humour noir, la dérision subtile, si pesamment absents de la grande majorité des films coréens, est la marque toujours présente de l’art d’Hong Sang-soo.
12. Pouvez-vous nous parler du sujet de votre dernier film, que vous tournez actuellement ?
Ce n’est pas la première fois que je tourne en Corée : j’ai réalisé un documentaire sur Kim Ki-Duk, Kim Ki-Duk, cinéaste de la beauté convulsive, en 2006, un autre sur « Cheong-gye-chon » en 2005 et un docu-fiction, Nights and Days, en 2002. Cette fois, une équipe franco-coréenne et deux actrices coréennes assez connues (Yoo Ji-hyun et Kim Ginie) m’ont aidé à mettre en scène une série de poèmes que j’avais écrits lorsque j’habitais le centre de Séoul. Shim Hyun-jung, la compositrice de l’envoûtante musique du film Old Boy, de Park Chang-wook, a composé une musique originale sur toute la longueur du film. Il s’agit d’un « non-action movie », comme je m’amuse à le qualifier. Pourtant, on y voit des jeunes femmes mystérieusement appelées à rejoindre des endroits aux ambiances étonnantes dans la Séoul contemporaine, pleine de contrastes aussi saisissants qu’éphémères. Une voix semble les guider… Si les réalisateurs coréens ont déjà filmé Séoul de manière surréaliste ou loufoque ou violente ou mélodramatique, mon film est à ce jour probablement le film le plus mélancolique jamais tourné en Corée.
Propos recueillis par Samir Ardjoum et Sidy Sakho, le 22 juillet 2008.
Crise alimentaire en Corée du Nord / Le Figaro - 2008년 7월 29일
Source :
30/07/2008 | Mise à jour : 07:21 |
.
Les inondations et les maigres récoltes exposent la Corée du Nord à sa pire crise alimentaire depuis la fin des années 1990 et menacent la vie de millions d'habitants, a annoncé le Programme alimentaire mondial (PAM) des Nations unies.
Selon le PAM, les pénuries alimentaires se sont aggravées cette année après les inondations de 2007 suivies par de mauvaises récoltes.
"Des millions de nord-coréens vulnérables risquent de glisser vers la faim. La dernière fois que la famine a été aussi profonde et étendue en plusieurs régions du pays remonte à la fin des années 1990", a souligné Jean-Pierre de Margerie, le directeur du PAM pour la Corée du Nord, au cours d'une conférence de presse.
Il a ajouté qu'un appel international à l'aide serait lancé dans les deux prochaines semaines.
30/07/2008 | Mise à jour : 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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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inondations et les maigres récoltes exposent la Corée du Nord à sa pire crise alimentaire depuis la fin des années 1990 et menacent la vie de millions d'habitants, a annoncé le Programme alimentaire mondial (PAM) des Nations unies.
Selon le PAM, les pénuries alimentaires se sont aggravées cette année après les inondations de 2007 suivies par de mauvaises récoltes.
"Des millions de nord-coréens vulnérables risquent de glisser vers la faim. La dernière fois que la famine a été aussi profonde et étendue en plusieurs régions du pays remonte à la fin des années 1990", a souligné Jean-Pierre de Margerie, le directeur du PAM pour la Corée du Nord, au cours d'une conférence de presse.
Il a ajouté qu'un appel international à l'aide serait lancé dans les deux prochaines semaines.
<꼬레아, 코리아 -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 겉그림 / 오마이뉴스 - 2008년 7월 27일
[서평] <꼬레아, 코리아-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 / 민중원
공동체 속 개인을 살피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한국 사회에서 이름은 쉽게 다룰 일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일본에게 나라 이름을 빼앗기는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갖게 되면서, 한국 사회는 이름에 대해 더욱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자기 자신을 부르기 시작한 한국 사회가 자기 이름을 보는 눈빛은 한일 축구 그것을 넘고도 남는다.
남과 북으로 나뉜 뼈아픈 한국 역사는 나라 이름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 한 몫 단단히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같고도 다른 두 가지 한국 사회를 형성한 우리는 통일을 이루게 될 그 어느 날에 이름에 대한 논란을 반드시 거쳐 갈 게다.
통일 한국이 언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그 때에 우리나라 이름에 대한 논란은 21세기 '개인' 한국이 자신을 새롭게 규정짓는 작업이기도 하거니와 ‘공동체’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우리 자리를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기도 할 게다. 여하튼, 한국 사회는 우리나라 이름에 대한 논란을 쉽게 거둘 수 없는 많은 이유를 지니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서양 각종 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를 추적한 <꼬레아, 코리아>(오인동 지음/책과함께, 2008). 이 책을 살피는 일은 이처럼 이름에 관한 한 숨길 수 없는 강한 애착을 지닌 한국사회와 그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다....
공동체 속 개인을 살피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한국 사회에서 이름은 쉽게 다룰 일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일본에게 나라 이름을 빼앗기는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갖게 되면서, 한국 사회는 이름에 대해 더욱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자기 자신을 부르기 시작한 한국 사회가 자기 이름을 보는 눈빛은 한일 축구 그것을 넘고도 남는다.
남과 북으로 나뉜 뼈아픈 한국 역사는 나라 이름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 한 몫 단단히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같고도 다른 두 가지 한국 사회를 형성한 우리는 통일을 이루게 될 그 어느 날에 이름에 대한 논란을 반드시 거쳐 갈 게다.
통일 한국이 언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그 때에 우리나라 이름에 대한 논란은 21세기 '개인' 한국이 자신을 새롭게 규정짓는 작업이기도 하거니와 ‘공동체’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우리 자리를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기도 할 게다. 여하튼, 한국 사회는 우리나라 이름에 대한 논란을 쉽게 거둘 수 없는 많은 이유를 지니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서양 각종 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를 추적한 <꼬레아, 코리아>(오인동 지음/책과함께, 2008). 이 책을 살피는 일은 이처럼 이름에 관한 한 숨길 수 없는 강한 애착을 지닌 한국사회와 그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다....
우석훈이 쓴 <직선들의 대한민국> 겉 표지 / 오마이뉴스
[서평] 우석훈이 쓴 <직선들의 대한민국> / 이윤기
성난 쇠고기 민심이 촛불로 뜨겁게 타오르던 지난 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회견을 통해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운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 운하를 반대하던 사람들 누구도 더 이상 운하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운하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명박 대통령의 '불도저'를 세울 것인가? <88만원 세대>로 잘 알려져 있는 우석훈이 경부운하로 대표되는 건설공화국 대한민국의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하여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 지식하우스 펴냄)을 썼다.
우석훈은 이 책을 통해 대운하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대한 이해와 시대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담론을 살펴보고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겠단다.
경부운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이 아니거나 무엇에 씌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우석훈은 한국 경제구조 자체에 경부 운하사업을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과 사회적 여건이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경부운하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사업은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대운하는 단순히 이명박이 지나치게 토목건설을 지향하는 사람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통합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이 건설자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정당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2008년 총선의 공약만 봐도 그렇다. 통합민주당의 지역공약에는 경제성이 전혀 없어 이미 오래전에 정부에서 사실상 폐기한 경인운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난 쇠고기 민심이 촛불로 뜨겁게 타오르던 지난 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회견을 통해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운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 운하를 반대하던 사람들 누구도 더 이상 운하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운하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명박 대통령의 '불도저'를 세울 것인가? <88만원 세대>로 잘 알려져 있는 우석훈이 경부운하로 대표되는 건설공화국 대한민국의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하여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 지식하우스 펴냄)을 썼다.
우석훈은 이 책을 통해 대운하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대한 이해와 시대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담론을 살펴보고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겠단다.
경부운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이 아니거나 무엇에 씌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우석훈은 한국 경제구조 자체에 경부 운하사업을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과 사회적 여건이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경부운하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사업은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대운하는 단순히 이명박이 지나치게 토목건설을 지향하는 사람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통합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이 건설자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정당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2008년 총선의 공약만 봐도 그렇다. 통합민주당의 지역공약에는 경제성이 전혀 없어 이미 오래전에 정부에서 사실상 폐기한 경인운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박노자 "한국사회, 소득 재분배 활성화 돼야" / 매일경제 - 2008년 7월 23일
노르웨이 오슬로대 박노자(35.한국학) 교수는 23일 "한국사회는 소득 재분배의 활성화를 통해 고질적인 문제인 사교육과 의료서비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날 전북대 사회과학대학에서 열린 '한국사회를 위한 현실적 대안, 사회투자 국가모델?'이란 주제의 초청강연에서 "선진국은 물론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해 국민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고 있다"며 "이는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돈 쓰는 방식의 문제"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경제예산보다 복지예산이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분배론자인 박 교수는 "15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적인 소득재분배 효과는 40%가 넘지만 한국은 5%도 안된다"며 "한국의 소득재분배는 거의 시장에서 결정되며 국가의 역할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민주적 정부로 출범했지만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의 요구를 안 들을 수 없는 객관적인 상황이었다"며 "그 기로에서 한국은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진보정치에 대해서는 "한국의 진보정당은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비정규직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sollenso@yna.co.kr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경제예산보다 복지예산이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분배론자인 박 교수는 "15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적인 소득재분배 효과는 40%가 넘지만 한국은 5%도 안된다"며 "한국의 소득재분배는 거의 시장에서 결정되며 국가의 역할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민주적 정부로 출범했지만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의 요구를 안 들을 수 없는 객관적인 상황이었다"며 "그 기로에서 한국은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진보정치에 대해서는 "한국의 진보정당은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비정규직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sollenso@yna.co.kr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한국인들은 피부색에 따라 다르게 대해요" / 프레시안뉴스 - 2008년 7월 22일
인권오름] 이주노동자들, 한국의 인종차별을 말하다 2008-07-23 오후 12:11:02
...
누가 인종주의를 조장하고 이용하는가
한국 사회의 강력한 단일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성을 갖는 인종주의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인종주의는 경제주의와 결합되어 더 강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낳고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증가와 더불어 저임금 산업에서 이주노동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인 한국의 빈곤층이 인종주의와 경제주의적 편견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다. 한국의 빈곤층은 국내의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의해 빈곤에 내몰리고 있는 것인데도 마치 경쟁 관계에 있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조장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지위는 구조적으로 빈곤에 내몰리는 자신의 처지를 자기만족적으로 은폐하면서 기존의 차별적인 권력 구조에 더욱 동조하게 하는 효과를 낳기도 쉽다. 그럼으로써 저임금 노동력을 마음껏 이용하기를 원하는 한국의 기업과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을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음으로써 더욱 값싸게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저임금 한국인 노동자들을 비교적 손쉽게 관리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처럼 계속 가면, 10년 후에는 작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과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을 거예요."
레아남 씨가 한국 사회에 던진 충고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다.
(이 글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박석진/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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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인종주의를 조장하고 이용하는가
한국 사회의 강력한 단일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성을 갖는 인종주의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인종주의는 경제주의와 결합되어 더 강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낳고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증가와 더불어 저임금 산업에서 이주노동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인 한국의 빈곤층이 인종주의와 경제주의적 편견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다. 한국의 빈곤층은 국내의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의해 빈곤에 내몰리고 있는 것인데도 마치 경쟁 관계에 있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조장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지위는 구조적으로 빈곤에 내몰리는 자신의 처지를 자기만족적으로 은폐하면서 기존의 차별적인 권력 구조에 더욱 동조하게 하는 효과를 낳기도 쉽다. 그럼으로써 저임금 노동력을 마음껏 이용하기를 원하는 한국의 기업과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을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음으로써 더욱 값싸게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저임금 한국인 노동자들을 비교적 손쉽게 관리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처럼 계속 가면, 10년 후에는 작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과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을 거예요."
레아남 씨가 한국 사회에 던진 충고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다.
(이 글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박석진/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선문대, 독립기념관에서 역사지리서 '환영지' 원본 공개 / 한국경제
선문대, 독립기념관에서 역사지리서 '환영지' 원본 공개
(아산=뉴스와이어) 2008년 08월 04일 [09:05]--
독도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아산에 자리하고 있는 선문대학교(총장 김봉태)는 올바른 교육만이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줄 수 있다며 해외유학생 40여명과 함께 8월1일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선문대학교는 일본, 중국, 미국, 콜롬비아, 스리랑카 등 40여개국 1100여명의 유학생이 수학하고 있으며 이중 일본 유학생이 450여명 정도 된다.
역사학자이며 오랜 문화재 연구원을 지낸 이형구 교수는 사라질 뻔한 백제유적을 지켜낸 장본인으로 그는 요즘 불편한 심기를 감추치 않는다.
이형구교수는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지리서 환영지원본을 공개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伯珪)의 역사지리서인「환영지」(1770)의 역사지리서 「조선8도 총도」에 강웓도 동해상에 울릉도와 나란히 우산도(독도)를 그려놓았다. 영조(英祖) 46년(1770)에 제작된 이 지도에 우산도가 울릉도 보다 더크게 그려져 있는 것은 우산도의 존재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산도 옆에는 이도(夷島)가 있는데 “이것은 일본에 소속하며 이들은 야인(野人)에 가깝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일본의 북해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아산=뉴스와이어) 2008년 08월 04일 [09:05]--
독도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아산에 자리하고 있는 선문대학교(총장 김봉태)는 올바른 교육만이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줄 수 있다며 해외유학생 40여명과 함께 8월1일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선문대학교는 일본, 중국, 미국, 콜롬비아, 스리랑카 등 40여개국 1100여명의 유학생이 수학하고 있으며 이중 일본 유학생이 450여명 정도 된다.
역사학자이며 오랜 문화재 연구원을 지낸 이형구 교수는 사라질 뻔한 백제유적을 지켜낸 장본인으로 그는 요즘 불편한 심기를 감추치 않는다.
이형구교수는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지리서 환영지원본을 공개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伯珪)의 역사지리서인「환영지」(1770)의 역사지리서 「조선8도 총도」에 강웓도 동해상에 울릉도와 나란히 우산도(독도)를 그려놓았다. 영조(英祖) 46년(1770)에 제작된 이 지도에 우산도가 울릉도 보다 더크게 그려져 있는 것은 우산도의 존재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산도 옆에는 이도(夷島)가 있는데 “이것은 일본에 소속하며 이들은 야인(野人)에 가깝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일본의 북해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외국인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 / 매일경제 - 2008년 7월 30일
"외국교과서 오류 투성이"
"한국 수출품은 대부분 공산품과 목재다"(이집트 사회교과서. 2004-2005년) "한국은 말라리아 병에 전염되는 지역이다"(아르헨티나 일반지리교과서. 2007년)
다른 나라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배우는 내용들이다. 오류 투성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1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고 있는 '외국교과서의 한국이미지 기획전시'에는 이런 황당한 내용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3개국 48종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아르헨티나, 터키, 이집트, 중국 등 6개 국가에서 이같은 오류가 다수 발견됐다. 전시회에만 보이는 게 10여 건에 달한다.
독도영유권 분쟁을 일으키는 일본, 그리고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단순 오류가 주류를 이뤘다.
터키 고등학생들이 보는 지리교과서(2002년)에는 우리나라 민족이 대부분 한국인이지만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인으로 구성됐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아르헨티나 지리교과서(2004년)에는 한국이 중국어 사용국으로 분류돼 있으며 쿠웨이트 세계교과서(2004년)는 남한을 산아제한국으로 묘사해 놓았다.
빠른 인구성장으로 인해 가족계획을 통해 인구 증가를 제한하려한다는 30-40년 전 이야기를 그대로 실은 것.
그러나 이런 오류가 시정된 긍정적 모습도 눈에 띈다.
칠레 사회과교과서(2006년)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쟁 고아' 사진이 삭제됐으며 미국 세계사교과서(2005년)는 선덕여왕, 첨성대 등 한국 역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독도와 관련된 오기를 바로잡은 경우도 있다. 동해를 일본해로만 묘사한 우즈베키스탄, 미국, 브라질, 캐나다, 파라과이, 태국 등 6개국 11개 교과서가 중앙연구원의 노력으로 일본해 (동해) 혹은 동해(일본해)로 수정된 것.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재윤 연구원은 "한국에 대해 의도적인 왜곡을 하려는 나라는 많지 않고 대부분 정보 부족 때문에 일부 잘못된 내용이 교과서에 포함됐던 것 같다"며 "반기문씨가 사무총장에 당선되자 마자 바로 외국교과서에 실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나라에 한국을 알리려는 총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중연은 전시회가 끝난 다음날인 13일 서울 안국동 서머셋팰리스 2층 세미나홀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을 주제로 하는 건국 60주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각국 교과서와 매체에 나타나는 한국관련 서술의 변화'를 주제로 열리는 이 학술대회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6개국에서 온 7명의 외국학자가 발표자로, 국내학자 7명은 이에 대한 토론자로 각각 나선다.
buff27@yna.co.kr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한국 수출품은 대부분 공산품과 목재다"(이집트 사회교과서. 2004-2005년) "한국은 말라리아 병에 전염되는 지역이다"(아르헨티나 일반지리교과서. 2007년)
다른 나라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배우는 내용들이다. 오류 투성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1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고 있는 '외국교과서의 한국이미지 기획전시'에는 이런 황당한 내용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3개국 48종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아르헨티나, 터키, 이집트, 중국 등 6개 국가에서 이같은 오류가 다수 발견됐다. 전시회에만 보이는 게 10여 건에 달한다.
독도영유권 분쟁을 일으키는 일본, 그리고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단순 오류가 주류를 이뤘다.
터키 고등학생들이 보는 지리교과서(2002년)에는 우리나라 민족이 대부분 한국인이지만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인으로 구성됐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아르헨티나 지리교과서(2004년)에는 한국이 중국어 사용국으로 분류돼 있으며 쿠웨이트 세계교과서(2004년)는 남한을 산아제한국으로 묘사해 놓았다.
빠른 인구성장으로 인해 가족계획을 통해 인구 증가를 제한하려한다는 30-40년 전 이야기를 그대로 실은 것.
그러나 이런 오류가 시정된 긍정적 모습도 눈에 띈다.
칠레 사회과교과서(2006년)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쟁 고아' 사진이 삭제됐으며 미국 세계사교과서(2005년)는 선덕여왕, 첨성대 등 한국 역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독도와 관련된 오기를 바로잡은 경우도 있다. 동해를 일본해로만 묘사한 우즈베키스탄, 미국, 브라질, 캐나다, 파라과이, 태국 등 6개국 11개 교과서가 중앙연구원의 노력으로 일본해 (동해) 혹은 동해(일본해)로 수정된 것.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재윤 연구원은 "한국에 대해 의도적인 왜곡을 하려는 나라는 많지 않고 대부분 정보 부족 때문에 일부 잘못된 내용이 교과서에 포함됐던 것 같다"며 "반기문씨가 사무총장에 당선되자 마자 바로 외국교과서에 실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나라에 한국을 알리려는 총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중연은 전시회가 끝난 다음날인 13일 서울 안국동 서머셋팰리스 2층 세미나홀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을 주제로 하는 건국 60주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각국 교과서와 매체에 나타나는 한국관련 서술의 변화'를 주제로 열리는 이 학술대회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6개국에서 온 7명의 외국학자가 발표자로, 국내학자 7명은 이에 대한 토론자로 각각 나선다.
buff27@yna.co.kr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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